소설리스트

23화 (2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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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층 가량의 높은 별관 옥상은 화창한 햇살을 받기엔 더없이 적합한 장소라는 것을 자랑하고 있었다. 콘크리트는 화사하게 빛났고 난간의 대리석들은 햇살을 흡수하며 미려한 조각마냥 색깔을 변화시켰다. 예산이 꽤나 들어갔음직한 모습이었지만 별관 자체가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 아니었기에 사람은 뜸했고, 옥상은 더욱 더 사람 기척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곳도 가끔씩은 소동이 일어야한다는 법을 일깨워주기라도 하듯 성진은 조금 거칠게 옥상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여전히 선영 손목을 붙잡은 채 중앙 부분으로 한걸음한걸음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는 잠시 문을 열었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이 살짝 떨리고 있었고 그는 자신이 초조해하고 있음을 자각했다. 그는 쌀쌀한 날씨마저 잠시 잊게 해줄 따스한 옥상 햇살을 한껏 들이마시며 그 초조함을 덜어버리려 했다.

성진은 자신이 매달려 마지막 순간까지 선영을 붙잡았던 난간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어금니를 살짝 깨물면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선영은 고개를 숙여서 늘어뜨린 머리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성진은 한쪽 팔을 앞으로 뻗어보이면서 입을 열었다.

“자, 내키진 않겠지만 봐. 이곳이 네가 자살을 시도하기 직전의 장소다. 동시에 예전의 너와 내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장소이기도 하지. 감흥 같은 거 있나?”

“…….”

“떠오르는 것 있어, 없어?”

선영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이 없었다. 어쩐지 옥상에 온 후로 줄곧 바닥만 보고 있었던 듯하다. 성진은 다시금 초조함이 올라오려는 기분을 받자 그녀를 다그치려 했고, 그의 이성은 그것을 제지했다. 왜 이러지? 그녀 자신도 궁금할 텐데 얼굴을 들지 않아? 성진은 선영의 손목을 잡았던 손을 놓고는 대신 그것을 그녀의 어깨에 얹었다.

“이봐, 은선영. 괜찮아?”

“……아파.”

성진은 자신이 무의식중에 그녀의 손목을 너무 세게 붙잡았었나 하고 떠올려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손목은 놓았을 때부터 힘없이 아래로 늘어져있는 걸로 보아 그것은 아닌 듯하다. 대신 그녀의 다른 쪽 손이 머리카락을 움켜쥐듯 올라와있는 게 눈에 띄었다. 성진은 그 사실에 꿈틀했고, 선영의 어깨에 얹은 자신의 손을 조금 흔들어보았다.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깁스 푼 다리야? 아니면 그쪽 팔? 어디 앉아서 좀 쉴까?”

“……머리.”

“머리?”

“머리 아프다고. 이상해. 머리가…… 미칠 듯이 울려대고 있어….”

갑자기 선영의 몸이 허물어지듯 내려앉았다. 그렇게 자리에 주저앉을 뻔한 그녀를 성진은 재빨리 부축했다. 급하게 부축하느라 약한 왼쪽 팔을 잡게 되었지만 그녀는 그런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성진은 다급하게 외쳤다.

“혹시 이곳 때문이야? 그래도 눈을 떠봐! 이곳, 이곳. 그래.”

성진은 그녀를 부축한 채 비틀거리며 난간 쪽으로 걸어갔고, 꽤 폭이 넓은 난간 근처로 도착하자 그 위를 다른 쪽 손으로 탁탁 치면서 말했다.

“여기가 네가 올라섰던 곳이야. 눈을 떠봐. 네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머리 이쪽 저쪽을 쾅쾅 울려대는 지독한 통증 속에, 선영은 그의 외침을 간신히 들었다. 그리고는 어렵사리 고개를 조금 들어 눈을 떴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대리석으로 된 난간이었으나 선영은 그걸 보는 순간 약 몇 초간 머릿속에 뭔가가 일그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분리되는 건지 헤집는 건지 비트는 건지 모르는 괴기하면서도 섬뜩한 기분. 그녀의 눈동자가 차원이 다른 공간을 바라보듯 초점을 잃었고 입은 살짝 벌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선영 자신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아득한 심연 같은 곳으로. 바닥의 검은 구멍에서 손이 뻗어나와 자신을 밑으로 끌어당기는 느낌으로.

줄곧 눈을 뜨고 있었지만 그 검은 심연은 어떠한 조잡한 컴퓨터 그래픽이 만들어낸 것 같은 광경으로 바뀌어있었다.

- ……이곳은? -

선영의 시야에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다. 하지만 사실 선영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처음이지만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것이 또 다른 자신이 경험했던 것이라는 점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는.

붉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피같이 붉은 비. 선영은 자리에 서서 한참동안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무도 비현실적이지만 동시에 시각으로 보이는 현실적인 감각이었기에 그녀는 그 섬뜩함을 수렴하기 이전에 익숙해져야 했다.

이런 것도 익숙해지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검은 공간에 쏟아지는 붉은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선영. 문득 자신도 그것을 맞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궁금증에 무심코 팔을 들어 바라보려 했다. 그 때 먼 발치에서 뭔가가 아릿거리는 것이 그녀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의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그 아릿거리는 것은 꿈결처럼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점차적으로 시야에서 구조화되는 인영. 추리할만한 흔적은 없었지만 그녀는 어쩐지 그 인영이 붉은 비를 아주 오래 전부터 맞고 있었다는 기분을 받았다.

그리고 선영은 평생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율적인 공포감을 맛보았다.

- 너…… 너……! -

- …… -

경악한 그녀와는 달리 무생물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마주 보는… 또 다른 자신. 거울로나 볼법한 모습이었지만 문제는 그녀가 알몸인 데다가 자신이 짓고 있을 표정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선영은 기절할듯한 섬뜩함을 느꼈다. 그렇게 약 1미터 - 현실로 그 정도의 거리감을 느꼈다 - 가량까지 걸어온 선영은 충격을 받아 어쩔 줄 모르는 선영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쓸 데 없는 짓 하지 말라고 해 -

- 뭐… 뭐? -

곧바로 얼굴을 가리고 어딘가로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한 편으로 치부해둔 채 자신의 궁금증을 밀어붙여보는 선영. 그리고 그런 선영을 바라보는 선영은 한 손을 슬며시 들어올렸다. 선영은 그런 자신의 모습에 움찔했지만 이곳에 있었던 그녀는 단순히 귀찮은 것처럼 머리를 쓸어넘기는 시늉을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 가서 그 멍청이에게 전하라고. 내 본래의 기억을 끄집어내려는 헛수고 그만하고 날 그냥 놔두라고 -

- 자… 잠깐. 너, 본래의 나 맞지? 나는 뭐지 그럼? 나는 이채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모르는 것도 너무 많아. 나는 성욕이 뭔지도 몰라서 지금 트러블이 일고 있어 -

당연하게도 자신의 본래 모습을 만날 수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그녀의 궁금증은 정리되지 않은 채 나오는 대로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본래(?)의 선영은 그런 자신을 마치 남 보듯 바라보면서 두 번 설명하기 짜증난다는 투로 짧게 내뱉었다.

- 그 따위 성욕. 없어도 살아갈 수 있잖아? -

- 이봐, 당신! 무슨 말이 그 따위야? 네 전 애인 성진은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고! 게다가 난 그에 관한 기억도 없어! -

- 애인? 웃기는군. 그와 나의 관계는 별 거 아니야. 내 예전 남친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에 비하면 찰나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짧아. 애초에 호기심으로만 잠깐 스쳐갔던 거지. 주제도 모르고 날 이해하겠다고 설쳐대기까지 했으니 -

- 그를 좋아하고 싶지? -

본래의 선영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현재의 선영은 자신의 직감을 믿고 있었다.

- 그래서 그렇게 길게 얘기하는 거지? 자신도 모르게 신경쓰고 있다는 증거지 -

- 그렇지 않아 -

- 그렇다고 봐. 넌 내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할 셈인가? 내가 내 자신의 직감을 믿지 못한다면 어찌해야 할까? -

어느 샌가 공포감은 사라지고 선영은 박수라도 치고 싶어졌다. 여전히 자기 얼굴을 바라보는 시각적 감각은 익숙해질 수 없었으나 그녀는 자기 자신과 제대로 싸우고 있다는 유쾌함까지 느꼈다. 본래의 선영 뒤로 끊임없이 쏟아지는 붉은 비마저도 더 이상 그녀에게 공포감을 부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주도권은 본래의 선영이 갖고 있었다. 그녀는 길게 얘기하지 않겠다는 의도마냥 몸을 반쯤 돌리고선 차갑게 말했다.

- 그래……. 신경쓰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겠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야 없겠지 -

잠시 뜸을 들이는 그녀. 하지만 사실 그건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거의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짧은 사이였고, 그녀는 연이어서 말하듯 이어갔다.

- 하지만 그 선에서 끝이야 -

- 무슨……? -

-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하지 않는 이상, 난 지긋지긋한 현세를 더 이상 살아가고 싶지 않는다는 의미지.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그 잘난 두뇌 속에 너무 많은 것을 의식하려 하지 말고 본연의 내가 누군지 되짚어보려 하지 말고 평범한 여자를 연기하며 살아가는 게 최선이란 거야 -

현재의 선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완전히 몸을 돌리려는 자신을 향해 항의하듯 외쳤다.

- 그런 거 몰라 난! 연애도 섹스도 모른다고! 이런 나는 어떻게 살아가라는 거야! 너무 무책임하잖아! 자기는 이런 공간에 숨고 나를 대행마냥 내다니! 비겁해! 너무해! -

본래의 선영은 그런 현재의 선영에게 그렇게 만들어진 건 자살하는 순간에 튀어나온 네 자신의 의지였다고 굳이 일깨워주진 않았다. 대신 끔찍한 핀잔을 던지는 악마처럼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 정확히는 모르는 게 아니라 계속 몰라야 할 거야 -

- 뭐……? -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몸을 돌려 붉은 비가 쏟아지는 그림 한복판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걸어가버렸다. 현재의 선영은 그제서야 본래의 선영이 퉁명스러우면서도 얼마나 ‘친절하게’ 대화의 상대를 해주었는지 자각할 수 있었다. 현재의 선영은 아직 알아내지 못한 궁금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래서 걷잡을 수 없는 목마름 같은 것을 느끼며 갈망하듯 붉은 비 쪽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본래의 선영은 처음부터 대답할 의무는 없었다는 것처럼 멀어졌고 현재의 선영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검은 심연을 지나 현실로 돌아온 선영에게 가장 먼저 엄습했던 건, 그곳에 빨려들어가기 전 느꼈던 두통이었다. 선영은 무거운 자신의 몸을 느끼고 현실적인 감각을 느끼고(더불어 옥상 햇살도 느꼈고), 그 점에 겨우 정신을 차리려는 찰나 덮쳐온 두통에 머리를 붙잡아야 했다.

“아야…. 아아아아……!”

“엇… 야! 은선영! 정신이 드냐?”

“머리가… 머리가 깨질 것 같…….”

그러나 얼굴 바로 앞에서 외쳐대는 성진의 다급한 목소리도 겨우 들을 정도로 자신을 괴롭히는 그 지독한 두통은 순식간에 변화가 일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바로 가라앉음이었다. 선영은 언제 그랬냐는 듯싶게 싹 하고 사라진 두통에 멍청히 눈을 떠서 앞을 바라보았다. 물론 아직도 약간씩 지끈거리게 하는 면은 있었으나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때려대는 느낌을 받았던 것에 비하면 추억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야! 선영아! 괜찮아? 괜찮냐고!”

넋을 놓고 있는 선영을 ‘너무 아파서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닌지 불안해진 성진. 그는 선영의 어깨를 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제대로 된 현실 감각으로 돌아온 선영은 이제 그만 하라는 듯 그의 손을 거둬들였다.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뗐지만 성진은 아직도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선영은 자신이 심연 속에 있는 동안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해보았다. 핸드폰을 꺼내 볼 기력도 없던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해를 바라보았고 아직 높다랗게 떠 있는 모습에 그리 많은 시간은 지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문득 선영은 자신이 꽤 이상한 차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비현실적인 감각을 거쳐온지라 정신은 아직 몽롱했지만 자신이 어떤 차림을 하고 있었는지 정도는 충분히 자각하고도 남을 계제다. 선영은 어째선지 자신의 몸 구석구석이 옷깃을 스치며 하늘하늘거리는 걸 느꼈고 살짝 쌀쌀한 느낌도 거기에 느껴졌다. 그리고 헛기침이라도 낼 것 같은 표정으로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는 성진을 바라보게 되자 그녀는 그제서야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몸에 착 달라붙는 줄무늬 티셔츠는 브래지어를 낀 가슴을 드러내보인 채 올라가있었고 걸쳐진 하늘색 재킷은 바람에 이따금씩 나부끼며 맨살을 살살 간지럽히고 있었다. 그리고 짧은 청치마는 들춰진 채 팬티가 보지털을 드러내보일 정도로 반쯤 내려간 상태였다. 어쩐지 그곳이 젖어있다는 기분을 받은 선영은 다시 성진을 바라보았다.

성진이 뭐라고 변명할 틈은 없었다.

“그… 이건….”

짜악-!

선영의 손바닥이 앞으로 세차게 휘둘러지며 성진의 뺨을 가격했다. 그는 벌개진 뺨을 붙잡고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고 선영은 그런 그를 노려보며 혐오감 담긴 어조로 또박또박 말했다.

“미쳤냐?”

“아니, 야…… 잠깐, 이건….”

“아무리 내가 섹스에 대해 모른다기로서니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그 짓을 하려고 해? 게다가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러니까 설명할 틈을 좀… 야, 근데 너 손 되게 맵다.”

“아 몰라! 대체 남자란 건… 다 김성진 같지만 않으면 좋겠네.”

쩔쩔매는 그를 완전히 폄하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은 선영은 ‘나 가버릴 거야!’라며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곤 제대로 옷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서둘러서 옥상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녀의 시야에 옥상 문을 틀어막고 있는 크고 무거워보이는 벤치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문을 열고 올 수 없게끔 폐쇄된 모습에 선영은 ‘이것이 아주 작정을 하고 날 덮치려 했구나’라는 시선으로 다시 성진을 돌아보았다.

성진은 옥상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서서 그녀의 시선을 마주보았다. 한 손은 여전히 붉어진 뺨에 갖다대고 있었지만 다른 한쪽 손은 재킷 주머니에 넣어져 있었고 그건 어째선지 여유로워 보이는 자세이기까지 했다. 선영은 약간 멀어진 그를 향해 몸을 돌려서 조금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거 치워!”

성진은 난간에 등을 기댄 자세로 슬쩍 웃기만 했다. 당연히 선영은 그 웃음의 의미를 몰랐고 그래서 초조해져 다시한번 소리쳤다.

“말 안 들려? 이 벤치 치우라고!”

그제서야 마지못해서 등을 떼고 두 손을 재킷 주머니에 넣은 채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성진.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벤치가 아니라 어쩐지 선영에게 향해져 있는 것 같다. 선영은 그런 그의 모습을 주시하다가 주먹을 꼭 쥐고 몇 걸음 뒷걸음질쳤다. 그녀의 입이 더듬거리듯 열렸다.

“야, 야. 김성진…. 마… 말해 두겠는데 덮친다든가 하면 나… 나 소리질러 버릴 거야. 아무리 6층이라 해도 저 난간에 매달려서 소리지르면 사람들 다 들릴 테고 올라올 거야. 아… 알아? 듣고 있냐고?”

성진은 자리에 멈춰섰다. 하지만 그녀의 협박(?)에 제지를 당했다거나 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저 그 자리에 선 채 비스듬히 쏟아지는 햇살을 느끼기라도 하는 양 피식 하고 웃었을 뿐이었다. 영문을 모르고 그를 쳐다보는 선영을 향해 성진은 미소 띤 얼굴로 넌지시 말했다.

“다행이다.”

“뭐… 뭐?”

“괜찮은가 보네. 네가 워낙 심각한 얼굴로 괴로워하고 있어서 또 이상한 방향으로 정신이 흘러가버리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제는 머리아픔에서 해방된 모양이군. 뭐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다행이라는 거야.”

선영은 아직 제대로 추스려지지 않은 옷깃을 한 손으로 꼭 붙잡고는 그를 마주보았다.

“나… 날 걱정해준 거야? 그럼 이 꼴은 왜….”

“아, 그거.”

성진은 한 손을 주머니에서 빼들어 볼을 긁적이면서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어쩐지 말하기 쑥스러운 무언가를 굳이 설명해야 하는 난처함이 그의 표정에서 드러난다.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예전의 너와 짧은 만남 속에서 강렬한 썸씽 같은 게 있었거든. 그것이 기억 속에서 잠식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야. 너는 잘 모르겠지만 조금 전에 머리 아프다고 비틀대다가 정신을 잃은 것처럼 쓰러졌는데, 사실 정신을 잃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게… 입으로 끊임없이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더라고. 마치 머릿속의 누구랑 대화를 하는 것처럼.”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글쎄… 보이지 않는 그 누군가의 상대가 뭐라고 말하는지 알았음 좋았을 텐데. 아무튼 내가 듣기로는 의미모를 소리들뿐이었어.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할 셈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연애도 섹스도 모른다고! …뭐 이런 항의 비슷한? 그래서 나는 짐작으로 네가 네 안의 잠식된 무언가와 싸우고 있다는 걸 느꼈지. 그리고 그걸 끌어올리는 데…….”

성진은 잠깐 시선을 다시 선영에게로 향했고, 그녀가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다시금 피해버렸다. 하지만 그의 입은 설명을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매여 계속해서 열렸다.

“내가 뭘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을까 생각했던 거야. 하지만 말이라곤 통할 수 없는 상태였잖아. 그래서… 그 때의 강렬한 기억을 되새길 수 있는 경험을 다시 한번 주입시키면 어떨까… 하고…….”

“…그래서 의무감으로 그렇고 그런 짓을 하려고 했다고?”

“그, 그… 예전에 시르 병원 의사도 그랬어. 기억을 잃은 당사자가 다시 한번 그 경험을 한다면 몸이 기억하는 회로로 다시금 되찾을 수도 있… 다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별관 옥상은 다시금 평화를 되찾은 것마냥 조용하게 화창한 햇살을 그들에게 내리쬐고 있었고, 선영은 그의 말이 끝났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진이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피했던 시선을 다시금 그녀에게로 돌리려던 찰나였다. 선영은 조용히, 차분한 걸음걸이로 한발한발 성진에게 다가갔다. 콘크리트 위에 또각또각하는 그녀의 구둣발 소리가 적막하게 들려왔다.

이번엔 성진이 당황할 차례였다. 성진 바로 앞까지 걸어온 선영은 그를 올려다보면서 - 선영은 본래 키가 꽤 큰 편이었기에 약간만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정도였다 - 옷깃을 여미던 손을 스르르 들어올렸다. 그녀의 앞가슴이 제지에서 벗어난 듯 살짝 풀어지면서 다시금 하얀 브래지어가 보였고 성진은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야, 선영아. 지금 뭐 하려는…….”

하지만 그런 그의 물음은 휴지조각으로 한 채 그녀의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은 그의 목 언저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섬세한 손가락 이동을 목으로 느낀 성진은 아찔한 기분을 받았다. 이… 이 녀석 도대체 뭘 하려는…. 선영의 갈색 빛이 어린 아름다운 눈동자가 그런 성진의 모습을 투영하듯 가만히 마주보고 있었다.

이윽고 툭 하고 열리는 그녀의 입술.

“…정말 그런 의무감만 있었어?”

“어? 어… 그래! 난 정말 하늘에 맹세코 다른 흑심이 있었던 건……!”

하지만 어째선지 눈을 살짝 내리깔면서 얼굴을 붉히는 선영.

“그렇구나…. 그럼 좀 아쉽네…….”

“아쉽다니…?”

“아냐, 그냥…. 내가 매력적이라서 그랬던 건 아니란 거구나 하고….”

“뭐… 뭐?”

“역시 난 예전의 내가 아닌 이상 너한테 아무것도 아닌 존재……. 지금의 난 여자로서 매력이 아무것도 없는 걸까?”

그리고는 다시금 용기를 내는 것처럼 성진을 마주보는 선영. 성진은 갑자기 그녀의 아름다운 두 눈동자 뒤에 숨겨진 간절함 같은 것이 느껴져 침을 꿀꺽 삼켰다. 동시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뭐지…? 그녀가…… 지금의 그녀가 왠지 모르게 굉장히 예뻐보이는 기분…. 이것은…….

성진은 투정만 부리던 그녀가 좀 전의 정신잃음(?)으로 인해 각성한 게 아닌가 하는 추측마저 일었다. 혹시 그녀가… 성(性)적인 정체성과 자각심을 되찾아가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자 성진은 갑자기 참을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미치자 성진은 그녀의 두 팔 윗부분을 자신의 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아… 아냐! 실은… 그런 것도 좀 있긴 했어. 너같이 예쁜 애를 아무 생각 없이 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지! 선영아. 저…….”

“후… 훗. 쿡쿡…….”

“나 실은 지금…… 어?”

“쿡쿡쿡…… 킥킥….”

“선영……?”

왠지 참지 못해서 터뜨리는 것처럼 입을 꽉 다물고 웃다가 고개를 숙여버리는 선영. 그 상태로 한참을 킥킥거리며 웃어댔다. 그리고 성진은 우두커니 서서 멍청한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몸을 굽히고 웃어대던 선영이 이윽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는 중이었다. 성진은 그것이 다름아닌 너무 웃어서 나온 눈물이란 걸 짐작하였다.

“어때? 그럴 듯 했어?”

머리를 망치로 때리는 듯한 기분을 받게 된 성진. 그는 그녀의 물음에 답할 생각도 못하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뭐… 엇……. 너, 설마…….”

“왠지 좀 바보 같은 기분이 들긴 했지만 나름 재미있네. 이럼 남자들이 좋아한다며?”

키득 하고 웃으며 성진을 쓱 하고 노려보는 선영. 성진은 도대체 어디서 그것을 보고 배웠냐고 물을 생각도 못한 채 몇 걸음 뒤로 비척비척 물러났다. 이 녀석…. 역시 사람 골리는 감각은 예나 지금이나 살아있단 말야. 성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치 자신이 두통이 이는 것처럼 한 손을 머리에 얹고는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때 따스한 햇살을 타고 건너오는 듯한 선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마워.”

“…뭐?”

“이건 진심이야. 어쨌거나 날 위해서 그렇게 노력해주는 것. 이젠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아…. 네가 예전의 나와 어떤 관계였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그 때든 지금이든 날 위해서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려고 노력해주는 것은 분명하니까.”

다리를 살짝 교차한 채 성진을 바라보며 말하는 그녀는 특별한 어조도 없었고 살짝 미소 띤 표정이 전부였지만, 성진은 그 진실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뒤이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차오르는 기분을 받았다. 성진은 그것이 비단 옥상 햇살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재킷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로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의 그녀를 위해서지 딱히 널 위해서는 아냐.”

“그녀가 나고 내가 곧 그녀야. 그렇잖아? 그래서 나는 고맙다고 얘기하는 거야.”

성진은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터벅터벅 다가갔다.

“참 특이한 상황이긴 하지만 그도 그렇군. 저쪽에 벤치가 하나 더 있어. 일단 좀 앉아서 쉬자.”

어디까지나 옥상이었기에 짧은 거리였지만 성진은 그녀가 걷기 쉽게 부축을 했고 선영도 그의 팔을 꼭 감싸 안았다. 그렇게 살짝 절뚝거리면서 걸어간 그들은 햇살이 잘 드는 곳에 놓여진 벤치에 감사하며(?) 편하게 걸터앉았다. 선영은 한쪽 무릎을 들어올려 그것을 가슴에 끌어안은 자세로 앉았다. 그리고 성진은 자신이 담배를 피운다면 하나 꺼내어 물면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조용히 미소지었다.

한결 푸근한 표정으로 햇살을 쬐는 선영. 성진은 그런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곤 입을 열었다.

“그래. 그 누군가는 뭐였지?”

질문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선영은 그 자세 그대로 곧바로 대답했다.

“나야.”

짐작하고 있던 성진은 별로 놀라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의 너인가 보군. 의사 말이 맞았어. 선영이란 존재의 본모습이 이중인격 비슷하게 나뉘어져 한쪽은 잠식되었다고. 그렇다면 여기로 온 게 효과는 있었다는 거네. 그녀를 만날 수 있었으니.”

그리곤 아무 말도 없는 선영을 바라보곤 문득 자신이 너무 이기적이었나 싶어서 손을 흔들었다.

“아, 아니… 뭐 네가 두통으로 고통스러웠던 건 알고 있지만… 전체적인 상황으로는 고무적이란 의미…….”

“쓸쓸해 보였어.”

“어…?”

선영은 여전히 한쪽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고개만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표정이었지만 그 안에 감춰진 쓸쓸함을 난 알고 있었어. 그녀는 현세로 돌아오고 싶지 않다고 했어. 그녀에게 있어서 이 세계는 너무도 지긋지긋하고 목적 없는 세계야. 긴 얘기는 하지 못했어도… 나는 그녀가 충분히 자살을 실행으로 옮길 감정이었다는 걸 알아챘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천재였으니까.”

성진이 말하는 ‘우리’라는 지칭에 묘한 기분을 받은 선영은 살짝 미소지었다.

“그런가? 나도 그런 두뇌일 것은 분명한데 난 잘 모르겠네. 아무튼 그녀가 돌아나와 나랑 합쳐지지 않는 이상 기억은 절대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난 섹스와 연애를 전혀 모르고 살아가겠지.”

“왜 하필 너로 하여금 섹스와 연애를 철저히 배제했을까.”

“너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겠지.”

선영은 그제서야 성진을 돌아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성진은 갑자기 어금니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이빨을 꽉 깨물고 있었던 것이다.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란 건가?”

“현세를 느끼지 않고, 심연 속의 무의식에서 존재하는 다른 방식의 삶이야. 그녀는 그것을 지향하고 있어.”

“이제 알겠군.”

성진은 벤치에서 일어나 뭐라도 걷어차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이 현상에 대한 원인은 그녀가 조금 전 지적한 그대로였다. 본래의 선영은 돌아오길 거부하고 있었다. 영원히 죽음 같은 무의식의 삶 속에서 안주하길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태면 현세를 살아가야 할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워질 것이다. 돌아오고 싶어지게 되어버리는 것. 그리고 그것은 성진을 알게 되었던 것에서 오는 기대감 같은 것….

그래서 그녀는 성진을 떠올리게 되는 추억 같은 것이 일만한 자극을 회피하는 것이다. 무의식 중이라 해도 현재 ‘다른 정체성의’ 자신이 살아있는 한 그것을 느끼고는 있을 테니까. 옥상으로 올라왔을 때 일었던 두통은 성진을 떠올리게 하지 말라는 본래의 선영의 경고일 거였다. 섹스와 연애도 그를 떠올리며 자신을 돌아오게 할 설렘을 자극하지 말라는 의미로 그녀가 배제시킨 것일 거였다.

모든 정황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성진은 ‘앎의 기쁨’보단 ‘앎으로써 파생되는 분노’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입이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려진다.

“뭐야, 그 자식…….”

성진이 ‘그 자식’이란 게 자신 속의 본래의 선영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다른 자신을 이렇게 무책임하게 살아가라고 내팽개쳐놓고 정작 본인은 그 안에서 원하는 삶을 살겠다고? 뭐 그 따위 자식이 다 있어? 녀석의 성격은 익히 짐작했던 바이지만… 이건 정도가 지나치잖아!”

“성진아…?”

“그러면 지금의 선영은 뭐가 되는 거냐고! 현세를 살아갈 의미를 찾지 못해서 멋대로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하는 것은 그렇다고 쳐. 어차피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은 이해하지도 못할 테니까. 하지만 지금 살아가는 선영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여건도 만들어주지 않고 자기 입맛에 맞게 규제한 후 혼자만 안주하겠다? 이젠 현세를 살지도 않는 녀석이 왜 현세를 살아가는 사람의 권리를 앗아가는 건데? 그 따위 오만함에 난 치가 떨린다고!”

성진은 선영을 돌아보았다. 선영은 그의 날카로운 표정과 눈빛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스위치 같은 게 올라갔다는 직감을 받았다. 성진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 보면서 짧고 강하게 한마디 말했다.

“하자.”

“뭐……?”

“지금 여기서 나랑 섹스하자고. 그 빌어먹을 본래의 선영이란 년에게 복수하는 거야. 현세로 끌어내어 버리자고!”

“그… 그치만…….”

“녀석을 끌어낸다면 분명 너와 합쳐지겠지. 너는 그녀와 기억을 공유할 테고 그러면 분명 평범한 20대 초반의 여대생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야. 지금의 너는 너무 많은 것을 그녀에게 제지당하고 있어!”

선영은 그 모든 것이 성진의 말대로 잘 풀려나갈지에 대한 의심이나 두려움 같은 것은 일지 않았다. 어차피 많은 과거의 기억과 섹스, 연애적 감정을 상실한 채로 살아간다는 건 그녀 자신에게 있어서도 내키지 않는 것이었기에. 변화하고 싶었다. 그것이 희극적으로 되든 비극적으로 되든.

문제는 그녀가 지금 당장으로서는 섹스를 모른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제대로 할 수 있지? 현재의 선영으로선 그저 남녀가 옷을 벗고 끌어안고 뒹굴면 뭔가 모르던 것이 생긴다… 라는 추측 같은 것만 짐작될 뿐이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보다 성진 쪽이 그것을 훨씬 잘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방식에 대해서 별 문제될 건 없을 거야.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니까. 그리고 정작 진행하면 너는 기억 못해도 네 몸이 기억하는 회로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 걸?”

“어…… 어.”

선영은 엉겁결에 대답하고선 그것이 애매한 대답처럼 들릴지도 모른다는 걸 자각하곤 제대로 번복했다.

“그럼 성진. 너만 믿을게. ……옷 벗는 것부터 네가 해줘.”

“다 벗을 필요도 없어. …그런데 준비 시간이 필요하나?”

“으응, 아니, 아니. 지금 기분 그대로 갈 수 있을 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성진은 잠시 고개를 돌려 옥상 문 쪽에 벤치가 제대로 틀어 막혀져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는 재킷을 벗어서 벤치 등받이에 걸쳐놓으며 짧게 말했다.

“그럼 시작한다.”

성진은 익숙한 동작으로 선영의 어깨를 감싸 안고 벤치 위에 눕혔다. 그리고 다른 한쪽 손을 그녀의 가슴 위에 얹고는 그녀와 입술을 맞추었다. 선영은 두 다리를 어정쩡하게 벤치 아래로 늘어뜨린 채로 누워서 성진의 키스를 받아들였고, 그 순간 마치 첫키스를 한 것처럼 움찔 하고 떨었다. 물론 성진의 입장에선 그녀가 섹스에 대한 기억이 지워진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생소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녀의 떨림을 당연한 것이라 받아들였다. 하지만 선영의 입장은 달랐다.

그녀가 떨었던 것은 처음이란 기분이 아닌 익숙한 감촉에서 전해지는 기억의 회귀를 경험하는 증거였던 것이다. 성진은 그녀가 첫 경험임을 가정하고 매우 천천히, 부드럽게 진행하고 있었으나 선영의 섹스에 대한 기억적 회귀는 엄청난 속도로 돌아오고 있었다. 성진의 부드러운 키스와 살포시 넣어서 맞물리는 혀와 가슴 주변을 더듬거리는 손길은 그가 미처 예상치 못할 속도로 선영의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중이었다.

“하읏… 하아…… 서… 성진아….”

“괜찮아. 나만 믿어…. 기분이 이상하지? 원래 그게 정상이야….”

“아니, 잠깐……. 그게… 아니라…… 으읏….”

물론 성진의 말대로 기분이 이상해지지만 싫지 않은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선영은 그 기분이 다른 면으로도 이레귤러적이란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섹스에 대한 지식이 없다고는 해도 선영은 그것을 구분할 수는 있었다. 그것은… 자신만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현재의 기분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자신의 의지라기보다는 그 누군가가 조종하는 대로 신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알 수 없는 기분.

선영은 갑자기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행위가 진행될수록 몸은 달아오르고 있었지만 그것은 자신의 의지보다 ‘그녀’의 의지가 훨씬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본래의 선영’일 것이었다. 그녀가 내면 속에서 깨어나 성진의 행위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었다. 선영은 순간적으로 이 행위를 그만두고 싶어졌다.

하지만 곧 그 생각은 다른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이제는 자신의 입 속을 구석구석 훑어내기 시작한 성진의 혀를 느끼면서 선영은 갈 데까지 가보자는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본래의 자신’을 끄집어내기 위한 목적 아니었던가? 선영은 점차적으로 자신의 몸을 자기가 제어할 수 없음을 느껴가면서 내면 속의 ‘그녀’가 주도권을 잡아 자신의 신체를 움직이는 대로 놔두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녀’의 의지대로 흘러가고, 행동하고, 느끼기로 했다.

성진은 순간적으로 그녀가 뻣뻣해졌다가 스르륵 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행위에 호응하는 것을 깨닫고는 의아해졌다. 하지만 그런 조그만 변화 때문에 이 현상을 돌이켜보아야 한다는 자각심은 들지 않았다. 현재로선 ‘본래의 선영’을 끄집어낼 이만한 기회도 없을 것이기에 그는 그대로 행위를 진행해나갔다.

성진의 목표와 선영의 수용이 맞물리자 둘의 관계는 급속도로 뜨거워졌다. 둘은 마치 굉장히 오랜만에 만난 인연처럼 정신 없이 서로를 끌어안고 키스하고 몸을 비벼대었다. 선영의 재킷이 걸쳤다고 표현하기도 애매할 정도로 흐트러졌고 줄무늬 티셔츠 밑으로 성진의 손이 파고들어가 그녀의 젖가슴을 주물렀다. 선영의 팔은 성진의 목을 휘감았고 다른 쪽 손으로는 성진의 바지 윗부분을 갈망하듯 더듬어댔다.

시간이 흐를수록 놀라는 쪽은 선영이 아닌 성진 쪽이었다. 비단 급속도로 대담하게 갈구해오는 그녀의 반응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것은… 언젠가 느껴봤던 ‘그녀’의 낯익은 몸짓 같은 것이었다. 두고두고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던 본래의 그녀와의 첫 섹스…. 성진은 ‘그녀’가 돌아오고 있음을 어렴풋하게 자각하고는 눈앞의 선영을 더욱 더 끌어안았다.

“서… 선영아. 왔어, 왔어…!”

“어…… 어, 아흣…….”

“네가 왔어. 네가 돌아오고 있다고…!”

“그… 그래? 그럼 더… 더 해줘. 좀 더, 좀 더…….”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는 이해하지 못할 그들만이 알고 있는 대화를 환희에 찬 듯 소리치고 있었다. 성진은 그녀의 청치마를 들추고는 그녀의 팬티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미 그녀의 보지는 흥건하게 젖어있었고 성진은 그 사실에 - 역시 평범한 사람이 생각하기로는 조금 다른 의미로 - 굉장히 기뻐하고는 그녀의 보지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선영의 몸이 짜릿한 감각을 받아 어그러지는 것처럼 몸을 조금씩 꼬면서 움찔거렸다.

“하앗…… 아흑…!”

성진은 그녀의 보지 속에 넣은 손가락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그녀의 보지가 경직되었다 부풀어올랐다 하면서 그의 손가락을 꽉꽉 조이고 있었다. 동시에 흥건하게 보짓물을 한바탕 발산해내었다. 선영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면서 풀어진 눈으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떨리는 입술과 무언가를 갈망하는 눈동자를 마주보게 된 성진은 자신도 덩달아서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함을 느꼈다. 그녀가 이렇게 매력적이었나? 내가 아는 선영이… 아니, 예전의 선영이 맞다면…….

성진은 몸을 약간 일으키곤 그녀의 팬티를 조심스럽게 벗겨내었다. 완전히 벗겨진 그녀의 팬티는 무릎 부분까지 올라온 그녀의 검은 양말 발목 부분에 걸쳐졌다. 성진은 이어서 자신의 바지 허리띠도 풀어 젖혔다. 그리고는 팬티까지 아래로 내린 후 꼿꼿하게 솟아오른 자지를 바깥으로 꺼내었다. 느지막하게 기울기 시작한 오후 햇살을 받아 자지가 툭 부풀어올랐고, 선영은 그런 그의 자지를 보자마자 두 손을 가슴 위에 포개고는 몸을 움츠렸다. 무서운 무언가를 본 듯한 소녀 같은 반응이었지만 그녀의 하체는 반대로 그의 자지를 갈구하는 것처럼 양쪽으로 벌리어졌다.

벤치 위에 누워있었기 때문에 한쪽 다리는 등받이 위에 걸쳐졌고 다른 한 쪽은 옥상 바닥에 내려앉아 지탱하고 있는 꽤나 특이한 자세였다. 하지만 선영은 별로 힘들어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빨리 넣어주라고 갈망하듯 온 정신을 성진의 자지 쪽으로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성진도 사실 그렇게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귀두 끝부분을 선영의 보지 쪽에다가 갖다 댔고, 선영의 몸은 다시금 움찔하며 가슴폭에 모아쥔 두 손을 더욱 꼬옥 움츠렸다.

그리곤 약간 느린 듯하면서도 단숨에 쑤셔넣어지는 성진의 자지.

쑤우우우욱- 푸욱.

“흣……!”

“으읏……!”

선영은 자신의 안쪽으로 무언가가 꽉 들어차오는 느낌과 함께 더욱 강해지는 내면의 ‘그녀’ 느낌을 동시에 경험하며 신음을 삼켰다. 그리고 성진은 성진대로 잊고 있었던 그 무언가를 만나듯 감싸오는 그녀의 보지를 자지로 느끼고는 역시 신음소리를 내었다. 둘은 그렇게 성기를 맞물린 채로 서로간의 특이한 상황과 감각에 익숙해지기 위해 한참동안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처음 입을 연 것은 선영 쪽이었다. 그녀는 익숙함과 첫경험의 경계 사이에서 더듬거리듯, 하지만 또박또박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의 나지막함으로 말했다.

“이게… 이게 그런 느낌이구나…….”

“…괜찮아?”

성진은 순간적으로 ‘네 안의 본래의 선영’이 어떤 것 같냐고 질문할 뻔하다가 너무 자기 중심적이란 기분이 들어 평범하게 물어보었다. 선영은 자신의 보지 쪽을 내려다보던 눈을 들어올려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잠시 아무 말이 없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그럼 계속한다.”

“그래….”

하지만 성진은 자신이 했던 말과는 반대로 움직이지 않고 그녀를 바라만 보았다. 선영은 다시 몸을 살짝 움츠렸다가 의아한 눈으로 성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서로를 마주본 채 시간이 정지한 듯 한동안의 경직된 상태. 궁금증을 참지 못한 선영이 결국 다시금 입을 열었다.

“왜… 그래?”

“어? 어…… 아… 아냐. 아무것도….”

선영은 더욱 궁금하다는 얼굴로 성진을 똑바로 쳐다보았지만 성진은 이미 그녀에게서 시선을 회피한 뒤였다. 성진은 약간 땀에 젖은 자신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훑어내면서 어금니를 슬며시 깨물었다.

‘뭘 망설이는 거야, 김성진. 그녀의 기억을 돌려주려고 하는 것뿐이잖아. 현재의 그녀는 아무런 존재도 아닌 불완전한 대리자야. 본래의 기억이 돌아오면 사라질 수밖에 없는 녀석이라고. 아니, 아니지… 그녀가 곧 예전의 그녀다. 그러니까 사라지는 게 아닌 합쳐지는 존재가 되는 거라고.’

그러나 다시 그녀와 눈을 마주친 성진은 쉽사리 한번 든 생각을 떨치지 못함을 깨달아야 했다.

‘불완전한 가설에 존재성이란 것을 단정지을 정도로 내가 그렇게 헤펐었나?’

“뭐하는 거야, 김성진! 또 복잡한 생각이 네 머릿속을 헤집는 건 아니겠지?”

선영은 갑자기 그렇게 외쳤고, 곧 그런 자신에게 소스라치듯 놀랐다. 뭐지?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그렇게 외칠 수 있다니… 뭐가 그렇게 초조했던 거지? 게다가 지금은 순간적이지만 자신의 의지가 100% 발휘됨을 여실히 자각한 선영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외치고도 자신이 놀라고 멍청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성진의 모습에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녀는 곧 가슴 위에 모은 두 손의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성진과 현재의 선영은 거의 완벽하다싶을 정도로 서로의 생각을 읽어나갔다. 그것은 극적인 상황에서 발휘되는 초인적일 만큼의 이타적인 이해심과도 같았다.

선영은 시선을 옆으로 스르르 비켜나가며 높지도, 낮지도 않은 음성으로 툭하고 말했다.

“여기서 중단하면 더 힘들어질 거야. …어서 본래의 나를 만나.”

“…….”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성진은 그녀의 젖가슴을 입술로 살며시 물어 비틀면서 유두를 자극해나갔다. 선영의 달뜬 신음소리가 다시금 슬쩍 고조되기 시작했고, 성진은 그녀의 매끄러운 살결에 몸을 맡긴 채 서서히 삽입을 재차 진행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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