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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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총히 빛나는 별들이 심야로 들어서는 밤을 수놓고 있었다. 그리고 도심의 불빛들은 별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처럼 밝게 비추고 있었다. 편의점의 간판도 그런 불빛 중 하나였고, 미시적 관점에서는 고마워할 것이 뻔했기에 그 간판은 부끄러움 없이 한 매장의 존재를 확고히 하고 있었다.

편의점을 드나드는 발걸음은 밤이라는 시간에 걸맞지 않게 분주했다. 사실 현대인의 입장으로 보자면 ‘꽤나 이른 시간’의 밤이었고, 그래서 아르바이트생 채미선은 밀려오는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계산 작업을 수행해야 했다. 손님들이 줄서 있는 상황에서도 경품으로 지급할 물품을 알리거나 전자레인지에 데워야 할 먹거리 등을 빠짐없이 수행하는, 성실한 아르바이트 생의 본분을 다하는 그녀 앞에 익숙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2400원입니다… 엇?”

“여, 안녕?”

“동혁 선배!”

미선은 아는 사람에 대한 반가움을 표출하며 밝게 외쳤고, 한동혁은 손을 들어 씩 웃어보였다. 그의 옆에는 윤지가 팔짱을 끼고 즐거운 듯 미소짓고 있었다. 미선은 의외라는 눈으로 둘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런 데서도 다 보네요. 저 여기 일하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건너건너. 같은 과 후배가 어디 일하는 것 정도는 가만 있어도 귀로 흘러들어오기 마련이지.”

동혁은 자신의 인맥을 과시하듯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펴보였고, 윤지는 까르르 웃으며 그런 그의 팔을 더욱 꼬옥 끌어안았다. 미선은 동혁 뒤에 섰던 손님의 계산을 하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음…. 그다지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은 기억나지 않는데. 성진 선배랑 민혁이랑… 그리고 하은 언니 정도?”

“김성진 그 녀석한텐 안 들었어. 왜, 둘이 비밀로 하자고 했던 거야, 혹시? 뭐 비밀이랄 것도 없겠지만.”

“예. 맞아요. 하지만 굳이 제가 어디 일한다는 것을 말했다면 무슨 이유로 말했을지 궁금하잖아요?”

‘1700원입니다’라고 계산 내역을 다른 손님에게 알린 후 생긋 웃어보이는 미선. 동혁은 이미 계산이 끝난 자신의 음료수뚜껑을 그 자리에서 개봉하면서 넌지시 말했다.

“궁금하다… 라. 그런 것까지 궁금한 걸 보면 너도 어지간히 성진을 좋아하나 보군.”

“어머, 저 말고도 성진 선배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미선은 자신이 그의 여자친구(?)를 위해서 생리대를 골라주었던 지난날을 떠올리면서도 태연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 사실까진 당연히 모르겠지만 동혁에겐 꽤나 충격적인 듯했다. 그는 손에 들린 따뜻하게 데워진 꿀물을 마시다가 사레 들린 듯 잠깐 켁켁거렸다.

“허허…. 어, 어라. 너같이 수줍음 잘 타는 녀석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보통이 아닌 사이라는 얘긴데…. 정말 사귀고 있어?”

“넵! 그러니까 그쪽 언니도 울 선배 넘보지 말아주세요~”

미선은 꽤나 즐거운 표정으로 경고(?)했고 그녀에게 지칭된 윤지는 ‘너 일공 학번 아냐? 난 너랑 같은 학년이야’ 등의 지적을 함으로써 다른 방향으로 대화가 진행됐다.

“아, 그래요? 아, 아니… 그래? 헤헤헷. 미안. 나 대학 생활에는 그다지 밝지 못해서.”

“원래 그게 보편적이야. 같은 과가 아니면 선배인지 누군지도 모르지. 고등학교 때와는 정말 너무 많은 게 다르다니까. 반 년이 훨씬 지났는데 나도 사실 잘 적응이 안 돼.”

그녀들이 수다를 떨 동안 동혁은 잠시 턱을 매만지며 선영이나 혜진에 대한 얘기를 해줘야 옳은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진이 그를 가리켜 ‘유명 기업의 지사에 있는 퉁퉁하면서도 믿음직한 사장’이라고 속으로 지칭한 것은 제대로 본 것이었음이 증명되어나갔다.(동혁 본인은 의식하지 않는 증명이었지만) 그는 곧 긁어 부스럼 만들어 불똥 튈 일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고는 접어두기로 했다. 대신 다른 소식을 전했다.

“엠티(MT)요?”

“그래.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친목삼아 세라임 호수에 가기로 했어. 다음 주 주말에 말야. 그런데…….”

동혁은 반쯤 남은 꿀물 통을 매만지면서 미선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선도 사실 그 시선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예…. 전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빠져선 안 돼서…….”

“음, 역시…. 성진 녀석도 납품 일 해야 한다며 못 간다고 하고. 나도 요즘 세대이긴 하지만 단합보다는 개인적 일을 더 중시하는 풍조가 느껴진단 말야. 그래서 다른 과 사람들까지 동원해서 겨우 인원 만드는 추세라니깐.”

“헤헷. 미안해요. 동혁 오빠…….”

“이런이런, 이럴 때만 오빠냐? 뭐 알았어. 그럼 미선도 패스. 영상학과 쪽까지 끌어들여야겠군.”

그리곤 자신의 옆에 팔짱 끼고 있는 윤지를 돌아보면서 씩 웃어보였다.

“윤지는 당연히 갈 거지?”

“오빠가 가면 가야죠. 뭘 새삼스럽게 물어봐요? 우후훗.”

동혁은 남은 꿀물을 단숨에 들이키곤 편의점에 비치된 휴지통에 집어넣으면서 몸을 돌렸다. 그의 큼지막한 등과 어깨가 꽤 두터운 옷을 입고 있는 현재로서 잘 부각되는 듯하다. 동혁은 사람 좋은 미소로 손을 들어 간다는 시늉을 해보였고 윤지도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미선도 활달하게 웃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조금 숙였다.

“잘 가요. 동혁 오빠. 그리고 옆에 언니… 아니, 윤지도.”

또 한번 까르르거리는 소리가 편의점 문 사이로 들려왔고 미선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한동안 손님이 뜸했다. 미선은 현 시각을 확인하고 교대 알바생이 조금 있으면 금방 도착하겠다는 짐작을 했다. 엠티라….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던 1학기 때는 몇 번 참여했지만, 수줍음을 많이 타는 그녀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다. 그래서 이번에 못 가게 된 사실에 그다지 아쉬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성진 선배도….

“계산 해주세요.”

딴 생각에 잠겨 있는 아르바이트생의 본연을 자각시켜주기라도 하듯 미선 앞에서 한 여자 손님이 말을 건넸다. 당연히 미선 입장에서는 ‘죄송합니다’라는 사과와 함께 얼른 그녀의 계산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반적인 실수 만회로 이어지는 형상으로 흘러가진 않았다.

“혜진……?”

“음?”

둘의 시선이 허공에 약 3초간 멈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역시 먼저 상대의 이름을 부른 미선이었다.

“아, 안녕? 어째 오늘은 아는 사람이 많이 보이네. 아하하.”

그러나 바로 아는 척을 하는 미선과는 달리 혜진 입장에서는 조금 기억을 스캔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스키니한 청바지에 가벼운 블라우스, 허리까지 오는 짧은 점퍼 차림을 한 혜진은 카페라떼와 간단한 과자 등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은 상태로 가만히 미선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미선…?”

“어, 나 기억 잘 안 나니…? 예전에 프로젝트 함께 진행했었던…….”

“아, 성진 오빠랑 같이 했던 그 프로젝트. 너도 디지털 미디어 학과였구나.”

‘성진 오빠’라는 호칭에 미선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곧 그녀는 관계 없는 사람의 얘기를 들은 것처럼 곧바로 일상적인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에이~ 내가 자주 간식도 사오고 팀원들한테 돌리기도 했는데…. 아무리 다른 학과라도 바로 기억을 못하다니, 좀 섭하다.”

“후후훗. 미안, 미안. 이런 데서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해서 그래.”

“어째 기분이 좋아 보이네? 요즘 뭐 좋은 일 있어?”

“글쎄… 좋은 일이랄까.”

혜진은 계산대 뒤에 비치된 담배들을 훑어보기라도 하듯 눈을 조금 굴리더니 생긋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살짝 다가오는 설렘 같은 거랄까?”

“응? 뭐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어?”

“아하핫. 너도 참…. 그냥 그래.”

“어쩐지 요즘 이뻐보이더니, 너.”

혜진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는 가슴 밑에 팔짱을 끼고서 재미있는 친구라도 보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요즘은 무슨… 거의 만나지도 못한 것 같은데. 아무튼 빈말이라도 칭찬 고마워.”

“아냐아냐, 그냥 하는 말이 아냐. 그리고 난 솔직히 네가 좀 부러워.”

혜진은 여전히 미소 띤 채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고, 미선은 잠깐 주변 손님이 있는지를 둘러보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쩐지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 살짝 홍조를 띤 채.

“그리 많이 보았던 건 아니지만 넌 늘 매사에 적극적이었잖아. 프로젝트 할 때도 남들보다 먼저 나서서 의견 발표를 하거나, 경우에 따라선 남들도 이끌며. 게다가 상황 파악이랄까. 그런 게 뛰어난 것 같아. 너무 나대지 않는 듯하면서도 자신의 좋아하는 것엔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느낌이랄까. 그런… 타입은 분명 이상형을 만나도 쟁취한다거나 그런 것에 탁월하겠지?”

갑자기 장소와 개연성에 걸맞지 않을 법한 꽤나 디테일한 평을 들은 혜진은 미선을 바라보는 시각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녀는 당황함을 내비치지 않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을 유지하면서, 팔짱 꼈던 한 손을 올려 턱을 받치는 시늉을 했다.

그렇게 잠깐 생각하던 혜진은 곧 가볍게 툭 내뱉었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지도 못한 반문이었다.

“왜, 어디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는데 속으로만 앓고 있는 거야?”

말의 분량은 엄청난 차이지만 몇 배로 되돌려받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미선. 너무도 정확히 짚은 혜진의 말에 그녀는 말을 더듬으며 더욱 더 얼굴을 붉힐 뿐이었다.

“아… 저,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다~ 들켰어요. 이 언니한테♡ 후훗…. 뭐, 내 생각은 그래. 어렵게 곱씹을 필요도 굳이 바꾸려 할 필요도 없어.”

그녀는 한 손으로 자신이 산 커피와 조그만 과자들을 집어 들었다.

“우린 명색이 대학생이잖아? 남의 평이나 세간에서 지적하는 단점을 굳이 보완하려 끙끙댈 필요가 있을까? 너는 너만의 매력이 있고 그것을 자신의 스타일로 되살려서 그 누군가를 끌어들여 봐. 흐음, 포니테일 머리가 잘 어울리는 것을 보니 귀여운 스타일도 좋겠네.”

“그… 그래?”

“아하핫. 누군진 몰라도 마음이 전해지면 그 남자도 행복해하겠다. 좀 더 스스로에게 자신을 가져. 그럼~”

시원스럽게 몸을 돌려 또각또각 편의점 문을 나서는 혜진. 그녀의 작지 않은 키와 볼륨감 있는 여성스런 굴곡이 블라우스와 스키니 청바지, 그리고 하이힐을 통해 멋진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미선은 그녀가 한 말에 수긍하면서도 위로가 되지는 않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혜진은 어느 모로 보나 뭇 남성들의 이상형이 될법한 최고의 매력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어진 편의점 안에서 미선은 살짝 한숨을 폭하고 쉬었다.

“쟤들은 왜 우리를 힐끔거리며 바라보지?”

성진의 등 뒤에서 그의 옷자락을 붙잡기라도 하듯 손을 뻗은 채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선영. 그들은 지금 화창한 날씨의 대학 캠퍼스 한 길가를 통과하는 중이었다. 깁스를 풀었으나 아직 제대로 낫지 않은 선영의 다리 때문에 성진은 평소의 3배 가까이 느린 걸음걸이로 이동하고 있었고, 사실 그건 다른 이유에서도 기인했다. 선영이 주변을 둘러보며 기억을 되찾을 시간을 벌어주는 것.

하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선영의 말마따나 주변에 거니는 학생들의 시선이었다. 그 시선을 눈치챈 후로 성진은 두 가지 이유에 어렵잖게 착안했지만 선영은 여전히 모르는 듯하다. 그녀는 자꾸 설명을 요구하는 손짓으로 성진의 등을 쿡쿡 찔렀다. 안 그래도 신경이 예민해져있던 성진은 제대로 주변 풍경을 둘러보며 기억을 되살릴 실마리나 잡아보라고 윽박지르고 싶었지만, 결국 한숨을 쉬는 기분으로 자제했다. 그리고는 그 두 가지 이유 중 하나 - 절뚝거리는 걸음걸이 때문이라는 것을 제외한 - 를 내었다.

“현재의 너는 잘 자각을 못하는 것 같지만, 네 미모는 예전부터 캠퍼스에서 은근히 소문이 나돌 정도로 예뻤어. 그리고 지금도 그것이 발휘되고 있는 중이고.”

“내가 그렇게 이뻤어?”

“그래. 그런 평범한 이유로 흘끔거리는 거니까 신경 꺼도 돼.”

하지만 평범한 이유란 것은 상대적인 것이고, 그녀에게는 그것이 생각만큼 평범하게 작용하지 않는 것 같다. 그녀는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더니 TV모델마냥 똑바로 서서 고혹적인 자태로 걷는 걸 흉내내기 시작했다. 실제로 선영은 현재 꽤나 발랄함을 강조하는 가벼운 줄무늬 티셔츠와 하늘색의 재킷, 그리고 청치마에 무릎까지 오는 검은 양말과 구두를 신고 있는 상태였고 덕분에 주변 남성들의 시선을 더욱 더 사게 되었다.(더불어 그들 중에는 얼굴도 붉히고 있었다.) 성진은 당황하여 얼른 그녀의 팔짱을 끼곤 자신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낮게 외치듯 말했다.

“뭐하는 거야, 멍청아! 왜 더 튀어보이려 해?”

하지만 선영은 전혀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를 살짝 흘겨보았다.

“왜 이래? 모처럼 학교로 돌아와서 예전의 내 상상을 하며 기분 좀 내는 건데. 그런 것도 못해?”

“그 다리로 잘도 그런 포즈를 취하는군. 어쨌거나 지금은 더 중요한 다른 문제가 있잖아! 뭐 기억나는 것 없어?”

“흐응, 변함없이 딱딱하긴. 어째서 이런 남자가 내 애인이었을까.”

성진은 본래의 목적에 관한 대답을 얻기를 포기하곤 두 손을 재킷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그녀 앞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두 눈을 마주보는 상태로 섰다. 선영은 그런 그의 반응에 눈을 조금 크게 뜨곤 따라서 멈춰섰다.

“야, 은선영. 내가 말야. 괜히 네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 게 아냐.”

“무슨 소리야?”

“네 미모를 바라보는 저 시선들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아?”

“예쁜 여자를 바라보는 데 딱히 이유가 있을까?”

성진은 그 말도 맞는 얘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좀 더 그녀의 상태를 자각시켜주기 위해 고개를 내저었다.

“넌 지금 TV에서 출연하는 연예인들 같은 입장이 아닌, 상대와 직접 교감하는 데서 즐거움을 얻을 가능성이 높은 평범한 학생 입장이야.”

“어려운 말로 돌려 설명하지 말고 납득하기 쉽게 설명해. 넌 가끔 나보다 더 이상해보이는 것 알지?”

성진은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쏘아주고 싶은 걸 간신히 삼켰다. 그는 주변으로부터 시선을 더 끌어모으지 않을 법한 표정을 유지하는 데 성공하곤 신음같이 말했다. 어쩐지 연기를 하는 듯한 동작으로.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XXX라고 합니다. 지나가던 길에 숙녀분이 너무 아름다워서 말이죠. 제 손에 들고 있는 장미 한 송이로는 도무지 이 마음을 일부마저 표현할 수 없다는 현실에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저와 사귀어주시겠습니까? …라고 하면 너는 어쩔래?”

“지금 내 앞의 김성진 같은 남자보단 백 배 재밌겠다고 생각하며 받아들이겠어.”

“내가 네 전 애인이라고 단정짓는 건 둘째 치자. 하루이틀도 아니고 세간에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피곤한 상황이니까. 너 애인이란 존재가 뭐라고 생각해?”

선영은 간단한 질문을 받은 아이처럼 눈동자를 한번 또르륵 굴리더니 바로 대답했다.

“나만을 바라보고 나만을 생각해주고 날 위해서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는 남자. 그리고 그건 내 쪽에서도 적용되는.”

“그래, 그 ‘모든 것’은 뭘 의미할까?”

“뻔하잖아? 같이 식사하고 같이 놀고 같이 자고 늘 함께 있는, 서로에게 수호신 같은 존재. 와, 이거 말해놓고 보니까 나도 어쩐지 애인이란 걸 한번 갖고 싶어지는데?”

성진은 그녀의 말 중에서 ‘같이 잔다’는 부분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남녀가 같이 자면서 뭘 하는지는 짐작이 가나? 이젠 좀 알고는 있을 건가?”

“당연히 알지.”

선영은 무시하지 말라는 투로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게다가 그것도 이미 다 생각이 있다는 자신만만함을 내비치며 말했다.

“그 섹스인가 뭔가를 한다며? 그런데 난 그게 뭔지도 모르고 기분나쁘기만 할 테니까….”

그리곤 더없이 맑은 얼굴로 생긋 웃는 그녀.

“나를 사랑한다면 그런 짓은 하지 말아주세요~ 라고 하면 OK.”

“……너다운 발상이군.”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했다는 것 정도는 인정하며 고개를 툭하고 떨구는 성진. 그런 그의 모습에 정곡을 찔렀다는 착각을 한 선영은 몸을 빙글 돌리며 활기차게 말했다.

“자,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나 여기 학생 식당도 가보고 싶어. 아까 보니까 메뉴가 꽤나 맘에 들던걸.”

“그 전에 가야 할 곳이 있어.”

하지만 선영은 못들은 척 반대쪽으로 걸어가려 했다. 그리고 성진은 그녀의 의지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듯 손목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가뜩이나 약한 왼쪽 다리 덕분에 그녀는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 겨우 균형을 잡고서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리는 선영.

“뭐야, 당신. 내가 이겼잖아! 말싸움에서 졌으면 승리자의 말을 따라야 하는 것 아냐?”

“따라와. 중요한 거야.”

그리고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은 채 앞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선영은 아픈 다리로 힘겹게 따라가느라 그게 뭔지를 물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성진은 걸어가는 도중 그녀에게 준비하라고 당부해두기라도 하듯 장소를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중앙도서관 뒤쪽에 있는 베이지색 별관 옥상 기억하나?”

“야, 김성진.”

“그곳으로 간다.”

“너 지금 할말 없으니까 억지 부리는 거지? 이럼 꼬박꼬박 대답했던 내 입장이 뭐가 되냐고!”

“다 틀렸어!”

갑자기 멈춰서서 고개를 돌리곤 외치듯 소리지르는 성진. 선영은 순간 움찔했다.

“다 틀렸다고. 알아…? 네가 한 대답은 근본부터 전제가 잘못 들어맞고 있었다고.”

“너… 또 왜 그래? 목소리 좀 낮춰. 주변 사람들이 보잖아.”

선영은 자신보고 주변 시선 끌지 말라고 당부했던 그가 반대로 이러니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성진은 지금 그런 걸 따질 기분이 아니었다. 성진은 그녀의 기억을 되찾아주기 위해 접점도 별로 없는 그의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리고 가장 그녀의 기억 속에 파문이 예상될 장소로 향할 찰나였다. 그녀가 죽으려 하던 마지막 기억이 있던 장소로.

“입 다물고 따라와.”

선영은 다시 한번 움찔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번복하지 않겠다는 경고어린 어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눈은 마치 뭔가에 들린 듯 알 수 없이 타오르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너…… 너…….”

그녀는 어쩐지 그가 무서워보인다는 말조차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그저 입술만 달싹이며 더듬거리는 그녀의 손목을 부여잡은 성진은 다시금 전방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 그들의 곁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이봐. 당신, 무슨 일인진 몰라도 여자분을 그렇게 겁에 질리게 할 필요는…….”

성진은 그를 쓱 돌아보았다. 그리곤 마치 너 따위가 비집고 들어설 계제가 아니라는 걸 인식시켜주기라도 하듯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꺼져.”

상대방을 날카로운 표정으로 제압하는 건 성진의 주특기였고 더군다나 지금은 진심 어린 분노가 표출되고 있었고, 그래서 다가섰던 남자는 자신이 완벽한 불청객임을 온몸으로 표현하기라도 하듯 떨어져나갔다.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작게 투덜거리는 그 남자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려버리는 성진. 그는 선영의 손목을 붙잡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선영은 이번엔 비교적 순순히 따라갔다. 그의 중압감에 눌리었던 점도 있었으나 사실 선영도 자신의 본모습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학교의 일반적인 교정은 예전에 택시를 타고 갈 때 떠올렸던 그 이상의 감흥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앙도서관을 우회해 목표한 별관으로 걸어갈 즈음에는 성진도 그녀의 다리 상태를 자각할 여유를 되찾았고, 선영도 더 이상 그의 말을 걸고 넘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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