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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오빠, 어제 급한 일이 있었다고 했지?”
성진은 잠시 혜진의 물음에 대한 답을 보류한 채 핸드폰을 열어 발신자 표시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지금 옷을 모두 챙겨 입고 침대 옆에 선 채 약간 심각한 표정으로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모두 예상했던 선영의 연락들이었기에 그는 그것들을 빠르게 훑어본 후 재킷 주머니에 도로 집어 넣으며 말했다.
“응. 그래서 먼저 가볼게. 넌 천천히 정리하고 가.”
“이제라도 괜찮겠어? 우웅…. 나 너무 염치없는 질문인가?”
성진은 아직 알몸 상태로 침대 위에 앉아 이불을 끌어안고 있는 혜진을 잠시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곧 싱긋 하고 웃어 보였다.
“괜찮아. 탓하려면 이렇게 만든 네 매력을 탓해.”
혜진은 이불을 더욱 꼭 끌어안으며 까르르 웃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눈가를 살며시 문지르며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해 오빠…. 그리고 고마워.”
성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현관문쪽으로 걸어갔다. 혜진은 뭔가 더 할말이 있는 것처럼 잠깐 안절부절했다. 당연하게도 성진은 이미 시선을 돌린 터라 눈치채지 못했고, 그가 신발을 신기 직전에야 겨우 그녀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뭔가 꼭 물어보고 싶다는 투로 입을 여는 혜진.
“그런데 오빠… 애인 있어?”
“음…?”
“저… 저기. 혹시 어제 전화와서 가봐야 한다던 것도…… 여자친구 문제야? 아,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그…….”
성진은 잠시 볼을 긁적이다가 몸을 반쯤 돌려서 벽에 기대어 섰다. 재킷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넣은 채로 그녀를 돌아본 성진은 지나가는 어투로 대답했다.
“아니, 딱히 없는데.”
“어엇? 정말? 신기하다…. 오빠 같은 사람이면 당연히 있을 거라고 은연중에 생각했는데.”
그리고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이불을 내려다보는 혜진. 성진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피식 하고 웃었다.
“갈게.”
“잠깐…. 저기…….”
성진은 벽에서 등을 떼고 돌리려던 몸을 멈춰선 채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은 단조롭기까지 했지만 혜진은 정반대로 자꾸 뭔가 결심한 말을 꺼내기 어려워하고 있었다. 죄지은 사람 마냥 우물쭈물하는 그녀를 보던 성진은 직감적으로 그녀가 꺼낼 말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있었다.
혜진은 내리깐 눈을 살짝 옆으로 하면서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나랑 사귀자, 오빠…….”
‘사귈래?’라고 물어보는 것도 아닌 ‘사귀자’였다. 성진은 그런 그녀의 말투에서 호감가는 사람에겐 반드시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강한 의지력을 느낄 수 있었다. 참 은근하면서도 화끈한 여자라고 생각하면서 성진은 다시 볼을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사실 성진도 그녀의 매력에 반해 있던 터였고 놓치고 싶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성진은 침대 쪽으로 몸을 빙글 돌려서 한걸음한걸음 차분하게 다가갔다. 혜진은 또렷하고 예쁜 눈을 들어 성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침대 옆에 선 성진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혜진아.”
“응.”
“내가 좋아?”
“응, 응.”
조금 과장되게까지 고개를 끄덕여보이는 혜진. 성진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다시금 얼굴이 붉어지려 했다. 그는 얼른 시선을 스르르 옆으로 비켜나가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런데 난 네가 짐작할 정도로 좋은 남자는 아닐지도 몰라. 나 또한 네 기대에 부흥할 자신도 없고.”
“상관 없어.”
그녀의 의지는 확연했다. 성진은 그대로 두면 ‘설령 성진 오빠가 바람둥이거나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다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등으로 더욱 자신의 의지를 확연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재차 말을 이어나갔다.(실제로 누군가를 죽일 뻔했다는 자학을 조금 각색해서 내뱉을 뻔도 했다.) 그는 이번엔 아예 고개를 들어서 커튼이 쳐져 있는 창문쪽을 바라보았다.
“더 너한테 어울리는 남자를 찾아봐. 나는 집안도 그리 부유하지 못하고….”
“오빠. 나 그런 말 정말 싫어해.”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 성진을 계속 올려다보면서 혜진은 이번엔 그의 말을 끊었다. 성진은 내키지 않으면서도 그녀를 다시 마주보았다.
“차라리 관심 가는 다른 여자 있다고 말해. 그럼 나도 더욱 노력할 것이고 그건 내 자신을 위한 일이 되기도 할 테니까.”
“…….”
길지도 짧지도 않은 잠시의 정적. 성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듯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다른 더 무언가의 답변을 않은 채,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었다.
“왠지 아쉬운 것 같은데, 사진이나 한번 찍지.”
혜진은 잠시 뭐라고 할 말을 잊어버린 채 그것을 바라보았다. 성진은 그사이에 그녀가 앉아 있는 침대 옆에 걸터앉고는 핸드폰을 쥔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리고는 다른 쪽 손으로 그녀의 반대쪽 어깨를 감싸 안아 화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녀의 옆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밀착하다시피 다가간 성진은 문득 툭하고 말했다.
“좀 웃어봐. 너무 딱딱하잖아.”
“어? 어…….”
혜진은 자신도 모르게 코스프레 했던 감각을 살려 엉겁결에 웃는 모습을 연기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구도가 잡히자 성진은 셔터를 눌렀다. 찰칵. 하지만 정작 찍혀진 화면을 보자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이상하게 나왔어?”
“아니, 그…….”
성진은 좀 난처한 듯 쓴웃음을 지으며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조바심이 나던 혜진이 보여달라고 재촉하려 했고, 그러기 직전 그는 핸드폰을 반대로 쥐어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옷을 모두 입은 성진이 특유의 날카로운 미소를 짓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옆에는 반대로 다 벗은 혜진이 침대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려있는 게 누가 봐도 이상한 상상이 들게 함이 충분했다. 성진은 이건 자기가 봐도 아니라는 식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화면을 자신 쪽으로 돌려 쥐었다.
“역시 삭제해버리는 게 낫겠지? 다음에 제대로 찍는 게….”
“어어…? 아… 아냐, 아냐. 오빠.”
“응…?”
“그냥 그대로 나한테 보내줘. 나만 보면 되지 뭐….”
성진은 물끄러미 혜진을 바라보다가 곧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럼 나가면서 보내줄게. 이건 너와 나 둘만의 비밀이다?”
혜진은 마치 새끼손가락을 걸며 다짐을 받는 아이처럼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진은 씩 웃으면서 핸드폰을 닫고선 한번 슬쩍 들어보이곤 재킷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몸을 돌려서 뒤도 안 돌아보고 신발을 신어 현관문을 나섰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는 듯이.
혜진도 딱히 잘 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에 일어나 앉은 그대로 여전히 이불을 끌어안은 채 성진이 뒤돌아 사라진 현관문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소리가 사라지고 한참을 지나서야 주섬주섬 손을 움직여 이불을 정리하는 시늉을 했다.
물론 말 그대로 ‘시늉’에 지나지 않았다. 여전히 침대 위에 앉아있던 그녀는 갑자기 이불을 더욱 끌어모아 거기에 얼굴을 파묻고는 비비적거렸다. 이불의 부드러운 감촉을 뺨으로 감식하듯 꾹꾹 눌러 천천히 비벼대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가느다랗게 새어나오는 방금까지 있던 오빠의 이름.
“김성진……♡”
그렇게 사랑에 빠진 혜진의 알몸을 커튼 사이로 힘겹게 통과한 오전 햇살 빛이 미려하게 비추어내고 있었다.
오전에 수업이 없었기에, 또 점심이라 하기에도 살짝 이른 시간이었기에 성진이 발걸음을 빨리 할 이유는 사실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에겐 개인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개인적인 문제는 그로 하여금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채우고 있었다. 그는 대학로를 나와 약 반 시간 가까이 걸어야 도착할 원룸에 20분 가량만에 도착해버렸다.
원룸 현관문을 잡은 성진은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선영이 기억상실에 걸린 상태라 해도 말싸움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기에 고민을 해봤자 헛수고란 걸 인정해야 했다. 그는 그냥 생각없이 맞붙는 게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심플한 효과를 얻을 것임을 믿으면서 현관문을 열어 젖혔다.
“다녀왔…….”
아무것도 아닌 듯 평범하게 인사를 하며 들어서던 성진은 말을 멈칫해야 했다. 물론 그건 분명 예상했던 대로 선영이 원인이었다. 그러나 그 원인의 형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다가왔다.
선영은 자고 있었다. 깁스한 팔과 다리를 주축으로 왼쪽으로 돌아누운 채 꽤나 밝아진 시간대도 감지하지 못하는 것마냥 쌕쌕거리며 잘도 잤다. 성진은 침대 가까이 걸어가서 그런 선영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흐트러진 이불을 제대로 덮어주고 창문에 커튼을 쳤다.
어젯밤 그렇게까지 오래 기다렸나 하는 의문에 성진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발신자 표시 시간대를 다시 한번 확인해본 후 애매함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닫았다. 옆에는 다 먹은 젤리 통들과 식사 그릇 등이 널려있었지만 그가 가져다놓은 소설책과 만화책은 제대로 보지 않았는지 몇 권이 처음 놓았던 그대를 고수하며 쌓여있었다.
‘도대체 뭘 하면서 기다렸던 거지?’라는 궁금증을 떠올리던 성진. 하지만 그는 곧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주요한 전제를 되새기곤 생각 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는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등을 기대어 바닥에 주저앉아 TV를 켰다. 어차피 오후에 수업이 하나 있었기에 옷을 갈아입을 필요성도 못 느끼고 적당히 시간을 떼우다가 학교에 갈 생각이었다.
TV에는 ‘카잔 전쟁’ 게임 리그를 중계하는 재방송이 펼쳐지고 있었다. 성진도 그 게임을 하지만 딱히 매니아처럼 시청하는 프로그램은 아니었기에 무심코 채널을 공중파쪽으로 돌렸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 위화감 같은 게 느껴져서 광고 채널에서 리모콘을 멈추곤 머리를 굴렸다. 이 위화감은 뭐지…?
그러고 보니…… 채널이 ‘카잔 전쟁’ 리그 채널에 고정돼있었어? 선영은 그럼 ‘카잔 전쟁’을 보다가 잔 거였나? 물론 그것 자체로는 그다지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여성이 혼자서 게임 리그를 잘 시청 안 한다는 기실이 존재했기에 성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 그렇게 볼 프로그램이 없었나보지, 혹은 호기심상 한번쯤 보다가 졸려서 잔 걸수도 있다는 일반적인 가설로 덮고는 다시 채널을 선정하는 성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쩐지 예전에도 자주 채널이 그쪽으로 고정돼있었다는 기분을 받을 즈음이었다. 침대가 살짝 들썩이는 게 그의 등으로 느껴졌다.
성진은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선영이 흐트러진 머릿결 사이로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TV의 소리는 굉장히 작게 줄여져 있었지만 켜졌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고는 있던 모양이었다. 성진은 무심코 ‘잘 잤냐?’라고 아침(?) 인사를 건넬 뻔하다가 곧 자신의 입지를 깨닫고는 비척비척 뒤로 떨어지며 일어섰다.
“……김성진.”
그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성진이 예상했던 대로 매우 격해져있었다. 그리고 그 반응을 일으키는 심정을 재차 확인시켜주기라도 하듯 선영은 갑자기 입술을 깨물더니 자신이 누워있던 베개를 집어 들었다. 맞아도 별로 안 아플 베개이지만 분노가 담긴 힘으로 던져지면 고개가 꺾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직감에 성진은 두 손을 앞으로 교차시키듯 내세웠다. 그렇게 방어자세를 취한 성진은 변명의 어조를 담아 외쳤다.
“야, 자… 잠깐. 미안해!”
배게는 날아오지 않았다. 성진은 그 다행스러움에 감사하면서도, 곧 이어지는 무서운 침묵에 별로 감사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는 기분을 받았다. 베개를 든 자세 그대로 멎어있던 선영은 이윽고 한숨을 쉬며 그것을 도로 내려놓았다. 성진은 방어자세를 풀며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선영은 이미 그런 그에게 더 분노할 가치는 느끼지 못한 듯 TV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퉁명스럽게.
“배고파. 밥 줘.”
“…….”
보통의 경우라면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라고 일축하고 프라이팬에 계란을 풀어놓으며 ‘어제는 사실 이러이러한 일이 있어서 못왔어 어쩌구’라는, 자연스럽게 변명하면서 넘겨갈 수도 있는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성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다시 설명하기 어려운 위화감이 그의 피부로 느껴지듯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이봐, 은선영.”
“왜?”
“안 화내?”
“화났어. 그러니까 얼른 밥이나 맛있게 차려줘.”
그러나 그녀가 화났다고 말하는 게 실제론 성진 자신이 예상했던 것만큼 심각한 수준이 아니었다. 성진은 그런 점에 아이러니하게 심각함을 느꼈다.
“내가 뭘 하고 왔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건 왜 안 물어봐?”
“물어봤으면 좋겠어?”
“아니, 그건 아니지만…….”
“너한텐 오히려 다행스럽잖아? 그러니까 이 이상 귀찮게 하지 말고 식사 좀 차려, 얼른.”
성진은 그녀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이런 식으로 쌀쌀맞게 구는 건가 하고 되짚어보았다. 그러나 선영과 계속 같이 있었던 그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성격과 상태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고, 그래서 일반적인 상황이 아님을 떠올려나갔다. 성진은 여전히 시선을 TV로 향하고 있는 선영을 내려다보며 인정하기 싫은 무언가가 머릿속에 엉켜져옴을 느꼈다.
그 엉킴은 성진으로 하여금 어금니를 꾹 깨물게 하였다. 그리고는 급작스러운 외침을 토해내었다.
“이봐, 은선영! 정말 궁금하지 않아? 나… 나 말야!”
“하?”
“여자랑 자고 왔다고!”
선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끄러미 성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표정은 황당하다기보다는 멍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성진은 제대로 인지시켜준다는 각오마냥 재차 또박또박 말했다.
“여자랑 자고 왔어. 다른 여자랑. 그래서 어젯밤 네가 오라는 것도 다 무시했고 말야.”
그러나 여전히 별 반응 없는 선영. 그녀는 멍청한 표정으로 성진을 바라보다가 곧 미간을 찌푸리며 반응을 하기는 했다.
“그 섹스 어쩌고 하는 짓거리를 하고 왔다는 얘기야? 너 정말…… 그런 이상한 짓거리를 하느라 어제 안 왔던 거였어? 난 잘 모르겠지만서도…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지 난 의구심이 든다?”
성진은 또다시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성(性)적 부분에 관련된 연결고리는 모조리 차단된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성진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알 수 없는, 겉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아올랐다. 왜 이런 거지? 왜 하필 이런 부분만? 예전 선영의 의지인가 혹시? 이게 도대체 왜…….
그러거나 말거나 선영은 자신의 판단으로 성진을 도리어 달래는 뉘앙스로 말했다.
“괜찮아. 다 지난 일이니까. 그리고 네가 그렇게 실토했으면 됐어. 나도 더 이상 화 안 낼 테니까 그렇게 자학할 필요는 없어.”
그러나 성진은 그녀가 제대로 TV에 집중할 여건을 만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선영의 천진하리만큼 평온한 얘기가 끝나자마자 성큼성큼 침대로 다가와서 그녀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갑작스런 난폭한 행동에 선영은 또다시 두 눈을 크게 떴다. 성진은 그런 그녀를 격앙된 눈길로 마주보면서 한마디한마디 씹어 내뱉듯 토해내었다.
“야, 은선영! 똑바로 기억해 봐!”
“이거 왜 이래? 아… 아파!”
“내 두 눈을 보고 똑바로 기억해내라고! 예전의 너를 생각해!”
“이거 놔…!”
“나에게서 주도권을 뺏아가듯 능숙하게 가지고 놀면서 다섯 번이나 사정하게 만들었던 네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라고!”
“무슨 말이야…? 나 환자야! 너나 그걸 좀 자각해!”
“그리고 나한테!”
갑자기 그녀의 멱살을 쥔 손을 부르르 떠는 성진.
“나한테……!”
그런 그의 변화를 당연하게도 눈치 못 챈 선영은 반쯤 들어져 있는 자신의 상태에만 짜증과 힘겨움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귀어달라고… 말했던…….”
그리고 말을 잇지 못하며 눈시울을 붉히는 성진. 상당한 기복이 올랐다가 흐트러지는 분위기 속에 선영은 잠깐 그런 그의 모습이 이상스레 처절해보인다는 기분을 받았다. 그래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하는 압박감에 짓눌렸다.
그렇게 얼마간의 정적. 선영이 결국 못참고 몸을 뒤틀 즈음에야 성진은 그녀를 침대 위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등을 휙 돌렸다. 선영은 알 수 없는 상황과 놀라움에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들어올렸던 그의 한쪽 팔이 이제야 무리함을 자각하는지 살며시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고, 선영은 그 모습에 재차 항의할 생각을 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성진은 그런 자신의 팔을 감싸 돌볼 생각도 안 하는 듯 그대로 몇 걸음 걸어갔다.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말하는 성진.
“방금 전 일은 잊어버려.”
“너… 우는 거야?”
“미안해. 그리고 우는 거 아냐. 잊어버려.”
선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하며 그런 성진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한참동안. 성진은 돌아선 채 한 손을 허리에 얹은 상태로 똑바로 서서 맞은편 벽과 싱크대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말이 없었고, 그래서 선영은 더 궁금해졌고, 궁금증은 물어보는 게 당연하지만 어째선지 쉽사리 물어보지 못할 것 같은 무언의 압박에 선영도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렇게, 소리가 줄여진 TV에서 흘러나오는 왁자지껄한 대화들을 한 귀로 흘려듣던 그들 중 먼저 입을 연 건 성진이었다. 그는 메마른 목소리로 지나가는 사람처럼 말을 했다.
“배 고프지? 식사 준비할게. 어제 먹다 남은 참치찌개 끓여도 되겠지?”
“……성진아.”
“내 문제야. 나와 예전의 너에 관련된 문제. 네가 뭘 잘못하거나 한 건 없어. 신경 쓰지 마….”
그의 말마따나 기억상실증에 걸려 예전 삶을 기억 못한 채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튀어나온 그녀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이해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현재의 그녀도 예전의 그녀와 마찬가지의 몸, 감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선영’이었기에 그의 말처럼 완전히 다른 일인 양 치부하기도 꺼림칙한 건 사실이었다.
문제는 그 꺼림칙함을 풀 수 있는 방법이 현재의 그녀로선 없다는 것. 그래서 그녀도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고, 둘 사이엔 달그락거리는 한쪽의 식사 준비만이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선영은 불편한 침묵을 조금이라도 덜어버리기 위해 바닥에 떨어진 리모콘을 조금 힘겹게 주워들어 TV의 소리를 올렸다. 재방송으로 보이는 드라마가 화면에 펼쳐졌지만 선영은 곧바로 그 채널을 다시 ‘카잔 전쟁’ 방영 채널로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성진이 찌개를 들고 침대 옆 탁자로 걸어왔다.
계란 프라이와 찌개, 나물, 김치, 김, 볶음멸치 등 나름대로 아침(?) 식사 마련이 끝나자 선영은 침대 밑으로 내려와서 - 이젠 혼자서도 침대 위를 내려가거나 올라갈 정도의 회복은 됐다 - 성진과 함께 식사를 했다. 성진은 밥을 먹으면서도 ‘카잔 전쟁’에 시선이 돌아가 있는 선영을 보면서 또다시 깊은 한숨을 토하고 싶은 걸 참았다. 성(性)과 관련된 지식이 지워졌으면 연애도 알기 어렵다. 그리고 연애를 모르니 드라마 같은 게 재미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선영은 보다 확고한 목표가 정해져 있는 ‘카잔 전쟁’ 같은 게임을 즐겨보는 것이다. 성진은 탁한 눈동자로 선영의 시선을 따라 TV를 보면서 한가지 희망에 대한 불안감도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과연 그녀를 데리고 학교로 데려가면 제대로 된 기억을 모두 되찾을 수 있을까? 예전 선영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리고…… 나를 기억할 수 있을까. 그런 점들은 웬만한 일에는 굴하지 않고 돌파할 것만 같던 그의 날카로움조차 무뎌진 것처럼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곧 들어가야 할 오후 수업에 대한 시간적 압박을 계산하는 게 조금이라도 심적 부담을 덜 것이라 여겨지는 성진. 그는 어렵게 생각을 닫고는 밥공기에 수저를 조금 빨리 놀렸다. 그리고는 한가지 사실만 확인할 양으로 벽에 걸린 달력을 돌아보며 툭 하고 물었다.
“깁스 언제 풀기로 했지?”
선영은 수저의 밥 위에 찌개 김치와 김을 얹고는 입에 넣으면서 간단히 대답했다. 물론 시선은 TV의 ‘카잔 전쟁’에 고정돼있는 채로.
“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