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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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배!”

소주잔에 담긴 술들이 즐거운 요동을 치며 그들의 건배에 호응했다. 여섯 개의 손들은 다시 주인의 소유임을 확인시켜주듯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고, 그렇게 각자 반쯤, 혹은 그보다 덜, 혹은 전부 비우고는 제각기 젓가락을 놀려가며 안주를 탐하였다. 꽤나 큰 원형 테이블 중앙에 놓인 고기들이 연기를 내뿜으며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는 중이었다.

잔을 한번에 전부 비운 동혁은 아직 익지도 않은 고기를 성급히 입가로 가져갔다가 곧 도로 불판 위에 올려놓았다. 옆에 앉은 남자 후배가 조급해하지 말라며 킥킥 웃었고, 동혁은 뻘쭘해진 자신을 다스리기라도 하듯 맞은편의 세 여자들에게 자신의 양쪽에 앉은 동기와 후배를 소개시켰다.

“인사해. 이쪽은 내 동일 학번이자 같은 과인 김성진, 그리고 이쪽은 내 후배이자 너희와 같은 학번 건축공학과 이규한.”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규한은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고, 성진은 그의 입지상 고개만 까딱했다. 그리고는 야채 몇 개를 입안에 오물거리며 동혁이 그녀들을 소개하는 걸 지켜보았다.

“이쪽은 영상미술학과인 강혜진, 실용음악학과 임지연, 피부미용학과 나윤지.”

“우와, 동혁 선배. 막힘 없이 그냥 술술이시네. 퍼펙트!”

지연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대단하다는 제스처를 취해보였고, 동혁은 이정도야 껌이라는 듯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옆에 앉은 규한이 그런 동혁의 잔에 소주를 채워주었다. 성진은 1/3쯤 남은 잔을 앞에 둔 채 편안한 미소를 일관하며 세 명의 여자를 둘러보았다. 모두 만만찮은 미모의 소유자들인데… 게다가 노리고 왔는진 모르겠지만 옷매무새의 스타일이 참으로 살아있는 듯하다고 성진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탐색전(?)은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다. 어쩐지 좀 낯익은 듯한 여자가 성진에게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오빠, 저 알죠?”

주변 시선들이 성진과 혜진에게로 집중되었고, 성진은 살짝 당황하면서도 곧 능숙하게 젓가락으로 불판 위 고기들을 뒤집어나가며 대답했다.

“물론, 예전에 우리 학과랑 합작 프로젝트를 할 때였지? 너희가 맡은 역할은 홍보 영상을 디자인하는 것이었잖아.”

“동혁 선배한테서 들었어요. 오늘 성진 오빠 온다고 해서 얼마나 기대했는데요.”

노골적으로 관심 두고 있었다는 혜진의 표현에 성진은 난처한 듯 동혁을 바라보았고, 그도 좀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동혁은 그냥 씩 웃으며 알아서 잘해보라는 눈짓을 줬다. 성진은 벌써부터 그의 곁으로 의자를 이동해서 앉는 혜진의 동작을 바라보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글쎄…. 나는 벌써부터 선배란 호칭 생략하고 오빠라고 불릴 만큼 친근했던 기억은 없는데.”

“그 때 프로젝트, 오빠가 없었으면 끝까지 다 수행하지도 못했을 거예요. 얼마나 대단하셨다구요!”

그리고는 슬그머니 팔짱을 끼는 혜진. 성진은 그만 웃어넘기고 말았다. 약간 주의를 주려고 내뱉었던 말을 깡그리 무시한 혜진의 행동에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뿐만은 아니었다. 내가 그 프로젝트에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가? 그가 했던 거라곤 잘 다루지도 못하는 3D MAX를 붙잡고 프로젝트에 필요한 렌더링을 몇 개 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그것 또한 엄연히 프로젝트의 한 부분이기에 수행되지 않았으면 결과야 나올 수 없었겠지만, 수많은 인원들 중 그렇게까지 특별히 볼 것은 아니라는 게 요점이었다.

하지만 성진은 이 자리가 동혁의 말마따나 친목(?)도모를 위한 자리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혜진과 함께 자연스럽게 녹아 들기로 마음먹고는 술잔을 들어 그녀에게 건배하는 자세를 취해 보였다. 혜진은 얼굴을 살짝 붉히고는 자신의 잔을 들어 그의 잔과 맞부딪쳤다. 잔에 남아있던 술을 단숨에 들이킨 성진은 어느 정도 익기 시작한 고기를 하나 입 안에 넣었고, 그녀가 따라주는 잔을 받아들었다.

“학교 생활은 이제 완전히 익숙해졌지? 하기사 지금은 2학기도 꽤 지난 상태니.”

“저는 1학기 때의 이정도 지난 시점에 벌써 익숙해졌다구요.”

“프로젝트 진행하면서 잡담할 때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었나? 컬쳐쇼크 느껴진다고.”

“어머, 그거 기억하고 있어요, 성진 오빠? 후후훗. 그거야 너무 튀어보이지 않게 연기했던 거죠. 적응이 빠르다는 걸 알면 들이대는 선배들이 꽤 있을 것 같은 분위기라서.”

성진은 피식 하고 웃었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하는 말이 자신의 성격을 과시하는 측면에서 한 말은 아니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혜진은 동기 여대생들 중에서도 놀라운 미모에 속했으며 호감을 표현할 때는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검은 셔츠와 얇은 재킷, 치마는 매우 짧았고 스타킹 신은 보기 좋게 뻗어진 다리 끝에는 굽이 높은 슈즈를 신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검은색의 통일된 복장이었지만 그녀의 미모 때문인지 옷을 코디하는 능력이 뛰어나서인지 - 아마도 둘 다일 것이라도 성진은 짐작했다 - 상당히 세련돼 보였다.

성진은 혜진의 팔에서 살며시 팔짱을 풀곤 대신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혜진은 곧바로 달라붙듯 밀착하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은은한 화장품 향기가 성진의 코끝을 감돌았고, 그녀의 등을 살짝 덮은 긴머리와 한쪽으로 스타일리시하게 빗어 넘긴 머리칼이 매우 맘에 들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칼 한쪽에 달려 있는 키티 머리핀은 그녀의 애교를 강조함과 동시에 친숙한 이미지도 부각시켰다. 성진은 ‘섹시하고 귀엽다’란 표현이 이럴 때 딱 들어맞는 게 아닌가 하는 기분을 받았다.

동혁이 분위기를 돋구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야, 야. 진도 너무 빠르면 못쓴다.”

“졸지라고 표현해야 할 상황이야, 임마.”

“성진 오빠, 놀라신 거예요? 이잉, 죄송해요.”

“사과와는 반대로 이렇게 자꾸 들이밀면 남자들은 난처해진다고.”

혜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곤 성진을 올려다보았다. 물론 성진은 그녀를 질책할 의도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예외도 존재해. 내가 종종 남들에게 존재의 의미를 부각시킬 때 하는 말처럼.”

“그게 뭔데요?”

“나는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다는 것.”

혜진은 킥 웃었다. 동시에 조금 섭섭하다는 눈빛을 보내는 그녀.

“그래서 용서하신다구요? 그것뿐?”

성진은 자신의 입술 밑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짐짓 고민하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곧 히죽 웃으며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물론 이쁜 여자가 들이민다면 그것도 얘기가 달라지지.”

혜진은 까르륵 웃어버렸고, 성진은 다같이 건배나 하자며 잔을 들어올렸다. 다시금 잔이 한바탕 맞부딪히며 지글거리는 고기의 반주소리에 보조를 맞추었다. 어느 새 동혁도 윤지란 여자를 옆에 앉혀두고 있었고, 규한과 지연은 아직 서먹한지 간단한 잡담을 나누는 것에 그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졸지에 제일 빠른 진전을 보여버린 성진은 자신에게 약간의 조소를 보내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은 손을 들어올렸다. 마치 오랜 연인처럼 그녀의 머리칼을 가볍게 매만지는 성진. 혜진은 그 손길이 싫지 않은지 자신의 잔을 들어올려 그를 마주보며 말했다.

“오빠, 러브샷.”

성진은 다른 쪽 팔을 들어올려 그녀의 팔과 교차했다. 그 간격을 만들어내는 시간의 선율 속에 밤은 깊어져 갔고, 가게의 천장에 달린 전등갓을 통과하는 백열등 불빛은 쌓아 올려가는 분위기를 포용하는 관용을 선보이고 있었다.

은은한 갈색 분위기가 아늑하게 번져나가는 호프집. 명목상 친목 도모의 2차 장소를 이곳으로 선택해서 온 동혁 일행은 맥주잔을 들어올리며 그 아늑함 속에 안주하고 있었다. 동혁은 식탁 맞은편에 앉아있는 혜진을 바라보면서 약간 풀린 눈으로, 하지만 아직은 건재함을 과시하며 그녀에게 얘기를 건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주로 성진에 관한 것이었다.

“녀석은 뭐랄까…. 평소엔 그저 평범한 인간을 연기하고 있다가도 자신이 뭔가 관심가질 만한 일이 생기거나 흥미가 동하면… 급작스럽게 돌변하지. 내가 작년… 그러니까 1학년 때 녀석을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좀 날카로운? 모난 부분만 약간 있는 친구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녀석은 평소에는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학생 그 자체야. 하지만 꼭 뭔가 녀석의 마음에 들어앉으면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는 성격을 보인다니까.”

“그거 칭찬이에요, 뭐에요? 동혁 오빠.”

옆에 한쪽 팔을 끌어안고 있던 윤지가 킥 웃으면서 물었다. 동혁은 자신이 남을 험담할 녀석처럼 보이냐는 뜻으로 손을 내젓고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윤지를 돌아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한 것뿐이야. 뭐 어때? 최소한 험담은 아닌 것 같은데?”

“고집이 있다는 거네요.”

맞은편에 앉아있는 혜진이 미소 띤 얼굴로 한쪽 손을 턱에 괸 채 동혁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동혁은 뭐 쉽게 말하면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동혁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게, 혜진이 그냥 건성으로 그렇게 한마디 툭 건넨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성진의 평가(?)에 관한 동혁의 얘기를 하나도 남김없이 수렴하고 있었던 것이다.

혜진의 초롱초롱하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더욱 빛을 발했다. 그것은 어느 정도 들어간 술기운도 감춰주지 못할 것이었다. 꼬아 앉은 그녀의 검은 스타킹을 신은 다리가 흔들거렸다.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때부터 성진의 첫인상에 은근한 연모하던 감정이 이번 재회로 부풀어오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동혁의 초대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야, 너희들은 언제까지 시답잖은 얘기만 할 거야?”

규한과 지연 쪽을 돌아보며 툭 내던지는 동혁. 그의 말에 규한이 움츠러든 자세 그대로 변명처럼 대답했다.

“하지만 선배… 저희는 오늘 처음 만났고, 아직 서로를 잘 알지 못해서…….”

“평생을 함께 살아도 이해하기 어려운 게 타인에 대한 점이야. 탐색할 거 다 하고, 그러다 보면 언제 이성친구 한번 사귀어보겠어? 그냥 들이대!”

회사 사장이라도 된 것마냥 몸을 쭉 펴서 앉은 동혁은 혀를 차면서 큰소리를 쳤다. 윤지도 까르륵 웃으면서 그들을 돌아보았고, 지연이 그제서야 쑥스럽게 규한 곁으로 다가가 살포시 옆에 앉았다. 규한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동혁이 ‘더, 더!’라며 그들을 재촉했다. 그런 동혁의 시선 따라 피식 하고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는 혜진. 하지만 그녀의 눈은 곧 호프집 입구 쪽으로 돌려졌다.

여전히 자리로 돌아올 생각이 없는 듯, 그쪽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혜진은 한숨을 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의 맥주잔을 돌아보았을 뿐. 그리고 미소 띤 얼굴 그대로 한가로운 동작을 연출하는 것마냥 손가락을 손잡이에 갖다 댔다 말았다 반복. 동혁이 오히려 조바심이 난 듯 입구 쪽을 이리저리 바라보는 시늉을 하더니 푸념처럼 말했다.

“이 녀석, 전화만 얼른 받고 온다더니 뭘 하고 있는 거지?”

“재촉하지 마세요. 금방 오겠죠.”

핸드폰을 꺼내 드는 동혁을 제지하며 혜진은 짐짓 밝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동혁은 그런 혜진을 쳐다보다가 곧 입을 다물고는 주머니에 집어넣곤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물론 혜진이 그다지 조급해하지 않는 동작을 보이는 건 어디까지나 타인의 시선 속에서의 자기 규제였을 뿐이었다. 그녀의 꼬아 앉은 두 다리는 서로를 타이르듯 비비며 끊임없이 옴질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혜진의 애를 태우고 있는 성진은, 그의 의도를 드러낼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는 한 전화에 쩔쩔매고 있었다. 지하로 향하여져 있는 호프집 계단 통로에서의 그는 핸드폰을 붙잡은 채 그 누군가를 계속해서 타이르려는 노력이 역력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은 돌아갈 수가 없다니까.”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데?”

선영의 따가운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성진은 핸드폰을 조금 귀에서 떨어뜨려놓고 싶은 마음과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의 딜레마에서 갈등하였다. 그는 속타는 마음을 굳이 표출하기로 했다.

“중요한 일이라고! 그래서 내가 일부러 저녁식사까지 옆에 차려주고 나왔잖아? 젤리도 잔뜩 사다 놓고! 만화책 소설책 빌려와 주고 지겨우면 TV켜서 보고 싶은 거 보라고 했잖아. 여기서 뭘 더 바라는 건데?”

“벌써 밤이 꽤 깊었어. 아까도 말했잖아? 혼자 자기 무섭다고.”

“어린애냐? 게다가 내가 가봤자 니 옆에 붙어서 잘 것도 아닌데, 그게 그렇게 중요해?”

“그러는 넌 지금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

성진은 마치 바로 앞에 그녀를 두고 말하는 것처럼 고개를 떨어뜨리며 한숨을 토해내었다. 그런 그의 한숨소리를 말문이 막힌 걸로 판단한 선영은 재차 따지듯 물었다.

“누구 죽기라도 했어?”

“아니, 그 참… 그런 게 아니고…….”

“그럼 뭐, 복권이라도 당첨된 거야?”

“나도 희망사항이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뭔데?”

성진은 잠시 그녀가 히스테리를 부리는 게 아닐까 추측해보곤 미간을 엄지와 검지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체념하듯 툭하고 내뱉었다.

“친목 회식 자리하고 있어, 지금.”

이번엔 선영 쪽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성진은 그녀가 어이가 없어서 쉰 한숨임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다시금 머릿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당장 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간단하면서도 단호하게 명령하는 선영. 솔직하게 내뱉는 게 쉽게 납득시킬 수는 있지만, 그 납득 방향을 유리하게 이끄는 데에는 상당히 불리하다는 사실에 서글픔을 느끼며 성진은 애원하듯 말했다.

“제발 좀 봐주라고. 벌써 열흘 가까이 너 돌보느라 기계적으로 집과 학교만 왔다갔다했단 말야. 나도 내 자유를 증명시킬 행동 하나쯤은 파고들 수 있게 기회를 줘야 하는 거 아냐?”

“당장 와. 끊는다.”

“이런 젠장할! 니가 내 애인이라도 이렇게 엮지는 않겠다!”

하지만 이미 그의 항의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먼저 끊긴 선영의 핸드폰. 성진은 현대 시대에 필수불가결한 핸드폰을 그녀에게 새로 장만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수없이 욕해댔다. 선영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입지에 대한 권한을 아주 유용하게 활용하는 여자였고, 성진은 자신이 실수했단 느낌마저 받았다. 더군다나 순수한 친목 자리가 아닌 일종의 유흥거리 술자리란 사실이 그로 하여금 재차 연락해서 강경하게 행동의 당위성을 인지시키지 못할 것임을 인정해야 했다.

맥주 광고 포스터가 붙어있는 벽에 지탱하듯 손을 뻗은 성진은 잠시 후,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팔이 부르르 떨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의미한 순간이 계속된다는 것을 겨우 자각한 그는 결국 몸을 돌려서 터덜터덜 입구 쪽으로 되돌아 걸어갔다.

한창 분위기를 돋구는 감미로운 음악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지만 성진의 가라앉은 마음을 조금도 띄워주지는 못했다. 입구 쪽을 바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앉아있던 동혁이 그를 발견하곤 밝은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 표정은 성진의 표정을 살피게 되면서 인터랙티브한 효과로 번져나갔다.

“뭐야, 무슨 전환데?”

“야, 미안하게 됐다. 급한 일이 생겨서 말야. 여기 값은 내가 내겠어.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보자.”

지금까지 쌓아 올렸던 정성스러운 탑을 한 손으로 툭 쳐서 넘어뜨리곤 미련 없이 휙 돌아서는 것처럼, 성진은 그야말로 헤어짐에 필요한 키워드만 던져놓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재킷을 집어 들곤 돌아섰다. 그의 손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들어 카드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다.

성진이 여기에 조금도 머물고 싶지 않은 것마냥 행동한 것은, 그의 본심과는 정반대였다는 것을 동혁은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너무도 급작스러운 현실은 받아들이기 힘든 법이라 그는 잠시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그 사이에 성진은 카운터로 걸어가 맥주 값을 치르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왔던 입구로 다시 휙 나갔다.

그리고 남은 침묵. 단 1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성진이 남겨놓은 행동은 그들로 하여금 어색함을 떠나 그냥 할말을 잊게 만들기에 충분한 파장이었다. ‘무슨… 일이죠?’라고 규한이 던진 형식적인 말은 그런 정적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음악 소리는 계속해서 울려 퍼졌고, 그와는 별개로 마치 시계바늘 소리라도 들릴 듯 고요한 분위기의 위력은 가공할 정도였다. 그 때, 그런 희한한 정적을 가장 먼저 탈피할 변화를 준 건 혜진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하지만 재빠르게 자신의 핸드백을 챙겨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일행을 돌아보며 가볍게 고개를 까딱했다. 그녀도 떠날 증거라는 동작임을 감지한 동혁이 나지막하게 물음을 건네었다. 물론 멍한 표정은 아직 그대로였지만.

“가려고?”

“네, 동혁 오빠. 자리 마련해주신 것 감사했어요. 재미있게들 놀다 가세요.”

“아니 뭐 우리야 상관 없지만……. 네가 좀…….”

“저요? 전 괜찮아요.”

그리곤 정말로 괜찮은 것처럼 생긋 웃어보이는 혜진.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동혁은 꺼림칙한 마음까지도 지워져 버리는 이상스런 경험을 했다.

“어, 어…….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고….”

단지 그렇게 더듬거리며 내뱉은 동혁.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왼쪽에 앉아있는 윤지를 돌아보며 ‘저럴 녀석이 아닌데…….’라는 둥 성진에 대한 변명 아닌 변명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혜진은 그 자리를 곧바로 떠나는 대신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애꿎은 맥주나 들이키려고 탁자에 손을 뻗은 동혁의 시선이 그녀와 마주했다.

다시금 의미 모를 미소를 생긋 하고 짓는 그녀.

“저 집으로 가는 게 아닌데.”

그럼…? 이라고 묻는 동혁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대로 빙글 하고 몸을 돌린 후 경쾌하기까지 한 발걸음으로 호프집 문을 나섰다. 짧은 스커트가 통통 튀듯 가볍게 살랑거린다. 그리고 동혁은 그런 혜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얼른 뒤따라가보라고 먼저 주의를 주지 못한 자신을 질책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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