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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 방이 꽤 깨끗하네.”
“먼지가 좀 보인다 싶으면 청소하는 타입이니까.”
“내가 올 것을 염두에 두었던 건 아니고?”
선영을 부축하며 방으로 들어선 성진은 대답 없이 그녀를 침대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선영은 깁스한 다리와 팔을 편한 위치로 바로잡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봐, 당신! 환자에겐 상냥하게 대해야 한다는 기본 수칙 몰라?”
“그러니까 상냥하게 대해지고 싶으면 쓸데 없는 헛소리 좀 늘어놓지 마.”
“니가 말야…. 아무리 내 전 애인이 아니라고 부정해도 모든 정황이 그렇게 돌아가는 건 어쩔 수 없어. 만일 내가 기억이 돌아왔는데 지금 이 순간들의 기억도 모두 간직하게 된다면, 넌 예전의 나란 애인한테 어떻게 고개를 들려고 그래?”
성진은 네가 모두 이렇게 만들어놓지 않았냐고 따지지는 않았다. 대신 계속해서 늘어놓는 그녀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려버리며 재킷을 벗어 벽에 걸어놓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윗옷도 벗었다.
“뭐… 뭐 하는 거야?”
선영은 급작스런 그의 행동에 말문이 막히어 멍청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성진은 그런 그녀의 반응엔 눈길도 주지 않고 러닝만 입은 채로 한 팔을 이리저리 굽혀 보면서 자신의 팔을 관찰하는 모습이었다. 약간은 마른, 하지만 운동과 납품 일을 하면서 꽤나 단단하게 굳혀진 팔뚝이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성진은 한 손을 바지주머니에 꽂아 넣고 침대 옆으로 저벅거리며 다가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꼿꼿이 선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성진을 아무 말도 못한 채 올려다보는 선영. 그의 멋진 몸매에 놀란 것인지 날카로운 포스를 새삼 느끼어 놀란 것인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몸을 조금 움츠린 채 옆에 놓여진 이불 자락만 만지작거릴 뿐, 그녀의 눈은 성진의 시선을 피하듯 말 듯 흘끗흘끗 바라보는 데 그치고 있었다.
문득 나지막하게 입을 여는 성진.
“그래, 예전의 너란 애인한테 부끄럽지 않을 행동이 어떤 건지 가르쳐줄까?”
“뭐… 뭐?”
“되묻는 말은 ‘어떤 건지 모르니 가르쳐주라’라는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나는 말야, 예전 애인의 욕구를 채워주어야 할 의무가 있거든. 그것이 설령 정신이 잠식된 지금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리곤 침대 옆에 앉아서 그녀의 얼굴에 살며시 손을 갖다 댔다. 선영은 움찔했고, 성진은 그녀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쓸어가다가 그녀의 뺨을 간질이듯 쓰다듬었고, 그녀의 입술 쪽으로 선율을 타는 것처럼 이동했다. 선영의 엷은 분홍빛 입술이 떨리듯 열리었다.
“그… 그 불순 어쩌구 하는 이상한 짓 하려는 거야? 말해… 두, 두건데 나는 현재로선 예전의 네 애인이 아… 아냐.”
“…….”
가만히 그녀의 입술 주변을 왼손으로 어루만지던 성진은 이윽고 픽 하고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침대에서 도로 일어선 후 몸을 돌려 맞은편으로 걸어갔다.
“네가 편할 때만 예전의 애인 어쩌고를 들추는 거냐? 뭐 그건 아무래도 좋아. 어쨌거나… 너도 원하지 않는 이상한 짓 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냥 인정해두는 게 좋지 않겠어? 난 네 예전의 남친도 아니고 지인도 아니고, 그저 음……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짧은 만남으로 좋은 친구가 될 뻔하다가 안타깝게 헤어진 녀석? 그 정도로만 인지해두면 좋겠군.”
“좋은 친구?”
“예전의 너는 굉장히 힘든 싸움을 혼자서 하고 있었거든.”
선영은 뭐라고 더 물어볼 말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다가 어째선지 바깥으로 내뱉어지지 않는 걸 느꼈다. 그리고 성진은 더 이상의 설명 없이 맞은편 벽까지 걸어가 냉장고를 열었다. 그 안에서 패트병 하나를 꺼낸 그는 선영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바깥에서 좀 있다 오니 목마르지? 물 마실래?”
“…….”
“어이, 생각은 천천히 하라구. 어차피 앞으로 거쳐가야 할 것도 많으니까 나와 만났던 일부터 벌써 기억해낼 필요는 없어. 어디 보자, 여기 어디에 컵이…….”
그때 가만히 입다물고 있던 선영이 이윽고 툭 하고 입을 열었다.
“그거 정수기에서 담은 물이지?”
“어? 어…… 그런데 왜?”
“새 물 사와 줘.”
“뭐? 나 이 패트병에 입도 전혀 안 댔어. 안심하고 먹어도…….”
“정수기 물은 병원에서도 지겹게 먹었다고. 깨끗한 물 먹고 싶어. 사와 줘.”
성진은 짜증이 난다는 표정을 한껏 지어 보이면서, 또 그걸 참고 있다는 표정을 굳이 지어 보이면서 패트병을 도로 냉장고 속에 처넣듯 집어넣었다. 그리고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그래, 환자에겐 뭐든 신선한 것을 제공해야 옳지. 마트 좀 갔다 오마.”
“그리고 나 단 것도 먹고 싶은데.”
전혀 미안하다는 표정 없이 오히려 추가적인 주문을 하는 선영. 성진은 이번엔 자포자기 심정으로 싱긋 웃으며 공손하게 말했다.
“예, 고객님. 그럼 초콜릿이라도…?”
“초콜릿은 살쪄서 싫어. 아이스크림으로 사와.”
“…알겠습니다.”
아이스크림이 초콜릿에 비해 살이 찔 소지가 적은 음식인지는 굳이 따져보지 않기로 했다. 내뱉으면 곧 말이요, 진리인 입지의 사람에게는 어떤 설득도 통하지 않는 법. 성진은 웨이터처럼 손을 가슴 밑부분에 갖다 대고 정중하게 몸을 숙여보인 후 가벼운 겉옷과 잠바를 걸쳤다. 그리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면서 두 번 왔다갔다 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기는 바라는 마음에 물어보았다.
“또 뭐 필요한 것 없으십니까?”
“음…. 난 과일도 좋아해. 귤이랑 사과 사오고, 젤리! 그거 많이 사와서 내 옆에 보관해둬. 그리고 생리대도. 완전 순면으로 부탁해.”
‘가지가지 한다!’라고 성진이 손에 든 지갑을 바닥에 내팽개치려는 찰나, 선영은 생긋 웃으면서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어 보였다.
“좋은 친구니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대답 없이 거칠게 현관문을 열어젖히는 성진. 그런 그를 보면서 선영은 침대 헤드보드에 편안히 등을 기대었다. 역시나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입지와 권리를 굉장히 잘 활용하는 성격에 특화되었고, 그런 스스로의 성격에 깊은 만족감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