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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는 심야를 향하고 있었다. 성진은 병원 침대 밑 기다란 의자에 걸터앉은 채 사념이 담긴 시선으로 멍하니 앞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옆엔 현소영 간호사가 대충 간호복만 추스른 상태로 나란히 앉아서 그런 성진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이윽고, 소영은 그의 생각에 최대한 방해되지 않도록 나지막하게 물었다.
“어려운 고민이 있으신가 보네요.”
“어떤 고민인지 알려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그러기를 바라고 서비스했던 거니까♡”
그녀 자신의 볼 한쪽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생긋 웃는 소영. 성진은 그 모습이 귀여워서 따라서 웃어버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힘이 없었고, 소영도 별다른 행동 없이 그의 시선을 따라 앞쪽을 응시했다. 그리고 또 한참 동안 흘러가는 시간.
성진은 문득 자신이 소영에게 폐를 끼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도리어 초조해졌다. 그리고 뭐라고 말을 꺼내려는 찰나, 소영이 먼저 물음을 건넸다. 여전히 앞쪽만 응시하는 채로.
“역시 애인분 문제죠?”
성진은 이번엔 당황한다거나 하는 기색은 없었다. 대신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병원 바닥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입을 여는 성진.
“애인 아니에요.”
“그런데…?”
“그렇다고 평범한 사이도 아니에요. 뭐랄까…. 그냥 특별하다고 해야 할까요.”
무릎에 팔을 기대어 바닥만 응시하는 성진과는 달리, 앉아있는 긴 의자에 손바닥을 짚고 몸을 펴서 바로 뒤 침대에 등을 기대는 소영. 그녀의 시선은 병원 천장으로 향하였다.
“특별하다… 라…. 그래요. 친숙으로도 존경으로도 사랑으로도 ‘아무 사이도 아니’거나 ‘그냥 알고 지내는 사이’로도 표현할 수 없는, 분류하기 어려운 애매한 사이란 것도 존재하기 마련이지요. 인간의 불완전한 언어로는 그 당신의 세분화된 심경을 모두 표현할 수 없는 이치와도 같은.”
“그녀를 죽일 뻔했던 건 접니다.”
소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가볍게 토로하듯 내뱉는 성진. 그녀의 시선이 성진에게로 돌아갔지만,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 속에서 덤덤한 시선으로 성진을 응시하던 소영은 곧 자신의 흰 스타킹을 신은 다리를 앞쪽으로 쭉 뻗었다. 그리고는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려 모으고는 가벼운 잡담이나 듣는 사람처럼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살짝 미소 지어지는 그녀의 입술.
“음, 그럼 들어볼까요?”
이상한 일이었다. 성진은 그다지 감수성이 예민한 편은 아니었지만 사람이 죽는 걸 처음 눈앞에서 보았고, 또 그것에 연계돼있던 주체였다. 따라서 경찰서에서도 몇 시간이 흐르도록 한 마디를 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 병실에서 일단 서두를 ‘선영을 죽일 뻔했던 건 자신’으로 매기자 그 다음부턴 얘기가 술술 튀어나왔던 것이다. 물론 어조는 무척이나 가라앉은 나지막함이었지만.
그리고 그것은 전략을 모두 얘기하고 자신의 고민적인 부분으로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저는 제 입장에서의 호기심으로만 무장한 이기적인 녀석이었죠. 그녀가 왜 그렇게 캠퍼스에서 다짜고짜 섹스하자고 말하며 다녔는지, 그 뒤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물어보지 않고 그저 건방진 그녀의 기세를 눌러버려야겠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섹스하는 순간에는 또 제 본능에만 충실하며 그 순간을 즐기기에 급급했어요.”
문득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해나가는 자신을 인지하자 놀라고, 또 그 놀라움이 겉으로 표출되지 않는 것에 한번 더 속으로 놀랐다. 현소영 간호사가 위로해준다는 의미가 이런 거였나? 하지만 성진은 일단 그 모든 것을 머릿속에서 일단 닫아둔 채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숙인 상태 그대로 어두운 얼굴을 일관하며 단조롭게 입을 열었다.
“상대가 죽으려고 마음먹고 있다는 것도 까맣게 모른 채.”
“…죄책감인가요?”
살짝 들여진 뜸을 통해서 넌지시 물어보는 소영. 성진의 눈동자가 살며시 들어졌다.
“죄책감이라… 한마디로 담아서 설명하기 쉽군요. 그러나 그것은 상대를 이해시키는 선상에서 하나의 대처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솔직히 죄책감이란 것이 지금 제 가슴을 옥죄고 있는 게 맞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행동해야 했던 제 자신이 모자라 보이는 건지, 이 빌어먹을 성욕에 도취되어 그녀를 끌어안고 미친 듯이 박아대던 추함에 화가 나는 건지.”
마지막 어조는 조금 격앙된 듯 또박또박 알아들으라고 하는 것처럼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잠시 찾아드는 정적. 이윽고 성진이 고개를 내젓고는 뭐라고 더 말하려는 순간 소영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성진이 입을 열려는 걸 봤음에도 불구하고 물리지 않는, 약간은 참견하는 뉘앙스로 얘기를 했다.
“그렇게까지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그건 위로하는 입장에서의 건네어지는 말이겠죠.”
“으응, 아니. 잘못 말했네요.”
그리고 다음에 나온 소영의 말은 성진으로 하여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까지 해석할 필요는 없어요.”
성진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소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작 소영은 이번엔 그를 바라보지 않고 마치 사랑 고백이나 기다리는 소녀처럼 두 손을 허벅지 사이에 낀 채 병원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물론 저는 그 장소에 있지 않아서 상황에 대한 이해를 완벽히 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성진 씨가 얘기하는 상황의 알고리즘으로 판단하면 그렇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은 성진 씨가… 오히려 그녀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이 드는군요.”
성진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슨 뜻이죠?”
“상대를 위하는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급작스런 반문에 성진은 약간 당황하며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머릿속으로 조립해나갔다.
“어… 그러니까 그녀가 왜 그렇게 했는지를 파악하고… 그녀가 어떤 사연이 있는지를 알고… 그녀가 죽으려고 하는 걸 방지하는….”
소영은 당연히 그런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살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가볍게 가로저었다.
“대다수의 인간은 보편적인 사실과 상식에 의거하여 상대에게 그렇게 하는 게 위하는 거라고 생각하죠. 왜냐하면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어렸을 적부터 교육을 받고 자랐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본 척도에 지나지 않아요. 그리고 그 척도는 때에 따라선 상대를 무참히 유린하는 잔인한 도구가 되기도 해요.”
“……그렇다면…?”
“가장 상대를 위하는 것은, 그런 기본 척도에 의거한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아니에요. 그것은…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랍니다.”
성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원하는 대로… 해준다고요?”
“예.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슬픈 것 중 하나는, 상대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해하는 척 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은 부모가 어린 자식에게 범하는 적잖은 우에도 포함합니다. 자식이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기준에 비추어 이해하는 척 하는 것….”
소영의 고개가 서서히 성진 쪽으로 들어지며 눈을 마주쳤다. 성진은 어쩐지 그녀의 담담하리만큼 검은 눈동자가 한없이 깊은 것 같은 착각을 받았다. 소영은 신비로운 미소를 일관한 채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성진 씨는 남자들이 호기심과 본능으로 다가와서 자신에게 변화를 가져다 줄 그녀의 요구에 아주 적절하게 응했죠. 그리고 그건 그만큼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존중했기에, 그녀를 위하는 행위가 됐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결론적으론 그녀가 자살하는 방향으로 치달았잖습니까….”
“그녀의 정지해버린 시계바늘을 움직여준 거라고 생각하진 않으세요?”
성진은 멍청한 표정으로 소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소영은 그 이상의 설명을 첨언하지 않은 채 다시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성진은 그녀의 옆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방금 자신에게 건네어진 말을 곱씹어보며.
그러다 결국 그는 다시 병원 바닥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 하지만 납득할 순 없어요. 그녀는 저에게 ‘남자란 다 똑같다’며 ‘즐길 대로 다 즐기고 여유가 생기니 걱정하는 척, 위로하는 척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흐음, 그 정도까지 말을 건넨 걸 보니 선영도 꽤나 당황했나 보군요. 자신의 영역을 방어하는 발언인데요.”
의자에 앉은 채 어쩐지 재밌다는 듯 흰 스타킹 신은 다리를 교대로 위아래로 흔들고 있는 소영. 성진은 자신이 생각하던 사고의 회로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대답하는 그녀의 말에 계속해서 할말을 잊고 말았다.
그러나 어째서였을까. 성진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무거운 짐들 중 하나가 덜어진 듯한 기분을 받았다. 원하는 정답을 찾지 못했지만 그랬기에 어쩐지 편안한 느낌을 받는 아이러니한 기분…. 성진은 문득 그녀가 일곱 살 연상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나도 그녀만한 나이가 되면 상대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감싸줄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성진은 조금 현실적인 부분으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예. 시계바늘을 돌렸습니다. ……만, 정작 중요한 시침과 분침은 돌아가지 않는군요.”
“기억상실에 대해서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신체가 손상된 것에 비하면 의지적인 기적을 낳을 소지가 많으니까요. 저는 그 부분은 긍정적으로 보고 있어요.”
“저는 그녀의 기억에 도움이 될만한 것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본래의 그녀와 저의 만남은 너무도 짧았어요….”
무심코 대답하던 성진은 갑자기 소스라치듯 놀라야 했다. 어느 새 소영이 불과 몇 센티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자신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진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몸을 뒤로 빼고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왜… 왜 그러세요?”
소영은 그런 성진의 반응이 귀엽다는 듯 킥 웃으며 성진에게로 내뻗었던 몸을 도로 물리었다. 그리고는 다시 제대로 앉았고, 성진도 겨우 자세를 바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앞쪽으로 급작스레 몸을 숙여버릴 뻔했다. 소영의 부드럽지만 직격적인 말이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좋아하는군요.”
“푸흣…! 커… 콜록, 아니, 저…… 그런 건 아니고… 그런데 무슨 근거로…….”
당황하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소영의 눈동자는 차분하게 또르륵 굴러갔다. 턱에 손가락을 갖다댄 채 생각에 잠긴 표정을 하는 그녀.
“흐음, 그럼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그렇게까지 걱정해주는 건가?”
“사람으로서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녀는 죽을 뻔했다구요. 그리고 저는 그녀가 옥상에서 뛰어내릴 때 아무것도 제지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그…… 굳이 말하자면 속죄하는 거랄까. 그래, 그래요! 그렇지 않으면 제 맘에 편하지 않으니까….”
소영은 연속적으로 틀린 답만 제출한 학생의 시험지를 채점하는 선생처럼 고개를 조금 숙이고 좌우로 천천히 내저었다.
“약간 지나치게 현실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후에 귀찮아질 것을 염두에 두고 경찰이 오기 전에 그 자리를 뜨죠. 보통의 사람이라면 조서를 모두 작성하고 병원에 가서 그녀의 시신이나 상태를 확인, 그 상황을 개탄하며 수많은 심경을 간직한 채 병원문을 나섭니다. 조금 더 인간적인 사람이라면 그녀의 가족 관계를 물어보고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확인해보고 그녀가 의식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요.”
그리고 마지막 타입이 바로 당신이라는 듯 고개를 돌려 마주보는 소영.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은 일단 순식간에 뒤로 밀려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녀가 비급여 치료가 아닌 최대한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이 가진 것을 무리하게 투입, 그 사실도 순식간에 뒤로 밀려나죠. 이어서 그녀를 매일같이 살피러 오고 진전이 없는 부분만 생각하며 괴로워합니다. 자신이 그녀에게 베푼 은혜는 그저 잠시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 생긴 성에에다 적은 것에 불과할 뿐, 옆 벽에다가 자신이 그녀에게 해주지 못하는 부분만 지워지지 않는 매직으로 적어서 바라보고 가슴 아파 눈물 흘리는.”
“…….”
적막하기 그지없는 병실은 째깍거리는 시계바늘 소리까지도 전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그것을 자각할 수 있는 침묵이 만들어내는 공간 속에서 성진은 문득 자신이 왜 이렇게 선영에게 집착하나 하는 부분을 상기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학교 건물 옥상에서 자신을 천재라고 소개하던 그녀의 모습, 그러나 전혀 행복하지 않던 모습, 세상이란 방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하는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 휘날리던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그녀와 함께 진정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안타까움.
이윽고 성진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머릿속에 일단 덮어두기라도 하듯 한숨같이 입을 열었다.
“의사 선생님은 제게 선영의 기억 회복에 도움이 될만한 당사자는 저밖에 없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소영은 역시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생긋 웃으며 말했다.
“성진 씨는 멋지신 분이니까 능히 가능할 거예요.”
“…고마워요.”
성진도 따라서 웃으며, 진심을 담아 그녀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소영은 일어선 그를 편안한 미소로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문득 생각난 듯 뭔가를 더 말하려 했다. 짧은 순간이지만 중요한 고민이 그녀의 머릿속을 교차했다.
‘시도하기도 전에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도록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런데 선영의 기억이라면…….’
하지만 현재로선 그것을 지워버리는 게 좋겠다고 판단하는 소영. 명확하게 사실을 눈앞에서 보지 못했기에, 너무 참견하는 게 아닌가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소영은 일단 자신이 염려하던 한가지 부분까지 성진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이어서 살그머니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 침대 위로 올라갔다.
“자, 그러면… 그냥 가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소영 씨…?”
“그냥 편하게 아까처럼 누나라고 불러요, 후훗…. 이번엔 여기로 먹여주셔야죠.”
다리를 양쪽으로 벌려 두 손가락으로 보지를 열어 보이는 소영. 그에 따라 성진의 눈도 커졌다. 물론 그의 집은 굳이 버스를 타고 가야 할 정도로 먼 곳은 아니었기에 심야로 들어서는 시계바늘 따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침대 옆에 걸쳐져 있는 자신의 재킷을 집어들다 말고 곧바로 다시 그녀에게 안겨드는 성진.
“소… 소영 누나!”
“아잉♡”
누나란 호칭을 정말 좋아하는 여자라고 생각하며, 성진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커다란 가슴을 빨아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