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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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을 담당하는 의사. 즉 보편적인 시각으로 보기에 키가 조금 크고 비쩍 마르고 안경을 쓴, 따라서 성진도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는 간호사가 가져온 컵을 들었다. 의사는 그 안에 든 커피 향을 잠시 음미했고, 그동안 맞은편에 앉아있던 성진은 볼륨감 있게 거니는 간호사의 허리와 엉덩이를 슬쩍 응시했다.

간호사는 그의 시선을 눈치채곤 차트를 가슴폭에 안은 채로 싱긋 웃어 보였다. 어색함이 티날 정도로 약간의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리는 성진. 이래나 저래나 해도 그는 아직 이십대 초반이었고 처음 보는 예쁜 여자 앞에선 어느 정도 움츠려들 수밖에 없는 청년이었다. 그는 바깥에서 사온 젤리 봉지를 무릎 위에 놓은 채 의사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기능성 기억상실은 전에도 말씀 드렸듯 중요한 개인적 경험, 지식 등을 잊어버린다 했지만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그러한 일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지만 보편적으로 습득했던 상식적인 측면은 남아있게 되죠. 아예 기억을 못하는 것보단 ‘그런 부문이 있다’는 사실로 뇌가 대처시키고 건너뛰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거든요.”

진료실을 또각또각 거닐고 있는 여자 간호사의 발소리를 들으며 성진은 확인차 물어보았다.

“그 편이 받아들이기도 쉬우니까?”

“그렇죠. 억지로 기억을 떠올리려 하면 뇌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피곤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남의 일인 것처럼 치부합니다. 한 예로 자신이 전에 회계사였는데 기억을 잃고 난 후에는 회계사란 직업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자신이 그 직업인이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않고 다니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은…….”

이쯤에서 의사는 커피잔을 기울이며 잠시 뜸을 들였다. 하지만 성진은 아주 중요한 타이밍이라는 눈초리로 의사를 응시했고, 의사는 길게 시간은 끌지 않겠다는 의도마냥 커피잔을 내려놓자마자 말했다.

“기억을 잃은 당사자가 다시 한번 그 경험을 한다면, 몸이 기억하는 회로로 뇌에 전달돼서 그 기억 자체를 찾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죠.”

“그렇… 습니까.”

성진은 젤리 봉지를 매만지며 생각의 정리를 해가기 시작했다. 일단 선영의 해커에 대한 반응을 다시 한번 여기서 제대로 확인했다는 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다. 동시에 그녀의 섹스에 대한 반응도 이해가 갈듯했다. 섹스란 용어에 대해 알지만 그것은 정의한다기보다 본능에 많이 의거하는 행위이기에, 의사의 말처럼 직접 경험하기 이전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많을 것이었다.

그 때, 의사는 다시금 커피잔을 기울이며, 이번엔 자신 쪽이 조금 궁금해졌다는 투로 물었다.

“그런데 은선영 씨가 어떤 기억을 떠올리지 못해서 그런 거죠?”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냥…….”

더듬거리는 성진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 의사. 하지만 그다지 도덕적이지 못한 기억들인지라 성진은 얼버무리듯 말을 맺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과거 대부분은 좋은 기억들이 아니군. 성진은 차라리 그것들을 잊고 사는 게 그녀 입장에서 바람직하지 않을까란 추측을 해보았다. 하지만 무언가 허전함이 들었다. 그 허전함이란…….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

자기가 정확히 어떤 존재였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그것을 거부한 채, 새로 태어난 것마냥 아무 생각 없이 앞만 바라보고 살아갈 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진은 중고등학생이나 가질 법한 사고 체계가 아닌 대학생에 어울리는 사고 체계를 가진 남자였고, 그는 그것이 정말로 옳은 일인가를 고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비록 부모의 사망과 뒷세계의 범죄, 섹스 등으로 피폐한 삶이지만 그것들 또한 선영의 본모습이었기에….

이러한 시점에서 의사가 그녀에 관한 내용을 꺼낸 건 호불호를 떠나 꽤나 직격적인 타이밍이었다.

“김성진 씨. 이 병원에 처음 오셨을 때 헛소리라고 외쳤던 것 기억나십니까?”

“예…? 어떤 것에서…… 아!”

선영이 살고 싶어서 충격을 최소화할 자세를 펼쳤다는 의사의 추측에 말도 안 된다며 날뛰었던 것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진은 뒤늦게라도 사과해야하나 라는 혼란을 받으며 허둥거렸다.

“아니, 저… 그게…… 그 때는 너무 경황이 없어서…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의사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동작으로 뺨을 긁적이며 어떤 차트를 하나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이번엔 설명하기 애매하다는 뉘앙스를 담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저도 김성진 씨 말을 듣고 궁금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좀 더 심화적으로 조사해봤죠. 은선영 씨는 전후 상황으로 보건대 살아갈 의지가 전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더군요. 더군다나 그녀는 천재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재는 대체로 뇌가 예민하고 일반인이 신경 쓰지 않는 것에 바람 앞 등불처럼 위태로워지기도 합니다.”

성진은 의사가 얘기하면서 틈틈이 커피잔을 들어올리는 잠깐의 사이도 참기 힘들다는 집중도로 그를 응시했다. 반면에 의사는 성진을 바라본다기보단 차트를 보면서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도록 단어를 조합하는데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렇게 이상스레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 간호사의 이따금씩 또각거리는 소리만 적막하게 진료실을 메워나갔다.

“그런 가누기 어려운 정신이, 죽음이란 극적인 상황과 만나면 더 버티지 못하고 최소한의 지성만 남겨둔 채 잠식합니다. 그 최소한의 지성이란 사람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이자 시초의 본능. 즉 ‘생존’입니다. 이것은 혼란스러웠던 정신의 강도에 비례해서 방탄작용도 극대화됩니다. 가눌 곳 없었던 정신이 자기방어라는 한가지 목적으로 통일되어 억눌렸던 본능을 방출하는 순간이거든요. 보통 사람이 자살을 시도하면 그런 지성적 조합이 이루어질만한 기제가 약하기에 발동하지 않습니다. 또 설령 있다 해도 제대로 뻗쳐나가기 전에 생명이 끊어지죠.”

“…그렇습니까.”

“그러나 은선영 씨는 ‘그녀의 입장에서’ 지루했던 시간을 너무 오래 보낸 것 같더군요. 그것이 실제로 발동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잠식한 정신 중 대다수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녀가 기억상실적 부분을 특히 강하게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죠. 이것은…… 선영이란 존재의 본모습이 둘로 나뉘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돕니다. 쉽게 말해서 이중인격… 비슷하게 나뉘어져 한쪽은 잠식되고 한쪽은 현 표면으로 노출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둘을 다시 합치려면….”

그제서야 차트에서 눈을 떼고 안경 너머로 성진을 지긋이 응시하는 의사.

“가까운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고는 회복이 힘들 겁니다. 지금으로서 제가 보기엔… 김성진 씨 밖에 없을 듯하군요.”

그렇게 말해봤자… 나는 그녀를 잘 알지도 못하고 어떤 기억부터 어떻게 끄집어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다고 성진은 생각했다. 기껏해야 선영 전생(?)을 봤던 것은 2시간 가량 화장실 섹스했던 것과 동아리방, 옥상 등에서 약 1시간 얘기했던 것이 전부였다. 그녀 예전 남친들이라도 찾아가며 조사해야 하나? 선영의 꼴로는 전 남친들 이름도 기억 못할 게 뻔한데… 그리고 기억상실을 떠나서 그런 식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역시 좋지 않은 부분이었다.

자포자기 심경이 밀려오는 것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는 성진. 그런 그의 뒤로 부드러운 팔이 휘감겨왔다. 동시에 목 언저리로 느껴지는 푹신한 느낌. 얽혀있던 머릿속이 현 상태로 한꺼번에 집중되면서 성진은 소스라치듯 놀랐다.

“뭘 그리 세상 다 산 사람처럼 힘없이 있나요? 애인분 문제?”

“애… 애인 아니라니깐……!”

“흐음, 그럼 왜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오시는 걸까?”

성진은 변명할 틈도 없이 간호사의 팔에서 빠져나오려고 버둥거려야 했다. 연분홍빛 가운 위로 느껴지는 글래머틱한 젊은 여자의 가슴이 성진의 힘을 부드러움으로 압도해버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간호사의 옆얼굴에서 느껴지는 향긋함에 성진은 이 급작스러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책상 맞은편에 앉은 의사가 그를 구원해주듯 끼어들었다. 어쩐지 한두번이 아닌 듯 이젠 그런 그녀의 행동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것처럼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는다. 그저 커피잔을 기울이며 건성으로.

“어이, 현소영 간호사. 할 일 없으면 가서 링겔 체크나 하고 오게.”

“몇 살이에요, 멋진 성진 씨?”

“이… 이십 일입니다.”

보편적으로 나이를 말할 때 숫자가 아닌 개수를 셀 때의 말로 한다는 것도 잊어버린 대답이었다. 소영이라 불린 간호사는 그런 성진의 반응이 귀엽다는 듯 킥 웃었다. 그리곤 의사의 시선도 아랑곳 않고 슬그머니 손을 그의 윗옷 안자락으로 파고들어갔다. 그녀의 귀에 달린 은빛의 마름모형 귀걸이와 가늘고 섬세하게 빗어진 머리카락들이 성진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나랑 7살이나 차이나네. 흐음~ 힘들면 언제든지 와요. 이 누나가 위로해줄 테니까.”

“어서 나가보게!”

결국 의사가 참지 못하고 호통을 쳐야 까르르 웃으며 진료실 문을 나서는 소영. 그녀의 늘씬하고 볼륨 있는 뒤태를 멍하니 돌아보던 성진은 잠시 후에야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만 나가보죠.”

“간호사가 저러는 건 신경쓰지 마십시오. 어디서 놀러만 다니다가 들어온 녀석인지 참….”

“아닙니다. 무척 매력적인 누나더군요.”

하지만 의사는 기분이 언짢은 듯 커피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고, 일 잘 하는 간호사를 우선으로 하는 의사의 입장을 알고 있었기에 성진도 그쯤에서 별 말 없이 일어섰다. 의사는 옆에 놓인 티슈로 입가를 슬쩍 닦더니 성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은선영 씨의 기억 회복 진전은 어떠해 보입니까? 이것은 저희보다 자주 방문한 성진 씨가 더 잘 알아낼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알고 있는 건 전혀 진전이 없다는 것뿐입니다.”

깔끔하리만큼 수확 없는 대답. 그리고 선영 같은 특이한 상황은 의사 입장에서도 처음 경험해보는지라, 그도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턱을 괸 손으로 뺨만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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