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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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주소는?”

선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다니던 대학, 학과.”

선영은 다시금 고개를 내저었다.

“기억나는 친구, 지인, 교수 이름 아무거나.”

선영은 앞서 질문들에 똑같은 행동을 보임으로써, 성진에게 찰랑거리는 자신의 머릿결만 자랑했을 뿐이었다. 성진은 한동안 손질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머릿결이 꽤나 미려하게 찰랑거린다고 생각했다. 칫… 변하지 않은 건 외모뿐이군. 그렇게 생각하던 성진은 곧 햇살이 들어오는 병원 바깥으로 시선을 보내며, 며칠동안 자신이 여기를 방문했는지 되짚어봤다.

물론 그녀의 기억은 열흘이 넘은 지금도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 은선영이란 그녀 자신의 이름도 몇 번이나 까먹다가 이제야 겨우 인지하고 기억에 담아두는 모양이다. 성진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긴 한숨을 내쉬면서, 침대 위에 깁스를 하고 앉아있는 선영을 바라보았다.

“대체 기억나는 게 뭐야?”

“젤리.”

그녀는 대답 대신 성진이 사온 봉투로 뻔뻔스레 손짓을 해보였다. 성진은 이젠 다 귀찮다 싶은 동작으로 자신이 가져온 검은색 봉투를 그녀 무릎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선영은 헤헤 웃으며 봉투 안에 있는 몇 개의 플라스틱 젤리 컵들 중 복숭아맛 하나를 들어 개봉했다. 그리곤 같이 동봉된 작은 수저로 떠먹기 시작했다.

부러져서 깁스를 한 왼팔도 그녀의 젤리 떠먹기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듯했다. 죽음에 한 걸음 앞까지 다가갔던 선영은 현재 중환자로 보기 힘들 정도로 발랄하게 기운을 내고 있었다. 의사는 전치 4주를 - 그것도 믿기 힘들 정도의 판정이지만 - 내렸지만 성진이 보기에는 지금 당장 퇴원해서 통원치료 정도만 받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기분을 받게 만들었다. 하지만 성진은 그다지 고무적인 상황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뭣도 모르고 젤리를 떠먹고 있는 선영 옆에서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이다가 그녀를 조금 강압적인 시선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이봐, 은선영.”

“응? 왜?”

“너 말야… 조금은 자신의 이전 삶에 대해 자각하는 태도를 가져보는 게 좋지 않겠어?”

“죽을 뻔했다는 건 나도 알아. 그런데 지금 이렇게 살아있으니 됐잖아?”

성진은 잠시 그녀의 젤리를 확 뺏아보면 어떨까 생각을 하고는, 그렇게 하는 대신 그녀 이불 위 무릎에 놓인 봉지를 뒤적였다. 그리고는 자신도 젤리컵 하나를 꺼내 단숨에 개봉했다. 성진이 사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걸 뺏아가서 아깝다는 눈빛을 보내는 선영.

“물론 현재 살아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후의 삶에 이바지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단 것쯤은 알고 있을 텐데?”

“어쩌라고?”

“좀 더 기억해내려고 노력해보란 말야. 의사의 말로는 기억하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것보다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본인의 의지도 적잖게 작용한다고 하잖아.”

“그다지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데. 내 부모는 이미 없다며. 친척도 돈도 없고. 암울했을 게 뻔한 지난날을 굳이 빨리 떠올려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학교야 이미 등록한 게 아까워서라도 다녀야 한다면 그쪽 부분은 그나마 당위성이 조금 있겠군.”

대략 8촌쯤 먼 친척이라 해도 그렇게 건성으로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인데, 선영은 자신에게 그렇게 하고 있었다. 덧붙여서 이것은 그녀의 기억에 관계되었다기보단 원래 본성이 그런 여자였을 게 틀림이 없다고 성진은 짐작했다. ‘내가 누구였는지 알 게 뭐야’라는 표정으로 수저만 놀리는 그녀를 보며, 성진은 이번엔 머리를 긁적이는 게 아닌 쥐어뜯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기 시작했다.(물론 젤리를 떠먹는 중이라 실제로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었지만)

그러다가 문득 머릿속이 살짝 밝아지듯 떠오르는 게 있었다. 선영의 말 중에 ‘돈’이란 키워드가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성진은 짐짓 의자에 등을 기대고 턱을 들어 선영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젤리를 떠먹던 선영이 수저를 입에 문 채로 의문 섞인 눈동자를 돌려 마주보았다. 성진은 입매를 슬그머니 올리면서 툭 내뱉듯 말했다.

“너 말야. 지금 누구 돈으로 여기 입원해있는 줄 알아?”

“의료급여 아니야?”

성진은 피식 하고 웃었다.

“착각하지 마. 의료급여 따위로 이런 1인 병실과 그런 좋은 처치법을 너한테 시행해주지는 않아.”

“뭐야, 그럼. 혹시 너…?”

성진은 자신만만하게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야 좀 자각이 되냐?”

“그러고 보니 전부터 자꾸 회피해오던데 넌 도대체 누구야? 내가 기억을 잃기 전 남자친구?”

“글쎄, 어떨까?”

“흐음, 그럼 일단은 남자친구라 보자. 고작 돈 사백 정도에 버팅기고 있는 걸 보면 예전의 나도 별 거 아닌 애인을 두었군.”

성진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젤리 통을 단숨에 비우고는 옆 선반에다 소리나게 탁 하고 놓았다. 어이없는 반격을 당한 그는 선영을 사납게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우리 집도 그리 잘사는 집은 아냐. 이번에 빠져나간 돈 때문에 내가 부모님께 납득 가게 설명하느라 얼마나 애먹었는지 알기나 해? 게다가 그 지출 메우려고 납품 일을 또 하게 생겼다고.”

“납품?”

“뭐 학비도 집에서 대주는 마당에 용돈까지 달라고 할 순 없어서 방학동안 했던 일이지. 도매업 하는 삼촌네 회사가 있거든. 젠장할. 학기 중에는 안 하려고 했는데.”

하지만 선영의 표정에선 별로 미안하다거나 하는 기색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마지막 남은 젤리 통을 들고는 빈 봉지를 그의 옆에 아무렇게나 던지면서 명령하듯 말했다.

“나중에 일해서 갚을 테니까 귀찮게 하지 말아줘. 가서 젤리나 더 사와.”

“뭐야? 이게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성진은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선영은 전혀 무서워하는 기색 없이 생긋 웃으면서 고개를 살짝 꺾어보였다. 그녀의 오른손에 든 수저가 왼팔과 왼쪽 다리를 가리킨다.

“환자에게 절대 안정은 필수인 거 알지? 흐음, 내가 여기서 비명을 지르거나 하면 간호사들이 달려올 테고, 어떤 사이인지도 명확하지 않은 네가 저지르는 일을 보고 뭐라고 생각할까?”

성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기 이전에 의문점이 들었다. 이 녀석, 도대체…. 기억상실이 어따구로 됐길래 말을 이렇게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지? 자신과 자신 주변의 대상들을 기억 못하는 건 확실한데……. 그러다가 성진은 문득 실험해보기로 하고는 도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막무가내로 덤비거나 돌아서는 두 가지 경우만 염두에 두고 있던 선영은 예상 외의 반응에 눈을 조금 크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성진은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고 앉아서 그녀를 마주보았다. 그리곤 나지막하게 툭 내뱉는 물음.

“너, 해커가 뭔지 알아?”

“이상한 거 물어보지 말고 젤리나 사와.”

성진은 자세를 풀지 않고 히죽 웃었다.

“그냥 가는 수가 있다? 내 물음에 대답해서 젤리를 먹을지, 아니면 날 그냥 내보낼지는 네가 선택하라고.”

급반전된 주도권에 선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성진은 이렇게까진 의도하지 않았는데 꽤 좋은 효과를 보는 것에 대단히 만족하게 되었다. 선영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살짝 긁는 척하더니 대답했다.

“대충은… 컴퓨터 인터넷에 접속해서 상대방 사이트를 다운시키거나 자료를 조작하거나, 전산망을 마비시키거나 하는 거잖아.”

“알아서 설명까지 잘 해주시는군. 그런데 네가 해커였다면 믿겠어?”

“정말? 우와…. 그거 꽤 멋있었겠는데?”

“상대방의 역침입에 걸리지 않도록 뒤처리까지 깔끔하게 해놓고, 자살시도 직전까지도 사이버 수사대에 걸리지 않은 완벽함을 내보였지.”

성진은 그녀가 자신의 전화번호까지 훔쳐낸 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테스트(?) 중에 다른 쓸데없는 감정까진 자극할 필요는 없겠단 판단이었다. 그리고 선영은 처음으로 자신의 예전 모습에 흥미를 갖는 표정이었다. 잠시 눈동자를 굴리며 상상에 잠기던 그녀는 이윽고 성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넌 그걸 어떻게 안 거야?”

“네가 네 입으로 말했거든.”

“뭐?”

“자자, 그건 그렇고. 해커에 관한 지식 중 뭐 기억나는 건 없어? C언어나 ASP, JSP, 자바 스크립트 등등…….”

“몰라, 그거… 뭐야. 머리 아프게…….”

성진은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쿡쿡 웃었다. 자신이 방금 전 떠올린 예상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했던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게 아닌 보고 들은 것에 의거하는 보편적인 상식은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반면에 자신이 직접 참여하고 심화적으로 파고들고 ‘되었던’ 것은 뇌가 기억하길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사가 말했던 기능성 기억상실증이 적잖게 첨부된 데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성진은 생각했다.

성진은 이번엔 조금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선영을 바라보았다. 선영은 뭔가 자신의 내면을 파헤쳐보려는 의도가 담긴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져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뭔가 대처(?)를 마련해보기도 전에 성진의 두 번째 물음이 건네어졌다.

“섹스는 뭔지 아나?”

선영은 결국 성진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점차적으로 혐오감에 물들고 있었다.

“남자와.”

“음.”

“여자가.”

“어.”

“서로 끌어안고 몸을 비벼대는 것…?”

“알긴 아네.”

선영은 젤리 맛이 떨어진다는 투로 플라스틱 수저를 통 안에 넣은 채 성진을 바라보았다. 성진은 여전히 의자에 앉아 팔짱을 낀 채로, 마치 아주 재미있는 무언가의 반응을 기대하기라도 하듯 그녀를 마주보고 있었다. 하지만 선영은 전혀 재미없다는 투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런 이해가 안 가는 짓을 왜 하는 거지?”

성진의 미소가 조금 가라앉았다. 그녀의 섹스에 대한 이 정도까지의 인식은 기대하지 않았기에, 미묘한 기분을 받았던 것이다. 뭐야, 이 녀석. 중학생도 아니고 섹스를 왜 하는지 몰라? 하지만 성진은 확실히 확인해볼 필요성을 느끼곤 자신의 포스를 조금 발휘해보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재킷을 의자에 걸치고는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섰다. 동시에 확연히 달라지는 눈높이차이.

“뭐… 뭐야?”

선영은 침대 위에서 도망치지도 못하는 상황에 몸만 조금 움츠리며 성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공포감에 물드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성진은 더욱 짙은 미소를 띠었다. 그리곤 차분한 음성으로 말하며 그녀에게 점점 밀착해갔다.

“알고 싶어?”

“그… 그런데 왜 이렇게 다가오는 거야? 좀 떨어져서 말할 순 없어?”

성진은 고개를 내저었다. 대신 마법 같은 동작으로 손을 움직여 그녀의 환자복 윗단추를 두 개 끌러 내렸다. 선영이 손 하나 까딱 못하고 굳어있는 사이 성진은 어느 새 그녀의 귀 옆으로 입술을 가져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이건 경험하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는 거거든.”

속으로 쉴새 없이 키득거리는 성진. 어쩐지 굉장히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상황은 달라졌지만 예전의 선영에게 끌려가다시피 하던 자신이 이번엔 반대로 주도권을 잡고 있는 느낌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장난기 어린 마음도 오래 가지 못했다. 떨리듯 열린 선영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의 또래에서는 ‘고작’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시시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옷… 벗기려는 거야? 그거 하려면 꼭 벗어야 해?”

“…….”

성진은 접근할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몸을 일으켜 똑바로 섰다. 선영은 한 손엔 젤리 통을, 다른 한 손으론 환자복 윗자락을 움켜잡은 채 멍청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성진은 설명 대신 김 다 샜다는 투로 툭 내뱉었다.

“…차라리 ‘비명 지를 거야’라고 해라.”

그리곤 한숨을 내쉬며 젤리 통들과 비닐봉지 등을 치워나가는 성진. 선영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시선으로 그런 그의 동작에 시선을 쫓아갔다. 하지만 성진은 쓰레기 정리가 끝나자 별말 없이 젤리나 사오겠다면서 재킷을 도로 걸치고 병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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