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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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은 나체의 모습으로 검은 허공에 서있었다.

무언가 마구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언지는 알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는 과정이 귀찮았다. 시야로 받아들여 뇌에 전달하고 경험에 비추어 무엇과 비슷한지라도 생각하는 그 단계를 밟아 나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이 앞을 바라본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그런 자신의 모습을 타인의 시선으로 관찰하는 기분도 느꼈다. 세간에서 뒷세계로 할 짓 못할 짓 다 해보고 경험한 선영이었지만 그것은 한평생 느껴보지 못한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차원이 다른 감각임을 자각하던 그녀는 동시에 이곳이 현실이 아님도 인정해야 했다.

그녀는 자신이 죽었다고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람들에게, 혹은 방송으로, 혹은 인터넷으로 듣고 보았던 그럴 듯한 사후 세계의 모습이 아니었다. 자신이라 자각하는 느낌, 그리고 타인이라 생각되는 그 느낌, 의지로 움직여져야 할 것, 생각나야 할 것. 그런 사람으로서의 인지력이 완전히 허물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간신히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아, 지금 이 검은 허공에 떨어져내리는 게 뭔지라도 확인해보기로 했다. 그 과정은 상당히 귀찮았으나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그것을 더듬었다.

그녀의 눈에 비쳐진 건 붉은 비였다.

피 같은 붉은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검은 허공에 쏟아져 내리는 그 핏빛의 비는 바닥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에 퐁당 하고 파문까지는 일으켰으나 고이거나 남는 일 없이 그대로 ‘삭제’됐다. 그리고 그 빗물이 자신의 몸을 스쳐 떨어질 때마다 그 부위도 삭제되고 있었다. 3차원이지만 2차원 같은, 자신의 그런 모습을 다른 눈으로 보듯, 그렇게 점차적으로 몸에 그어지는 선이 많아지고, 조금씩 삭제되는.

문득 선영은 그렇게 다 삭제되면 ‘나’란 존재는 어디로 갈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두려움 같은 건 일지 않았다. 이런 공간으로 건너오기 직전 몸 전체가 부서지는 형언하지 못할 고통을 끝으로 두려움 따윈 사라진 기분이었다. 선영은 갑자기 비웃고 싶었다. 저승사자가 어떻고 염라대왕이 어떻고 혼이 남겨져 귀신이 되고…? 그런 얘기들 다 엉터리잖아.

마지막은 그저 이곳에서 ‘삭제’되는 과정뿐이고, 그 과정에서 ‘나’라고 인지되는 것은 이야기를 다 읽고 책을 덮었을 때 보이는 빈 뒷면과 마찬가지로 변해가는 게 전부였다. 인지할 수 없다는 게 이렇게 편한 것인 줄……. 선영은 겨우 자신의 안식처로 돌아왔다는 생각을 하며 그 무인지(無認知)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그래서 그 때까지도 귀찮게 유지하던 의식을 놓았다. 마치 눈을 감는 기분으로 자연스럽게….

그러나 그 순간, 뭔가가 뜯어졌다. 선영은 붉은 비로 인해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몸이 갑자리 분리되며 뒤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느꼈다.) 선영은 어쩐지 그것을 그냥 놔두어선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붙잡아서 도로 갖다 놓으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을 듣지 않았다. 선영은 도리어 자신이 그것에 끌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얼마간 끌려가던 그녀는 어딘가에 내동댕이쳐졌다. 처음 죽음을 경험했지만 이곳은 자신이 누워(?)있어야 할 곳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애매한 공간에다 남은 의식을 흩뿌리듯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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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을 알 수 없는 심연 속에서 의식이 돌아오는 과정은 참으로 독특했다. 어떻게 독특하냐고 물어보면 나른하게 잠이 들었는데, 누군가에게 강제로 깨워질 때의 딱 열 배라고 선영은 생각했다. 눈을 뜨는 간단한 동작에도 한량없이 시간이 흐른다고 느껴질 즈음.

언제부턴지 모르게 그녀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색의 병원 천장은 특이한 게 없었다. 그녀 자신도 거기서 뭔가 흥미를 끌 만한 요소가 발견되거나 발견할 수 있는 계제가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선영은 기다란 형광등이 달려 있는 그 재미없는 병원 천장을 가만히 응시했다. 사실 그것은 또 다른 작업, 현실로 회귀한 감각을 정리하는 과정이었고 선영에겐 그것이 필요했다.

문득 왼쪽 팔과 다리에 굉장히 성가신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성가신 기분이 무엇인지 다시금 돌이켜보는 순간 통증이란 걸 자각하곤 기겁했다. 온몸이 저릿저릿한 통증. 뭐지…? 이 통증은 도대체 뭐야…. 아……. 아파, 아파……. 아……. 몸의 감각이 제대로 뇌에 전달되기 시작하자 못 견딜 만큼 극심한 통증이 그녀를 압박했다. 이게 도대체…….

“전치 4주입니다.”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선영은 그 통증을 떨쳐내기라도 하듯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웬 키가 크지만 비쩍 마르고 안경을 쓴 흰 가운의 의사가 손에 차트를 들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고, 선영은 의사가 방금 그 두 명에게 말을 건넨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짐작할 수 있는 건, 그의 앞에 서있던 두 사람의 표정이 믿을 수 없다고 반발하기라도 하듯 입을 떡 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남자와 중년의 남자….

뒤이어서 중년의 남자는 의사를 마치 돌팔이 보듯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툭 내뱉듯 말했다.

“6층 높이에서 추락했는데 고작 전치 4주요? 뭔가 잘못된 거 아닙니까, 의사 양반?”

“저희도 처음엔 분명 죽은 줄 알았죠. 숨도 거의 내쉬고 있지 않았고 맥박도 미약했기에 가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내 얘기인가? 선영은 궁금증이 일었으나 입 밖으로 내어 말할 기운까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음을 느끼었다. 어쨌거나 의사의 말은 계속되었고, 맞은편에 있는 두 사람은 다른 어떤 흥미로운 정보라도 지금 이 순간엔 관심 없을 것처럼 의사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검사 결과가 나왔을 때 그녀의 상태는 사고의 강도에 비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양호했습니다. 단지 쇼크로 정신이 전혀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죠. 시간이 흐르면서 맥박과 호흡은 정상을 되찾았습니다. 저희는 X레이, 초음파, MRI 등 모든 검사를 정밀하게 해보았으나 실로 기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그렇게 말하는 의사의 눈은 중년 남자의 목에 걸린 형사 신분증으로 향해 있었고, 법에 위축되지 않을 만큼 제대로 검사를 다 했다고 호소하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동시에 이런 사립병원에서도 그 정도 장비는 다 갖추고 있다는 자부심도 들어있을 것이었다.

“왼쪽 팔과 다리에 심한 골절상이 있긴 하지만 딱히 심 같은 걸 박아 넣을 수술도 현재 필요 없어 보이고요. 내상도 있지만 자연회복 가능한 수준입니다. 젊은 아가씨니까 어쩌면 예상보다 회복이 더 빠를 수도 있겠지요. 뭐 정확한 진단은 경과를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거죠?”

중년 남자 앞에 서있던 20대 초반의 남자, 성진은 참지 못하고 의사 말을 끊으며 질문했다. 하지만 그 의사도 자신의 자부심에 상당 부분 책임을 질 수 있을 정도의 노련함은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별로 당황하거나 꺼림칙해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어떻게 가능하다… 라……. 이건 의학적으로 설명하기보단 과학적인 문제에 더 근접할 듯하군요. 그리고 그 과학적인 근거는 언제나 밝혀지지 않은 초과학적, 그러니까 불가사의한 현상에 모두 의거할 수 없습니다. 극히 희박한 그것을 우리는 통상 기적이라고 부르지요. 일어나지 않으니까 기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척이나 희박한 확률. 하지만 분명한 건 그런 사실도 인류와 이 세계에는 존재하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짐작이 가는 가설은 있습니까?”

“형사님, 저는 의사지 탐정이나 추리가는 아닙니다. 하지만 제 의사 생활과 그간의 추락환자들의 심리, 기억, 진술 등으로 종합해봤을 때, 의도함이라기보다는 무의식적인 욕구에서 돌출되는 반사적 행동에 가깝습니다. 생존에 대한 갈망이랄까요. 그녀는 지면에 부딪치기 직전 자신에게 가해질 피해를 최소화할 자세를 취했을 것입니다. 물론 낙법 같은 정형화된 자세는 아니지만 그렇게 이해하시는 게 쉬우실 겁니다. 몸을 왼쪽으로 틀고 웅크려서 충격을 흡수함과 동시에 대비하기 가장 용이한 모습으로, 더불어 그녀의 몸 조직들도 의도가 아닌 반사적인 생존 회로로 퍼져나가서…….”

“그럴 리 없어요!”

마치 말 끝에 뾰족한 무언가로 찔러나가듯 팍 하고 외치는 성진. 담당 형사와 의사는 모두 입을 다문 채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성진은 몸을 조금 구부린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곤 마치 자기 혼자 되뇌는 것처럼 역시 떨리는 음성으로 한마디한마디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그럴 리 없어요…. 그녀는… 그녀는…… 이 현세에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떨어지기 직전…… 마지막까지도 제게 향했던 눈은…… 그 눈동자는 거짓이 없었다구요…….”

“김성진 군…?”

“살고 싶어요…? 살고 싶다구요…? 하하핫…… 헛소리. 개소리! 그녀는 살아 있지만 죽은 거나 다름없었고, 그 누구도 그걸 제지할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한, 아니, 확고하다고 표현하기도 부족할 정도로 일관화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어요. 당신들이… 현장에 없었던 당신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진정하게. 자네… 자네도 여러 심정이 교차했을 거라 보네만, 결과가 이러니… 그만 진정하고 현실을 봐봐. 어쨌거나 그녀가 살아있는 건 다행이지 않은가…….”

절규하듯 외치는 성진의 모습에 형사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 달래면서도 문득 크나큰 위화감이 느껴졌다. 성진이 애초부터 그녀의 애인이라도 됐던 것처럼 행동하고, 또 그렇게 달래는 자신이 이상하리만큼 어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뭐지…? 혹시 둘만의 비밀로 몰래 교내에서 연애하고 다녔기라도 한 건가?

“저…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그러나 여기에는 조서 등으로 선영과 성진의 관계를 알지 못하는 제 3자가 존재했고, 그건 의사의 입장을 말하는 것이었다. 의사는 성진의 모습에서, 또 형사가 위로하는 모습에서 그와 그녀의 관계가 결코 가볍지는 아닐 것임을 짐작했다. 그래서 얘기하기 꺼림칙한 무언가를 알려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성진은 추락 당시의 선영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려 의사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조그맣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높지도 낮지도 않은, 조용하고 평온하리까지 느껴지는 음성. 그러나 셋은 마치 아주 중요한 열쇠라도 발견한 것마냥 고개를 돌려 침대 위를 바라보았다. 어느 새 선영이 눈을 제대로 뜨고 누운 채로 고개를 약간 돌려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 영…?”

성진은 약간 얼굴이 붉어진 채로 이마를 짚어 정신을 제대로 가누었다. 그리곤 비척비척 그녀의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깨어났군.”

형사는 그렇게 말하며 팔짱을 꼈고, 의사는 자꾸 뭔가를 얘기할 타이밍을 잡지 못해 차트만 만지작거리며 성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선영은 멍하니 두 눈을 뜬 채로 성진이 다가오는 걸 응시했다. 그다지 빠르다고는 할 수 없는 걸음걸이로 다가가던 성진. 그는 곧 이불 밖으로 나와있는 손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멈칫했다. 뭐라고 얘기해야 하나? 죽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니, 좀 날카롭게… 또 죽을 마음이 생겨? 그렇게 말하면 벽돌담마냥 굳어진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흔들 수 있을까? 그러나 고민의 시간은 짧았고, 그의 입에선 간단명료한 말이 건네어졌다.

“……괜찮나?”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앞서 교차했던 수많은 감정들에 비하면, 정작 그 중심이 되었던 그녀와는 너무나도 간결하고 평범한 상호작용. 하지만 성진은 그제서야 자신의 떨림이 멎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보진 않았지만 담당 형사도 한시름 놓았다는 긴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가 성진이 정황에 대해 설명할지 아니면 일단 마음이라도 가라앉혀야 할지 고심하며 침대 옆 의자에 앉으려던 참이었다.

“근데… 넌 누구야?”

그 특유의 건방진(?) 반말은 여전하다고 느끼면서 성진은 의자를 당긴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 다시 한번 머릿속에서 떠올랐던 것이다. 그의 초점 없는 시선과 선영의 담담한 시선이 허공에 교차했다. 담당 형사는 비쩍 마른 의사를 돌아보았고, 의사는 다가올 질문 공세에 대비하기라도 하듯 차트를 훑어보면서 안경을 매만지고 있었다.

기억상실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기질성 기억상실증과 기능성 기억상실증이 바로 그것이죠. 기질성 기억상실증은 외부적 충격이나 치매 등의 원인으로 발생하며, 특정한 기억들이 마구잡이로 끊어지는 경우입니다. 기능성 기억상실증은 심한 스트레스 혹은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을 때 발생하며 중요한 개인적 경험, 지식 등을 잊어버릴 수 있죠. 은선영 씨의 경우에는 전자의 가설이 유력하지만 후자의 경우도 복합적으로 발생… 했을 가능성 또한 높습니다.”

환자실 바깥 복도에서 의사는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일반인이 이해하기 쉬운 용어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것은 직업적 정신에 기반한 능숙한 대처였으며, 성진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별 말 없이 그 설명을 경청했다. 초조함을 감추기라도 하듯 병원 벽에 한 손을 뻗고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지만.

의사는 그 손끝을 흘끗 보더니 조금 더 낮아진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 현재는 그 복합적 발생이 맞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신체적으로는 기적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피해가 적지만, 정신적으로는 거의 최악에 가깝습니다. 기억의 한도가 어디서부터 끊어진 건지 가늠할 수가 없거든요. 일단 시간이 좀 더 지나봐야 명확하겠습니다만… 방금 전 그녀는 김성진 씨도 짐작했듯이 왜 죽으려고 했는지는 고사하고…….”

“예. 자신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성진은 의사가 입 밖으로 내뱉기 꺼려하는 부분을 얼른 집어서 자신이 대신 말했다. 그리고 의사는 그 부분을 얼른 넘기기 위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짐짓 긍정적인 부분을 언급하면서.

“일단 외부적 충격으로 발생한 기질적 기억상실 부분은 시간이 흐르면서 정상적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충격을 받았던 뇌가 정상적으로 회복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돌아오는 경우가 일반적이거든요. 물론 한동안은 예전에 비해서 빠진 점도 많을 겁니다만, 일상 생활에는 그리 지장 없을 겁니다.”

“예. 감사합니다….”

물어보고 확인할 게 많았지만 정리되지 않은 데다가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그런지 질문할 기력도 나지 않았다. 성진은 이쯤에서 의사를 자극하지 않고 치료에 전념하도록 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의사는 뭔가 더 할말이 있다는 눈치였고, 성진은 복잡한 심경을 최대한 감추면서 의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사는 보다 현실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치료비 수금에 관해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부분 말인가요?”

가족이 아닌 입장에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문제까지 건네어지는 것을 보며, 성진은 또다시 머리 한쪽이 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의사는 이번엔 의료 차트가 아닌 그녀의 신상 정보로 보이는 종이를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연이어서 짧게 나오는 한숨. 이래저래 그의 입장에서도 복잡하게 얽힌 상황을 반영하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가족 관계는 피폐하기 그지없더군요. 세련된 옷차림이나 외모와는 달리 그 배경이 말입니다…. 수많은 환자분들을 상대해온 저로서도 한번 낱낱이 파헤쳐보고 싶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원인 모를 화재에 휩싸여 죽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 아버지는 음독 자살…. 부인의 죽음에 비관하여 자살한 걸로 보입니다만 증거가 매우 미약… 경찰의 추측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는군요. 이게 은선영 씨가 열 여섯 살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신상 명세서를 한번 확인해보라고 건네주는 의사의 눈빛에는 그의 말처럼 원인이 크게 궁금한 모습은 아니었다. 대신 다른 의도가 숨어있었다. 성진은 의사의 의도를 짐작하고 있었지만 별 말 하지 않고 굳은 표정으로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의 표정은 더욱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듯 가라앉아갔다.

의사는 성진이 마음의 안정을 어느 정도 되찾는 시간과, 자신의 다른 진료 시간에 위배되지 않을 만큼의 합리적인 시간 교차점을 찾고는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녀는 치료비를 낼 여건이 되지 않습니다. 대학에 다녔던 게 신기할 정도더군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있기야 하겠지만 자살기도 직전에 이상한 루트로 다 써버린 모양입니다. 신상 명세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가까운 친척조차 하나 없습니다. 일단은 약 일주일 가량 보류 기간을 둡니다만… 그 후에도 수납이 불가능하면 기초수급대상자나 행려환자로 처리해서 비급여 치료로 넘어가는데…….”

여기서 꽤 오래 사이를 두고 조심스럽게 이어지는 말.

“보시다시피 저희는 사립병원이고 그런 곳에서의 비급여 치료란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굳이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만….”

의사는 다시금 예리해 뵈는 시선으로 안경 너머 성진을 훑어보았다. 이제 기껏해야 20대 초반인 청년이 이런 부문을 잘 이해할 수 있으려나? 하지만 성진은 여전히 시선을 의사가 아닌 신상 명세서로 향하고 있었음에도, 그의 말에 담긴 뜻의 포착점이 어딘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실상 의사의 말에 대한 대응의 준비도 해놓은 상태였다. 물론 거의 자포자기 심경이었지만.

“치료해 주세요.”

“예…?”

“다른 병원으로 전원시키거나 하지 말고 이곳에서 최신 장비로 최선을 다해주시길 부탁드려요. 흉터도 가급적 남지 않도록…. 급여 문제는 제가 알아서 댈 테니까.”

의사의 관심이 선영의 집안 내력에서 성진의 집안 내력으로 옮겨지는 순간이었다. 어디 부잣집 자제라도 되는 건가? 하지만 성진은 날카로운 그의 본성만큼이나 이런저런 온갖 감정을 숨길 줄 아는 남자였고,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의사는 잠시 그런 그를 마주보다가 시선을 안경 안으로 집어넣듯 고개를 숙이며 차트에 필기를 해놓았다.

이어서 성진에게 신상 명세서를 돌려받은 의사. 그는 그것을 차트 사이에 끼워 넣고는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알겠습니다’란 대답 이전에 뭐 하나 확인해볼 게 있다는 뉘앙스로 문득 물었다.

“그런데… 은선영 씨는 본인분과 어떤 관계죠?”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하다못해 대학의 친한 선후배 사이라도 되지 않을까 추측하던 의사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할말을 잊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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