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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라면 그렇지 않을 것이지만, 운이 좋아서인지 그런 장소가 꽤 조용한 분위기를 맞고 있었다. 곳곳에서 키보드 치는 소리가 적막하게 퍼질 정도로. 요 며칠간 그랬던 것처럼 가을의 화창한 햇살은 경찰서 문자락에도 비스듬히 비쳐지는 중이었다.
여대생의 추락 사건을 맡고 있는 중년의 담당 형사는 책상 앞에 앉아있는 20대 초반의 남대생을 지긋이 응시했다. 형사는 담배를 끊으려 노력하고 있음이 역력해 뵈는 사탕 몇 알을 씹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그 남대생의 태도에는 아무래도 끊었던 담배를 다시 태워올려야 할 유혹을 뿌리칠 수 없을 듯하다.
형사는 신경질적으로 조서를 훑어보고는 성진에게 다시 질문했다.
“이봐, 학생. 충격받은 심정이야 이해하지만 감정을 추스르고 답해주어야 우리도 다른 사건을 진행할 수 있다고. 하루에도 수십 건씩 해결해야 할 일이 쌓여가고 있어. 게다가 학생은 아직 사회 경험이 얼마 없을 테니 잘 모르겠지만 이거, 잘못하면 타살 사건으로 넘어갈 수도 있단 말이야. 그러면 지금의 네 입지는… 어떻게 될지 말 안 해도 알 수 있겠지?”
그러나 성진은 마치 못 들은 것처럼 몇 시간 전부터 일관했던 침묵을 그대로 유지했다. 담당 형사는 치솟는 짜증을 주체할 수 없어 옆에 놓인 조그만 통 속에서 손톱만한 사탕들을 다시 꺼내 씹어댔다. 그리고는 이미 몇 차례나 보았던 조서를 다시 넘기면서 한숨처럼 말했다.
“네 지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애인은 더더욱 아니고… 학과도 이름만 비슷하지 다른 부문. 단지 전날 몇 시간 만나고 당일 잠시 만났던 게 전부. 그 사이에 뭘 했는지까지도 바라지 않아. 은선영. 그녀가 뭐라고 말했고 어떤 심경을 지니고 있었는지 정도만이라도 말해주면 사건 진행에 아주 수월해진다고. 어이! 거기 이 형사. 여기 커피 한 잔만 뽑아다 줘. 아니, 일단 두 잔으로.”
말을 하지 않으니 뭘 마시리라곤 기대도 없었기에, 담당 형사는 그가 가져올 커피 개수를 번복하는 데 조금 주춤했다. 멍하니 앞쪽 책상을 응시하던 성진은 행정실을 나가는 이 형사란 사람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리곤 다시금 시선을 한 쪽으로 돌렸다. 어차피 세간에서 쌔고 쌘 우울증 정도로 진단하고 종결될 사건이 뻔하다…. 성진에겐 그런 자각도 함유돼있었다.
담당 형사는 앞의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이번에도 역시 지긋하지만 조금 강압적인 눈빛을 하고 성진을 응시했다. 성진 또한 그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뭐라 말할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기묘한 감각과 사고가 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실 형사 말마따나 거의 상관 없는 여자다. 그런 그녀가 이미 죽은 이상,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입지를 확고히 굳혀놔야, 후에 성가신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째서였을까. 화장실에서 그녀가 자신을 붙잡고 달라붙듯 안겨왔던 것, 매력적이고 아름다웠던 미소, 반면에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의미의 쓸쓸한 미소, 죽음 직전에 그녀에게도 스며들었던 공포, 그것에 물든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성진은 갑자기 내면의 무언가가 갈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심코 손을 가슴으로 올려 붙잡으려다 간신히 추스리곤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성진.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담당 형사는 체념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펜을 들었다.
“뭐… 김성진 군. 자네에게도 나름대로 심경이 복잡할 거라 생각은 하네. 사람이 죽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테니. 또 그 여자가 캠퍼스에서도 상당한 미인이란 얘기가 있었던 만큼 짧은 시간이라도 이런저런 썸씽이 있었을 거라 짐작은 해보지. 그러나 그건 그거고 현 시점에서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야. 자네는 아직 어려서 그런 현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을 테지만 말이야.”
성진은 고개를 들었다. 약간은 평온해진 얼굴이었고, 형사는 겨우 자신의 말이 조금이나마 먹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성진은 형사의 말에 동요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심경이 복잡할 것은 이해하지만… 짐작하지만… 그러나 현실을 바라보라… 이런 얘기들이 정말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건네어진 말인지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람 내면을 그렇게 쉽게 파악할 수 있나? 자신의 입장에서 보고 듣고 보편적인 사례들을 근거로 판단해서, 상대는 지금쯤 이런 심경일 것이다… 라고 결론짓는, 시리도록 아프고 고독한 세상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성진은 또다시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간신히 제어해야만 했다.
어쨌거나 형사는 그 틈을 이용해 뭐라도 건져보려는 듯 펜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는 큰 선심이라도 쓰는 양 느지막하게 말했다.
“그 여자가 했던 말 중 가장 기억나는 거 하나만 말해보게. 경우에 따라서는 그 말 하나에도 원인 규명이 될 수 있는 법이니까.”
성진은 자신의 적대적인 표정을 감추기라도 하듯 경찰서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기분과는 정반대로 포근하게까지 느껴질 만큼 무르익어가는 저녁 햇살. 그 불그스름한 하늘과 도심의 풍경 사이로 낙엽 몇 조각이 스멀스멀 떨어지고 있었다.
짧은 정적 후 그의 입이 꿈결 속을 더듬듯 스르르 열렸다.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경찰서에 들어선 지 수 시간이 흘러서야 입을 열어 나지막하게 한마디 내뱉은 성진. 그런 그의 모습에 담당 형사는 어떠한 큰 목적마저 달성했다는 기분을 받았고, 연이어 다른 서글픔을 맛봐야 했다. 물론 그 말에 담긴 내용 때문이다. 그래서 중년의 형사는 재차 확인하듯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예.”
“다른 말은 기억나는 것 없나?”
“없습니다….”
형사는 중요 참고인에게서 겨우 얻어낸 이 추상적인 대답이 도움이 되는지에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곧 별 영양가 있는 정보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또다시 가라앉는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조서에다가 참고 삼아 필기를 해두곤 있었으나 사건 해결에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는 판단이 역력한 펜놀림이었다. 거기에 공무에 쌓인 스트레스가 그의 필기를 거의 휘갈기다시피 남겨놓게 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라… 어디서 보면 안 될 것이라도 봐버린 건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해버렸다는 의민가.”
자신이 만들어놓고도 참 못 만들었다라고 여기는 작품을 감상하는 표정으로 조서에 적어놓은 필기를 되짚어보는 형사. ‘바깥으로 향할 때 어찌어찌 했다’라는, 이미 일어난 과거의 의미로 해석해버리던 그의 눈이 슬쩍 성진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성진은 다시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형사는 결국 오늘은 이만 포기해야 하나 라는 생각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 즈음 커피를 뽑으러 나갔던 이 형사가 돌아왔다.
“음, 여기다 두게.”
고개도 돌리지 않고 손가락으로 대충 책상 옆을 가리키는 담당 형사. 그러나 익숙하게 미리 그런 말을 넘겨짚을 정도로 사소하고 당연한 행동 속에서도 불합리함이 발생하고 있었다. 담당 형사는 그걸 느끼고는 고개를 돌려 제대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형사의 손에는 커피가 들려 있지 않았다. 바쁜 공무 중에 커피 심부름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이 형사의 태도에 화를 낸다 해도, 지나치다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시피 할 상황이다. 하지만 담당 형사는 그럴 권리를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화를 내기보단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고 있나, 이 형사?”
“저… 그 사건 말입니다.”
“이게 왜?”
성진도 담당 형사와 약속이나 한 듯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들어올려졌다. 그렇게 두 명은 우물쭈물하는 이 형사를 바라보았고, 이 형사는 그들의 부담스러운 관심을 얼른 떨쳐버리기라도 하려는 양 재빨리 말했다.
“그 여대생… 방금 근처의 시르 병원에서 연락이 왔는데, 살아있답니다.”
관심을 떨쳐버리려고 얼른 답한 이 형사에겐 조금 안타까운 일이 되겠지만, 그들이 이 형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경악을 담아 증폭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