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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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쌀쌀해지는 초가을. 성진은 안쪽의 옷만 갈아입은 채 어제 그 가죽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간 그는 재킷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넣은 채로 별관의 옥상 문을 밀어젖혔다. 약속 시간에 거의 정확히 도착한 만큼 예상대로 옥상에 다른 누구는 없었고, 그녀 혼자만이 난간에 손을 뻗은 채로 먼 곳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분명 문 여는 소리가 들렸을 터인데, 성진이 몇 걸음 다가가자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보는 선영. 오늘의 그녀는 밝은 회색빛의 후드티와 연한 베이지색 핫팬츠를 입고 운동화 차림을 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며 그녀의 목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칼이 윤기를 발하며 휘날렸고, 성진은 살포시 미소짓는 그녀를 보며 또다시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시간 약속 잘 지키네.”

그렇게 첫마디를 꺼낸 그녀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선 성진에게 천천히 걸어오며 생긋 웃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연인 같다. 그치?”

“설명이나 해봐.”

성진은 똑바로 선 채 딱딱하게 말했고, 선영은 입술을 샐쭉거리며 시선을 조금 딴 데로 두었다. 성진은 그녀의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보며 후드티 모자라도 쓰는 게 어떻겠냐고 말해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대로 침묵은 이어졌고, 선영은 몸을 돌려 아까 섰던 그 난간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마치 지나가는 어투로 한마디씩 내뱉는 그녀.

“어제와는 딴판이네. 여자의 속내를 알고 싶으면 부드럽게 대해야 하는 것 아냐?”

“알려줄 생각이 없다면 어떻게 말해도 알려주지 않겠지.”

그게 네 타입이잖아? 라고 묻는 듯한 뉘앙스. 그런 그의 말을 등 뒤로 들으며 선영은 역시 꽤 날카롭긴 한 녀석이라 마음속으로 인정해야 했다. 두 팔로 가슴 밑을 끌어안듯 교차시킨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성진을 돌아보았다. 옥상 난간에 등을 살며시 기댄 채로.

“애인 있어?”

“없어.”

“만나는 여자는?”

“가끔씩 몇 있긴 하지만, 왜?”

선영은 또다시 부드러운 시선을 그에게 던지며 말했다.

“나랑 사귈래?”

성진은 잠시 이것이 그녀의 행동에 대한 답을 얻는 조건인지 되짚어보았다. 하지만 곧 머리아프게 그것을 곱씹어볼 필요는 없겠다 판단하곤 단도직입적으로 반문했다.

“외로워서 그랬나?”

선영은 고개를 툭 숙이고는 킥킥 하고 웃었다. 바람이 또다시 한차례 불며 그녀의 얼굴을 거의 가리다시피 머리칼을 휘날렸고, 성진은 어쩐지 B급 영화에 나오는 대사를 던져버린 기분을 느껴야 했다. 선영은 다시 머리칼을 바로 쓸어 넘기고는 그를 마주보았다.

“그랬다면 사귀어 줄래?”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 대답은 패스야.”

선영은 슬픈 눈을 하고는 시선을 떨구었다.

“그래도 사귀어줘.”

성진은 꿈틀했다.

“왜 그래야 하지?”

“어제 했던 말 기억나? 사실은 그 말이 진짜였어.”

성진은 잠시 멀지 않은 과거에 있었던 대화를 되짚어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툭 내뱉었다.

“뭐… 뭐야. 설마 그 옆집 오빠에 관한 얘기?”

이젠 아예 배를 잡고 웃어버리는 선영. 성진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반쯤 돌려 옥상 너머의 풍경을 응시하며 한숨을 쉬었다. 한심한 듯 한 손을 허리에 얹은 채로. 하지만 다그치거나 성급하게 내딛지 않았고, 선영은 그런 성진의 모습에게는 후한 점수를 주기로 했다.

잠시 후, 조금 심하게 웃느라 찔끔거리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치며 선영은 틀린 답을 콕콕 집어주듯이 말했다.

“징그럽도록 지루한 일상을 탈피해보는 일종의 유흥거리라 했잖아.”

“어… 그게 왜?”

한심해졌던 기분을 겨우 추스르고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성진. 그리고 그는 급작스럽게 찾아온 정적에 다시 고개를 바로 하고 그녀를 마주보아야 했다. 동시에 묘한 기분을 받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 기분뿐만이 아니었다. 더불어서 전혀 상관 없는 ‘그녀가 내 핸드폰 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나’ 따위의 지나간 질문에 대한 대답. 그것을 이상하게도 그녀의 차분하다시피까지 한 눈동자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선영이 말한 것은 순수한 의미 그 자체였던 것이다. 너무도 순수했기에 그 날카로움이 성진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몰랐던 답을 알아채가는 증거마냥 커져가는 성진의 눈. 그런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선영.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가슴 떨릴 듯한 미모와 미소로 그에게 유혹하듯 차분하게 말을 건네었다.

“나랑 사귀어. 그리고 같이 죽어줘.”

물론 ‘같이 죽을 때까지 사랑하자’와 같은 보통의(?) 의미가 아닌, 여기서 바로 죽는다는 의미였고 성진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역시 보통 남자가 예쁜 여자에게서 고백을 받았을 때와는 다른 이유로 할말을 잊고 말았다.

너… 그거 거의 한평생 사귄 연인끼리도 잘 안 하는 대사인 거 알지?”

성진은 신음처럼 말했다. 하지만 정작 질문을 던진 선영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마치 1더하기 1이 2가 아니라고 지적하는 정도의 중압감 정도로.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 라고 말하는 연인은 세상에 꽤 많아. 그 유대감이 형성하는 연결고리는 놀라울 정도지.”

“핀트를 제대로 맞춰. 대부분은 자신의 속내를 표현하는 수단 정도에 그쳐. 그리고 일부가 진심이다 하더라도 상대방에게 같이 죽어주라고 끌고 가진 않아. 상대 대신 죽어줄 수 있다고 할지언정.”

선영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살포시 꺾어 보였다.

“꽤 똑똑하네.”

그러나 정작 칭찬을 받는 성진은 전혀 기쁜 표정이 아니다. 그는 소리없이 이를 아득 물고 있었다. 대화는 정상이 아니었지만 몇 번이고 미소 짓는 그녀의 외모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평범하게 행동했다면 캠퍼스에서 수많은 남자들의 고백을 받을 법하건만… 도대체 이 여자 정체가 뭐지?

잠시 후 선영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럼 할 수 없지. 혼자 죽어야겠네.”

“죽지 마.”

“난간에서 뛰어내릴 거야. 25미터쯤 되니까 즉사하겠지.”

“그만둬.”

“흐음? 진지하네. 보통 이럴 땐 ‘죽으려면 죽어. 난 강의나 들어갈 거야’ 라며 돌아서는 거야. 아니면 ‘죽든지 말든지’도 꽤 괜찮은 대사지.”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선영은 눈을 감고 고개를 약간 숙여 좌우로 흔들었다. 쓸데없는 질문이라는 걸 일깨우기라도 하는 듯.

“말했잖아.”

“심심해서 죽는다는 말로밖에 안 들려. 초등학생도 그런 말은 납득하지 않을 거야.”

“더 알고 싶어?”

“모든 걸.”

“내가 왜 아무 상관도 없는 너한테 알려줘야 하지?”

“그럼 어쩔까?”

“원점으로 돌아왔군. 나랑 같이 죽는다면 동반자로서 알려줄게.”

성진은 알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아올랐다. 차라리 내 자신이 위협받고 있다면 빠져나간다는 일관되고 뚜렷한 목적이 생긴다. 그럼 행동해야 할 당위성도 아주 명확해진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눈앞의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상대에게 요구한다는 아주 아이러니컬한 경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겐 못하겠지? 그럼 이만 바이바이야.”

난간 위로 휙 뛰어오르듯 올라서는 선영. 동시에 몇 걸음 떨어진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확연하게 알 수 있을 정도로 달라진 키 차이. 성진은 그 모습에 머리 한 구석의 스위치가 올라가듯 반사적으로 소리질렀다. 목이 터져라.

“그만두라고!”

그건 차라리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눈앞의 그녀가, 잘 모르는 그녀라곤 해도, 미쳐버린 그녀라곤 해도, 죽는 모습 따윈 보고 싶지 않았다. 성진은 기가 드세고 날카롭고 약간은 남달리 예리하기까지 한 남자였지만 그 근본은 정상인의 뿌리가 돋아있었기에. 하지만 선영은 그렇지 않았다. 미쳤다고 한다면 그 한도가 알 수 없을 정도의 깊이까지 파고들어버린, 성진과는 같은 사람이지만 동시에 다른 존재.

성진은 파르르 몸을 떨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어느 새 그는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비척비척 그녀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그에 반해 정작 당사자는 평온하기 그지 없는 얼굴이다. 단지 약간의 NG를 낸 배우의 모습을 발견한 관객 같은 표정으로 성진을 바라보고 있을 뿐.

잠시 후, 선영은 난간에서 도로 내려왔다. 툭 하고 아주 가볍게.

“보기보다 순진하네.”

전혀 죽음 가까이 다가간 기색을 찾을 수 없을 어투였다. 두 팔을 뒤로 돌려 모아쥐곤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성진을 응시하며 천천히 다가서는 선영. 그에 반해 성진은 몸을 조금 굽힌 채 초점 없는 눈으로 턱을 덜덜 떨고 있었다. 두 손은 재킷 주머니에서 빠져 나와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역시 손가락들도 서로 공명하듯 떨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성진 쪽이 죽음의 문턱 가까이 간 줄로 믿어 의심치 않을 모습.

“조금이라도 약았다면 일단 같이 죽자고 상대의 제안을 받아들인 후, 시간을 끌며 이유를 알아내거나 막을 방법을 생각해보는 거야. 물론 난 여자고 넌 남자니까 힘으로 제압할 기회를 엿보는 것도 좋겠지.”

“그렇게 말하는 정작 너는, 통하지 않을 것이잖아.”

약간 쉰 목소리를 내는 성진을 보며, 선영의 표정은 조금 쓸쓸한 미소로 변했다.

“그래, 그렇지….”

그와의 거리가 약 1미터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선영은 멈춰서곤 고개를 돌려 옥상 위 하늘을 응시했다.

“내가 그래서 오늘 너한테 연락한 것일지도 몰라. 그 잠시의 만남으로도 내 성격과, 타입과, 성향을 상당 수준 꿰뚫었으니. 앞서서 내가 너한테 사귀어달라고 했지? 넌 잘 모르겠지만… 으응, 진심도 상당 부분 섞여 있었어. 너는 꽤 괜찮은 남자고, 그래서 내 심경을 이해하고 내가 정상인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그런 남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사귀어 줄게!”

성진은 선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망설임 없이 외치듯 소리쳤다. 연이어서 나오는 그의 목소리.

“사귀어 주겠어! 널 받아들이겠어. 널 이해하고… 그러니까 죽지 마….”

필사적으로 그녀의 마음을 돌릴 단어를 조합하며 말을 건네었지만, 시선을 하늘로 고정해 있는 선영의 미소는 점점 더 쓸쓸해져갈 뿐이었다. 그것을 보며 성진은 이것이 성사될 수는 없는 바람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힘이 닿는 데까진 발악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눈앞의 그녀를 제지할 수 있는 건… 나 자신밖에 없으니까….

성진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영은 다시금 몸을 돌려 난간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성진은 움찔했으나 그녀는 보란 듯이 가슴 부분까지 올라오는 난간에 등을 기대고는 다리를 교차시켜 섰다. 그리고 문득 건네어지는 물음.

“핸드폰 번호… 어떻게 알아냈는지 궁금하지 않아?”

성진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의문점이 되새겨짐을 느꼈지만, 이제 와서 그 따위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단은 시간이라도 벌어볼 양으로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선 스스로도 느껴지지 않는 무의식적인 끄덕임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자 선영은 양 팔을 들어올렸다. 마치 손가락 사이로 바람을 느끼기라도 하듯.

“입 아프게 설명하기도 귀찮을 정도로 내 수많은 암적 전적이자 특기 중 하나가 해커 능력이야. 네 이름 하나와 네 학과 하나만 알아도 학교 전산망에 접속해서 신상을 파헤치는 것 정돈 아무것도 아니지… 70만원짜리 노트북 하나와 인터넷만 연결되면, 반나절 만에 이 도심지 전산망을 80% 마비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실제로 그랬던 적도 몇 번 있고, 지금은 뒤처리가 귀찮아서 그냥 안 하고 있지만….”

마치 바로 즉석에서 지어내는 듯 건성건성 말하고 있었지만 그건 지어낸 얘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성진은 그 얘기들이 모두 진실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야말로 엄청난 능력을 스스로의 입으로 얘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영의 목소리는 어째선지 더욱 더 차분하고 가라앉아갔다.

“난 천재였어.”

누군가가 자신을 가리키며 ‘난 바보였어’라고 푸념하듯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어조.

“그거 알아? 사람들은 누구나 천재가 되고 싶어하지. 현재보다 더 많은, 더 월등한 지식을 갈망하는 건 인간으로서 추구할 수밖에 없는 거야. 더 좋은 직장을 갖고 더 좋은 사람을 사귀고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날 때부터 천재였음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지. 그런데 말야. 정말 천재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 그 근본부터 회의감이 들어. 더 좋은 직장과 사람과 나은 생활이 가져다 주는 것에 매력을 느끼지 못해.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와 같은 가끔씩 찾아드는 삶의 회의감이 아니라, 지겹고 지겹고 지겹고 지겹고 지겨울 정도로 떨어지지 않는,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붙잡고 휘감아 오는.”

성진은 어느 새 떨리던 몸을 멈추고 석상처럼 굳어서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앞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선영.

“그렇게 머리로 찾아 드는 그 중압감을, 가슴이 견디지 못하는 거야. 천재도 심장은 보통 사람이니까. 평범한 학생과 성적을 연기하며, 적당히 대학교 생활 2년 반을 버티던 나는 이번 학기 들어서기 전부터 고비였어. 방학 때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내내 괴로워했거든. 내 정신을 내가 제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살아가야 할 의미를 찾지 못한 거야. 그래서…… 앞서도 말했지. 이 징그럽도록 지루한 일상 속에 찾아 드는 내 내면의 정신 공격을 떨쳐버리기 위해, 상식 밖의 행동으로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짜릿한 쾌감으로 잠시나마….”

선영은 자신의 후드티 밖으로 튀어나온 봉긋한 젖가슴을 감싸 쥐었다.

“심장이 쉴 틈을 주는 것.”

성진은 그제서야 어제 화장실 섹스에서 선영이 정신 못차리는 자신을 붙잡고, 그녀 자신도 그렇게 내던지듯 흥분했는지를 깨달을 것 같았다. 도망치려 그랬나…. 신이 내린 천재적 뇌를 감당하지 못해 몸부림치던…….

“해커를 포함한 각종 범죄, 비상식적 행동, 섹스… 이젠 그런 것들도 피곤해…. 잠시 동안은 즐거운 감정이 생길 진 몰라도 그 순간은 금방 지나가. 그리고 더 견디기 어려운 허무감만 쌓여. 그런 경험을 되풀이하는 데 이젠 지쳤어.”

선영은 팔을 내렸지만 한쪽 팔, 정확히 말하자면 왼쪽 팔은 여전히 허공에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 팔에 달린 손바닥을 세워서 뭔가를 밀어보는 시늉을 하는 그녀.

“이젠 이 세계란 방을 나설 차례. 심장이 인지하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로… 그래,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야.”

“나를 사랑해!”

성진은 또다시 목이 터져라 외쳤다.

“네가 말한 것을 살아갈 의지로 바꾸어봐! 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것과 싸워! 내가 도와주고… 이해해주겠어!”

선영의 시선이 성진의 눈과 마주쳤다. 쓸쓸한 미소를 간직한 채로. 성진은 어째선지 조금 전까지 보았던 그녀의 부드럽고 생생한 미소를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다. 온 힘을 다해 머리를 짜내고 그녀를 막아보려 외쳐대고 있었으나 그의 소리는 그녀에게 닿지 못하고 있었다.

선영은 픽 하고 웃었다.

“나는 내 나이보다도 많은 남자를 사귀어봤어. 그들은 하나같이 다루기 어려운 여자라며 진저리를 내곤 달아나듯 헤어졌지. 남자들은 그렇잖아? 자기 말 잘 듣고, 착하고, 이쁘면 그만인 이상형. 설령 고민이 있다 해도 이해할 수 있는 선상에서 상대를 위하는 척 하고는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고 되새기는 자기만족. 그렇지 않으면 자기 타입이 아니라고 내쳐야지 어쩌겠어?”

“난 솔직히 말해서 네 모든 걸 이해할 순 없어. 그렇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러나 네가 사귀었던 다른 남자들보다도 더 깊게 널 이해해보려 노력하겠어. 이런 내 시도를… 받아들여주지 않겠어? 너도… 그걸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기에 내게 연락했던 것 아닌가?”

성진을 바라보는 선영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리고 성진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그리고 그런 생각이 피어나는 순간, 성진은 앞으로 도약하듯 내디뎌 선영이 있던 자리로 뛰어가야 했다. ‘있던 자리’인 과거형이다. 선영은 물 흐르듯 스르르, 하지만 순식간에 난간으로 다시 뛰어올라 - 이번엔 엉덩이를 걸치고 - 다리의 위치를 옥상 안쪽에서 바깥으로 전환하며 떨어져내렸다.

그리고 성진은 그 짧은 틈을 파고들어 난간을 끌어안듯 몸을 걸치고는 손을 뻗었다. 신경질적일 만큼 고도의 집중과 정확함을 온 몸에 열화와 같이 부여한 그는, 기적적으로 선영의 한쪽 팔목을 붙잡을 수 있었다. 다행히도 난간의 폭은 꽤 넓었고, 성진은 자신의 다른 쪽 손과 다리로 난간 안쪽을 지탱해서 같이 떨어지는 걸 겨우 방지할 수 있었다. 어깨가 빠져나갈 듯한 느낌과 고통이 온 몸에 발광하듯 호소해대고 있었으나, 성진은 모든 집중을 허공에 위태롭게 매달려있는 선영으로 향했다.

바람이 불며 선영의 머리칼과 후드티 모자를 한쪽으로 쓸어내고 있었다. 말할 여력조차 없던 그는 초점없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선영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 곳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부여된 하나의 감정을 그녀란 존재에게서도 찾아낼 수 있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 살려달라고 외치진 않았지만 그녀는 죽음이란 생에 마지막 경험을 목전에 둔 상태였다.

“……잡… 아…… 내 팔목… 을 마주 잡으라고……. 끌어… 올려야…….”

“그냥 놔… 동정하지 마…… 내버려 줘….”

“그렇게 놔둘 것 같…….”

건물 아래쪽에서 이쪽의 상황을 발견한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고 있었다. 혹은 멀찍이서 불구경하듯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는 학생들, 연인들, 선생들…. 이런 젠장할! 그렇게 보고 있지만 말고 아무나 불러오기라도 하라고…! 그러나 직접적으로 나서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기껏해야 핸드폰으로 경찰에 신고하는 듯한 모습만 보였을 뿐이다. 한 초 한 초가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성진은 내뻗은 팔을 당길 엄두조차 못 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살겠다는 의지를 발휘하고 있지 않은 게 가장 힘들게 하고 있었다. 죽음이 두렵긴 해도 자신의 선택을 번복하지는 않겠다는 각오….

체감상으로 수십, 수백 초가 한량없이 흐른다고 느껴질 즈음. 결국 선영은 추락하는 천사처럼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더 버틸 수 없었던 성진의 손이 ‘놓았다’가 아닌 ‘미끄러짐’으로 그녀의 손목을 놓쳤던 것이다. 그리고 성진은 그 이후의 짧지만 간과할 수 없는 치명적인 모습 하나하나를 전부 시선 속에 담아두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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