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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헉…. 허억….”
“후… 후우… 응….”
학생회관의 구석진 여자화장실에선 여전히 달뜬 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몇 시인진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지만 성진은 체감만으로도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흘러갔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도와주기라도 하듯 화장실 바닥에 앉아있던 선영은 역시 옆에서 문에 기대어 주저앉아있는 성진을 바라보며 문득 물었다.
“그런데 너 수업 없어?”
“있어.”
성진은 체념하듯 말하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봤다. 오후 3시 42분. 두 시간 가깝게 그녀와 여기서 정사를 벌였던 것이다. 첫 사정 이후 몇 번이나 그녀와 다시 끌어안고 키스하고 만지고 박아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변기 뚜껑 위에서 박아대기도 하고 나중에는 아예 그 좁은 화장실 바닥에서 거의 눕다시피 진행하기도 했다.
성진은 어떻게 됐냐고 동혁이 보낸 문자 메시지들에 답변할 생각도 못한 채 다시 핸드폰을 닫았다. 그리곤 본래 있던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땀으로 얼룩져 날카롭게 뭉쳐진 앞머리칼을 정리하듯 매만지던 그는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선영의 시선을 느꼈다.
오늘 처음 만나자마자 마치 오래 사귄 남녀처럼 능숙하게, 행위를 진행하는 데 있어 거침없이 달라붙듯 안겨오던 그녀는 키득 웃으며 물어봤다. 뭔가 재미있는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너… 몇 번을 사정했는지 기억 나?”
“세 번… 아니, 네 번인가…?”
“다섯 번이야. 뭐… 다른 남자들에 비해 꽤 좋았던 것만은 인정하지.”
성진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기라도 하듯 고개를 조금 숙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렇게 다짜고짜 섹스하자고 해서 캠퍼스에서 끌어들인 남자들 중 말인가?”
“으응? 아니, 아니. 그런 방식으로 해서 다가온 녀석은 네가 처음이야. 뭐 언젠가는 호기심으로라도 한번 접근할 녀석이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너 꽤나 맘에 든다는 듯 생긋 웃으며 바라보는 선영의 모습에, 성진은 더욱 더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칫….’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버릇(?)을 고쳐주려고 다가갔는데 결과가 이러면 어쩌자는 건가? 하지만 성진은 휴지조각이 된 자신의 존심을 뒤로 한 채 그녀에게 물어봐야 할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쨌든 간에 휴지조각이 됐다 하더라도 그는 특유의 날카로움을 간직한 남자였고, 그것은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정사 속에서도 범상치 않은 그녀의 속내를 느낄 수 있었다.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행위 하나하나에서 느껴진 알 수 없는 기운 같은 걸까?
선영은 자신을 물끄러미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 성진을 보며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그리고는 풀어 해쳐진 앞가슴을 가릴 생각도 않은 채, 킥 하고 다시금 매력적인 미소를 건넸다.
“왜, 한 번 더 하려고?”
“…….”
“흐음, 오늘은 지쳤나? 그럼 연락처라도 남겨주고 갈까?”
성진은 어차피 강의 들어가긴 다 틀렸다고 생각하곤 더 편안히 문에 기대어 앉은 자세를 취했다. 그리곤 벽에 기대 앉은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왜 그랬지…?”
“뭐가?”
“네가 더 잘 알 텐데.”
“캠퍼스에서 아무하고나 섹스하자고 한 것 말야? 신경 꺼. 일종의 유흥거리니까. 징그럽도록 지루한 일상을 탈피해보는 나름대로의 방식일 뿐이야.”
성진은 아직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것처럼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노려보는 쪽이겠지만.
그녀 말마따나 ‘나름대로의 일상 탈피 방식’이란 걸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여자인 만큼 선영에게 그런 시선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일반적인 노려봄에서 무섭다거나 두려움을 느낄 계제 따윈 그녀에겐 없었다. 하지만 선영을 쉽사리 무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건 그것이 무얼 추궁하거나 따지는 듯한 노려봄이 아니었다는 데 있었단 것이다.
선영은 무릎 위에 팔을 얹고는 턱을 괴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성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짐짓 부드러운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신경 쓰여? 그럼 안 할게. 앞으로 네가 나랑 놀아준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지. 나도 여자 경험이 적은 건 아니거든. 내가 삽입할 때 네 몸짓 하나하나에서 그런 게 느껴졌어. 물론 거의 이끌려가다시피 한 건 내 쪽이긴 했지만… 뭐랄까…. 자신을 내던진다고 해야 하나?”
선영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성진은 여전히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그런 그녀를 마주보면서 말했다. 앞서 질문했던 내용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똑같은 어조로.
“왜 그랬지?”
성진을 바라보는 선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성진은 그녀가 자신을 쏘아보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단조로운 눈빛으로 마주보았다. 어느 정도 원기도 회복된 듯 성진과 선영 둘 다 숨소리도 거의 내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몇 초, 몇 분, 체감상으로는 몇 십분이 흘러간다고 느껴질 정도지만 역시 쉽사리 그 정적을 깨뜨릴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잠시 후, 고개를 툭 떨구는 선영. 그리고 나지막하게 새어 나오는 목소리.
“…있지. 난 말야, 열 두 살 때부터 좋아하는 오빠가 있었어.”
성진은 머리카락 속에 감추어진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미약하지만 조금씩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그것은 조용하기 그지 없는 이 구석진 학생회관 화장실에선 더할 나위 없이 잘 들렸다. 끊일 듯 말 듯 이어지는 선영의 음성.
“초등학교 5학년이라고. 이해가 가? 이해하기 어려울 거야. 사랑하는 감정이 그때부터 있었다곤 해도 치기 어린 감정으로 치부할만한 시절이지. 주변 사람은 물론이고 처음엔 그 당사자도 내 마음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했어. 음… 그 당사자란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별 것 아니야. 한 담을 건너서 있는 옆집 오빠였어. 중학교 1학년이었지. 맨날 학교 체육복이나 입고 들락날락하는 센스 없는 오빠였지만 그랬기에 어쩐지 더 편하게, 허물없이 있을 수 있었을 거야. 집에 거의 없다시피 한 우리 부모님 대신 나와 같이 숙제하고 나와 같이 놀아준 건… 글쎄, 그저 동네 친구로서였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가족같이 지낼 수 있던 오빠였어. 그 어린 나이에도 남들에게 쉽사리 마음을 열 수 없었던 내가 처음으로 터놓고 즐겁게 얘기할 수 있던 존재였다고.”
성진은 가만히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선영은 누구한테 말하는지 모를 정도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 자신에게 중얼거린다고 봐야 할 정도로 되뇌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오빠는 컴퓨터 게임을 좋아했어. 지금 생각해보면야 정말 바보 같지만, 나는 그 오빠 덕분에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든지 격투 게임 등을 내 방 컴퓨터에다가 깔아놓았다니까. 나는 그 오빠가 즐거워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존재하는 의미가 느껴질 정도였거든. 이해할 수 있겠어? 그 나이에,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에게 비춰보며 스스로의 존재감을 찾아간다는 정체성 확립을. 어려울 거야. 하지만 난 그걸 알았어. 지금도 부정할 수 없고, 그랬기에 아마 컴퓨터와 비슷한 전공인 디지털 출판 학과에 지원했는지도 몰라. 어쨌거나… 그 별 거 아닌 것 같은 가볍게 같이 있는 시간들도 계속해서 흘러갔고, 나는 그 오빠를 사랑했고… 그 오빠도 언제부턴가 그 감정을 느꼈을 거야. 으음, 아니. 느꼈어. 내가 6학년으로 올라가는 날, 같은 중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면 좋겠다며 내 입술에 살짝 키스해 주었으니까. 제 딴에는 기원의 키스라곤 하지만 난 아직도 그 느낌을 잊을 수 없어. 그런데… 그런데 말야. 그런 키스를 받은 지 불과 며칠도 되지 않아 그 오빠는…….”
“그거 거짓말이지?”
한창 감정을 잡아서 클라이막스까지 올라간 선영에겐 약간 애처로울 법하기까지 한 절단이었지만, 성진은 가차없었다. 물론 어떻게 본다면 그런 부분까지 참고 들어준 성진의 입장에서는 인내력에 있어서 칭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선영은 찔끔거리던 눈물을 옆으로 훔쳐버리곤 혀를 살짝 빼들어 헤헤 웃어버렸다. 하지만 곧바로 꽤나 감탄한 표정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고 내 스스로도 의심을 품지 않고 얘기하기에… 이것에 넘어간 남자도 꽤 있던데.”
“나를 다른 녀석들과 같다고 보면 곤란하다니깐.”
성진은 점심 때 동혁에게 말했던 자부심 비슷한 말을 그녀에게도 건넸다. 그 특유의 날카로운 미소를 히죽 지으면서. 그러나 선영은 늘어졌던 머리칼을 귀 뒤로 살짝 넘기면서 생긋 웃었다.
“그래, 그 다르신 분도 결국은 나랑 다섯 번이나 사정하도록 했던 것은 별 차이 없긴 하지만.”
성진은 또다시 가슴 한 켠을 푹 찔러대는 그녀의 말에 미소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몰래 이를 꾹 물었다. 역시 말싸움으론 당할 수 없어…. 그렇게 생각한 성진은 논점을 다시금 일치시키기로 했다.
“아아… 말 돌리진 말고.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 봐. 캠퍼스에서 왜 그렇게 들이대고 다녔는지를.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리 대담해도 그렇게 행동하진 않아. 더군다나 너같이 예쁜 여자가….”
“말할 의무는 없어. 다음에 또 보자고.”
그리 짧다고 볼 수 없는, 열정적으로 정사를 나누었던 당사자답지 않게 그녀의 말투와 일어섬은 가벼웠다. 바람 같은 여자. 하지만 휙 나가버릴 것 같던 선영의 기세도 잠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성진이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 있던 곳이 바로 그 화장실 칸막이 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성진은 일어선 선영을 올려다보며 손에 쥐어진 무언가를 들어올렸다. 그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띠어진다.
“거기 다 보인다. 팬티도 안 입고 나가려 하냐? 그 치마, 꽤 짧다고. 안 더러워지게 내가 주머니에 잘 보관해 두었으니까 다시 입고 나가.”
“너 가져. 난 동아리방에 두고 온 가방 속에 새 팬티 있으니까.”
선물이라도 되는 양 생긋 웃어 보이는 그녀. 하지만 성진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를 올려다보는 시선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너 정말 왜 그래…? 나 니 애인 아니야. 오늘 처음 본 사람한테 입던 팬티를 준다고?”
“귀찮게 하지 말고 비켜.”
“넌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 왜 그렇게 아무한테나 나대고 다니는 건지….”
“꺼지라고 했잖아!”
성진은 깜짝 놀랐다. 귀를 후벼팔 듯한 째지는 선영의 외침소리가 울려퍼졌기 때문이었다. 잠시 할 말을 잊은 채 멍청히 그녀를 올려다보던 성진은 문득 칸막이 바깥에 누가 와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외침소리와 함께 몰려온 정적 속에서 인기척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핀치에 몰린 남녀의 사랑 문제 정도로 치부할 테니….
선영도 바깥 인기척을 눈치챘는지 잠시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그러다가 그 누군가가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서야 한 손을 허리에 얹으며 한숨을 폭 쉬었다. 그렇게, 성진을 내려다보며 - 성진은 계속 그녀의 팬티도 입지 않은 치마 속을 올려다보는 게 뭣해서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지만 - 문득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남자란 다 똑같아.”
그 말은 마치 성진에게 ‘너도 예외는 아니야’라고 지적하는 뉘앙스를 품고 있었다. 선영은 눈을 가늘게 뜨곤 그를 내려다보았다.
“호기심과 성욕으로 접근해서 일단 한바탕 가지고 놀다가, 자기 만족 다 채워지면 그제서야 걱정하는 척, 위로하는 척 말을 건네지. 여유가 생긴 거겠지? 그 전에는 왜 그러고 다니는가 물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성진은 고개를 들지 않은 상태 그대로 꿈틀했다. 하지만 선영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또박또박하게 한마디한마디 그를 향한 공격을 계속했다.
“내 요구대로 정사를 나누지 않았으면 마음을 열지 않았을 것이라는 같잖은 변명은 집어치워. 애초에 그런 목적이었다면 동정 어린 정사였을 테고 그럼 피차 비참해지는 꼴이 될 거니까. 뭐 네 스스로 말했듯 나한테 이끌려가다시피 했다고 하니까 그런 변명도 신빙성이 없겠지만…. 서로의 순수한 목적을 달성했다 치고 주제 넘게 그 이상 나대지마. 알겠어?”
그렇게 말을 끝맺은 선영은 그를 밀어내고 강제로 바깥으로 나가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번엔 그녀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성진의 몸이 잠시 비척이더니 문에서 등을 떼고 나갈 만큼의 공간을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쉽사리 길을 열지 않을 것이라 각오까지 했던 선영에게 있어선 의아할 정도였다. 물론 성진은 그녀를 여전히 노려보고 있었지만 어째선지 그 눈동자에는 쓸쓸함이 비쳐져 있었다.
선영은 잠시 그런 그를 마주 내려다보다가 칸막이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성진은 뒤돌아보지 않고 짧게 한마디 했다.
“역시… 알려줄 수는 없겠어?”
선영이 그 말에 반응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세면대에서 간단히 씻고 화장실 출입문을 열어 완전히 나갈 때까지도, 성진은 그 자리에 못박힌 듯 가만히 주저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