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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시간이 끝나가는 느지막한 오후. 성진은 걸치고 있는 어두운 은회색빛 가죽 재킷에 두 손을 찔러 넣고는 캠퍼스를 어슬렁거렸다. 동혁의 제보(?)로 예의 그 여자가 자주 지나다닌다는 길가를 거니는 중이었다. 멀리 식당 2층 발코니에서 동혁이 플라스틱 컵에 담긴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이쪽을 관찰하고 있었다. 물론 너무 티나지 않게 다른 주변 풍경도 돌아보면서.
성진은 예정대로 그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았고 별 두려움 같은 것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3시쯤에 강의가 하나 있었기에 성진은 그 여자가 되도록 빨리 나타나주었으면 하는 바람까지 있었다. 기껏 해봐야 상대는 20대 초반의 여대생일 뿐이니 유사시엔 힘으로 제압하면 그만이라고 별다른 준비도 해놓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하늘은 더욱 푸르게 깊어진 듯 높다랗게 보였고 수많은 낙엽들이 평생에 한 번일 지상으로의 도약을 해대고 있었다.
그리고 수십 미터 전방에서 이쪽을 향해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그녀를 보았을 때, 성진은 직감적으로 동혁이 말했던 여자임을 알아챘다. 물론 한 번도 본적이 없었지만 커리어 우먼 같은 외모에 약간 캐주얼틱한 스쿨룩 복장을 하고 있는 그녀는 여느 말마따나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목 언저리까지 내려온 세련된 단발머리를 살랑이며 한 손에는 작은 가방을 든 그녀는 길가 한 쪽에 서있는 성진을 발견하곤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성진은 혹시 자신이 준비하고 기다리는 게 들켜서 그냥 지나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얼핏 들었다. 실제로 성진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우아해 뵈는 걸음걸이로 또각거리며 다가오더니 살포시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튀어나오는 매력적인 목소리.
“저어… 죄송한데 구내 은행이 어디쯤 있는지 아세요?”
됐어! 성진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올리고 - 사실은 미소까지 짓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일부러 기다렸다는 게 들킬 것이기에 - 짐짓 별 것도 아니라는 듯이 대답을 했다.
“아아. 은행이요. 저쪽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건물 보이시죠? 그 뒤로 돌아가면 건물이 하나 더 있는데….”
그리고는 슬쩍 말을 끊고 관심있는 것마냥 그녀와 눈을 마주친 성진은 나머지 설명을 마무리 지었다.
“그 중앙으로 들어가셔서 보면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아아, 그렇군요. 정말 감사드려요.”
고개를 끄덕이다 곧바로 살며시 숙이며 생긋 미소짓는 그녀. 성진은 순간 그 모습에 가슴이 움찔했다. 정말 이쁘고 매력적이긴 하군. 그런데 이 여자가… 그런 말을 한단 말야? 다른 여자 아닌가? 믿기지는 않았지만 일단 끝까지 관찰해보기로 했다. 여자가 돌아가서 얼마간 걸어갈 때까지 그녀의 외모에 빠져든 것처럼 시선을 떼지 않고 있으면….
“아.”
잊은 것이 있는 듯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돌아보는 그녀.
“음?”
처음 자세 그대로 재킷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그녀의 시선과 마주치는 성진.
그리고 튀어나오는 그녀의 대사.
“너 말야… 나랑 섹스할래?”
고개를 살짝 꺾으며 그 매력적인 미소로 물어보는 여자. 하지만 성진은 정작 그 대사가 나오자 분리되어있던 조각이 맞춰진 것처럼 히죽 웃으며 맞받아쳤다. 약간은 날카롭다 싶은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면서.
“어디 가서 할까?”
여자는 놀라거나 한 표정은 아니었다. 단지 좀 의외라는 듯 눈동자를 굴리며 성진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잠시 생각해보는 모습이었다. 기선 제압에 실패했다는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성진은 그녀가 생각에 잠긴 틈을 타 흘끗 식당 발코니쪽을 바라보았다. 멀어서 잘 확인은 못했지만 동혁은 에스프레소에서 입을 뗀 채 놀란 표정이었고, 성진은 의미 있는 미소를 키득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다시금 그녀를 바라보며, 성진은 이번엔 그녀에게 한걸음 다가가 보였다.
“캠퍼스 한가운데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잖아? 설마, 장소도 생각하지 않고 그런 말을 한 건 아니겠지? 으흠… 아니면.”
자신과 키가 비슷해 뵈는 그녀의 표정을 슬쩍 살피는 제스처를 취하며 성진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정작 풋내기 남자들을 놀려대다가 적수가 나타나니 당황해버린 건가?”
같은 남자라도 침을 꿀꺽 삼키게 만들법한 포스로 날카로운 눈빛을 그녀에게 보내며 한마디씩 또박또박 말하는 성진. 하지만 여자는 오히려 평온해 뵈기까지 한 미소로 그 시선을 부드러이 넘겨버렸고, 성진은 조금 꿈틀했다. 그 사이에 여자는 마치 아주, 아주 오래 사귄 애인한테나 그러는 것처럼 덤덤하고 가볍게 말했다.
“근처에 내 동아리 방이 있거든. 거기 가서 하자.”
그리고는 먼저 몸을 돌려 앞장서는 그녀. 가죽 재킷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 몸을 조금 숙여 노려보던 성진은 그 자세 그대로 잠깐 굳어버렸다. 뭐야, 저 여자. 전혀 당황하지 않잖아? 동혁의 말마따나 정말 겉으로는 살짝, 속으로는 깊게 미쳐버린 것 아닐까? 하지만 성진은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아도 다음을 침착하게 준비하는, 행동력 높으면서도 합리적인 성격이었고 그래서 당황함을 내비치지 않은 채 그녀를 따라갔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걱정거리라면 꽤나 거침없는 그녀의 발걸음이었다. 그렇게 은근히 성큼성큼 내딛는 그녀를 따라잡기 위해 자신도 걸음을 빨리 해야 했고, 그래서 동혁이 발코니에서 내려와 자신의 모습을 따라잡을 시간이 여의치 않을 것이었다. 더군다나 학생회관 건물로 들어가면 몰래 이쪽을 살펴보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얀색으로 칠해진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성진은 잠시나마 이 예쁜 여자가 활동하는 동아리방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러나 정작 들어섰을 땐 별다른 게 없는 평범한 내부 공간임을 알고 살짝 김빠지는 한숨을 쉬었다(정말로 살짝이었을 뿐이다). 그에겐 대부분의 경계성이 여자의 행동에 집중돼있었고, 그래서 중앙에 놓여진 넓고 커다란 탁자와 양쪽으로 줄짓듯 늘어선 책장들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저 그 책장들에 꽤 많은 구간을 차지하는 책들이 놓여 있는 걸 보고 도서 관련 동아리인가보다 싶었을 뿐이다.
성진은 마치 미리 준비해둔 것처럼 아무도 없는데다 창가의 커튼이 쳐져있는 것을 보곤 소리없이 침을 삼켰다. 그리고 사실 긴장감을 느낄 시간도 별로 주어지지 않았다. 여자는 책상에 걸터앉더니 가방 속에 놓인 열쇠를 집어들어 성진에게 보였던 것이다.
“열쇠는 이거 하나뿐이지. 문 잠궈.”
‘누가 들어오면 곤란하잖아?’라고 부드럽게 말하듯 생긋 웃어 보였지만 성진은 여전히 경계감을 풀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문 손잡이를 눌러 잠그었고, 혹시나 싶어서 제대로 흔들며 확인해보았다. 그러나 다시 돌아본 그는 두 눈이 커지는 걸 제지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짧은 틈에 책상에 걸터앉던 걸 아예 올라가서 주저앉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주름치마를 걷어 올리고 팬티 위에 손가락을 얹어 미소 띤 얼굴 그대로 성진에게 들이대 보였다. 애초에 꽤 짧았던 치마가 허리 위로 들추어져 그녀의 새하얀 허벅지를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었다. 그녀의 조그맣고 하얀 팬티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성진은 그 팬티 가장자리의 촘촘한 레이스들과 중앙 윗부분에 달린 귀여운 분홍빛 리본을 보며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성진은 침착함을 바탕으로 한 높은 행동력의 타입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그만의 특유한 날카로움으로 다시금 주도권을 이끌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다가오라고 손짓하듯 자신의 팬티 속에 손을 넣어 보지를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되도록 응시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책상 옆을 서서히 걸어갔다. 한 손을 재킷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로 다른 쪽 손을 들어 책장의 책들을 사라락 훑어가며 천천히 그녀의 주변을 맴도는 성진.
“이왕 하는 것 상대의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난 09학번 김성진이다. 전공은 디지털 미디어 학과지.”
여자는 책상 위에서 자신의 주위를 거니는 성진을 따라 고개를 돌려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다리를 벌린 채 팬티 속의 손가락을 뺄 생각도 않고서. 그렇게 그런 그의 움직임을 물끄러미 따라가던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킥 웃어버렸다.
“뭐야, 그게. 밖에서 맞대응하던 기세와는 달리 고지식하게 통성명이나 하자며 시간을 끄는 꼴하곤.”
성진은 순간적으로 울컥해서 걸음을 멈추곤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 보기와는 달리 비꼬는 데 능숙하잖아. 하지만 그녀는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대견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 물론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대견함으로 -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앞글자만 포함시키면 동일한 회로로 토론을 좀 해보기 적당할 것 같군.”
“멀티미디어 관련인가?”
“뭐 그렇다고 봐야 할지도. 디지털 출판 학과니까. 이름은 은선영.”
성진은 잠시 뭔가 허전하게 빠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그 기분을 도와주기라도 하듯 잠시 사이를 두곤 말했다.
“08학번이야. 너보단 선배지.”
“선배라고? 그럼 나보다 연상의….”
“흐음, 어떨까?”
정확한 나이를 밝히지 않는 그녀를 보며 성진은 ‘조기 입학 같은 건가?’라는 의문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선영은 곧 소개 관련에서 흥미를 잃은 듯 성진을 바라보며 화제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래서, 할 거야 안 할 거야?”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간 호기심 위주로만 따라온 사람 취급을 받을 게 뻔했기에 성진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주도권을 잡으려고 짐짓 태연한 척했던 게 오히려 자신을 공격하는 화살마냥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영은 아름다운 외모와 깔끔하게 차려 입은 용모와는 달리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데 어색함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팬티 안에 넣은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자신의 보지 속을 손가락으로 자극하고 있었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팬티가 조금씩, 축축하게 젖어오고 있었고, 그것은 옆에 서있는 성진의 시야에도 뚜렷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것 봐… 너 정말…….”
그녀의 짜증 반 달뜬 신음 반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와서야 성진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선영에게 다가가는 대신 고개를 전방으로 돌리곤 다시 책장의 책들을 훑어가며 거닐기 시작했다. 촉촉이 젖은 팬티를 벗어 그의 안면에 던져버리는 건 어떨까 하고 생각하던 선영은 문득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앞쪽을 노려보는 그의 눈빛을 보게 되었다. 이 녀석… 신변보호에 의심을 갖고 있군.
그게 정답이라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듯 성진은 선영을 넌지시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장소를 옮기지.”
“뭐가 두려운 거지?”
성진은 대답 대신 한 손을 들어 자신의 눈 앞에 뭔가를 찍어보이는 시늉을 했다. 선영은 보지에서 손가락을 빼들곤 그것을 쪽 핥으며 나긋나긋하게 물어보았다.
“현재 캠퍼스에 나도는 소문으로 보나 정황으로 보나, 내가 너한테 강간당했다는 증거 비디오로 조작해 금품 따윌 요구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성진은 그제서야 히죽 하고 특유의 날카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번엔 선영이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성진은 한가롭기까지 한 동작으로 동아리방 출입구 앞으로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물론 지금까지의 네 행동에 비추어보면 그럴 가능성은 낮지. 하지만 그런 게 어떤 경우엔 더 무서울 거라는 걸 너도 부정할 순 없을 텐데. 돈에 상관 없이 자기만족으로 그런 사진을 배포해버리는 타입도 간과할 순 없거든.”
그리곤 고개를 반쯤 돌려보며 씩 웃는 성진.
“어쩐지 네 경우엔 후자 쪽이 어울리겠군.”
“용의주도하네.”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대신 칭찬인지 뭔지 가늠하기 애매한 평가를 내던지는 선영. 하지만 성진은 듣는 둥 마는 둥 동아리방 문을 열어 젖혔기에 선영은 황급히 자세를 풀고 옷매무새를 바로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