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고 푸르른 하늘과 더불어 기분 좋게 내리쬐는 햇살은 여름을 막 지나친 가을의 장점을 한껏 돋우고 있었다. 이런 기분 좋은 날씨가 계속 이어졌으면 좋으련만, 최근 들어 온난화 현상의 심화로 그런 날씨가 짧아진다는 보도가 청년의 기분을 조금은 가라앉히고 있었다. 하지만 짧은 만큼 그 시간을 더욱 소중히 여겨야겠다면서 그 청년은 짐짓 쾌활하게 대학교 캠퍼스를 걸어갔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밝고 경쾌한 음악소리가 기분을 한껏 고조시켜주고 있었다. 어깨에 맨 가방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는 현재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경이었다. 단지 시끌벅적하면서도 듬성듬성 주변에 깔린 남들의 시선이 있었기에, 그 들뜬 기분을 발걸음으로만 가라앉혀야 한다는 현실에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을 뿐이다. 그렇게, 조금은 일찍 강의실로 향하던 그의 발걸음이 일순 멎었다.
물론 고조된 기분이 가라앉을 정도로 험한 꼴을 당한 건 아니다. 단지 의외의 상황이 눈앞에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실 꽤나 평범한 대학생 축에 속했고, 지극히 정상적이며 약간은 착한 사람의 행동을 연기하는, 지천에 널리고 널린 그런 인간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런 청년에게 다가오는 아름다운 또래의 20대 초반 아가씨는 마음 속으로만 ‘에이, 설마 저 여자가 나를 목적으로 다가오는 건 아니겠지’라는, 현실적이면서도 그런 현실적인 감각을 되짚어야 할 정도로 은근한 기대를 품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실제로 청년에게 볼일이 있었지만, 역시 현실적인 질문이었다.
“저… 죄송한데 이 학교에 우체국이 어디에 있죠?”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던지는 여대생의 외모는 평범하게 행동하기 어렵게끔 만들고 있었다. 살짝 회사원 분위기가 날 듯한 푸른색 블라우스 상의에 교복을 연상케 하는 짧은 주름치마, 그 밑으로 드러난 화사한 맨다리와 섬세하게 발과 발목을 감싸는 굽이 높은 하이힐 등은 단정한 분위기와 동시에 여대생의 신선한 매력을 한껏 발산하고 있었다.
그래서 청년은 ‘때가 2학기로 접어드는 가을인데 어디 편입이라도 해와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건가’ 따위의 의문점도 떠올리지 못한 채, 허둥거리며 이어폰을 빼고 설명할 단어를 생각하는 척했다. 그리고 그 연출은 오래 가지 못했다. 목 언저리까지 내려온 윤기 나는 검은 머릿결을 살랑거리며 생긋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멋쩍은 웃음으로 무난하게 자신을 표현하며 우체국이 있는 방향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저어… 이쪽으로, 쭉 걸어가서 두 번째 건물 서 있는 곳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됩니다….”
“아, 그런가요? 정말 감사드려요.”
그녀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들고는 또다시 환하게 웃어 보였다. 머리칼이 살며시 그녀의 눈가를 가렸고, 그녀는 익숙한 동작으로 그것을 살짝 쓸어넘겼다. 그 모습이 마치 방송 속 연예인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지라, 청년은 돌아서는 그녀를 이대로 보낼 수 없다는 듯 뭐라고 더 말하려 했다. 이런 별 거 아닌 대화에서도, 운명적인 만남 같은 걸 이끌어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자신의 대학 생활을 훨씬 화사하게 보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보자는, 혈기왕성한 청년의 본능적인 연애 감정이 피어오르는 순간이었다.
……라곤 해도, 역시나 그렇듯 그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인 숫기 없는 20대 초반의 청년일 뿐이었고, 너무나도 얇은 우연의 마주침을 그렇게까지 끌어낼 재간 따윈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말도 한번 다시 걸어볼 생각조차 못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그저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살펴보려고 흘끗흘끗 훔쳐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잊어버린 것이 있다는 것처럼 ‘아!’하며 다시 돌아본 그녀.
“저기, 있지.”
“어… 네…?”
“나랑 섹스할래?”
앞서서 길을 물어보던 행동과 표정과 목소리 톤까지 한치의 틀림도 없이 똑같은 분위기로 가볍게 말을 건네는 그녀. 물론 그 내용에 관련해선 - 반말을 차치하고서라도 - 완전히 다른 의미를 품고 있었지만.
청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약 몇 초간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애인이라도 자신의 뒤에 서있어서 대담한 농담(?)이 건네어진 것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몇 발치 떨어진 곳에 동호회로 보이는 사람들 몇이 모여 잡담을 나눌 뿐이었다. 청년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고,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로 손가방을 다소곳이 앞으로 모아쥔 채 대답을 기다리는 여자.
“……저?”
멍청한 표정으로 검지손가락을 이용해 자신을 가리키는 청년. 그리고 여자는 너 말고 누가 또 있냐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을 뿐이었다.
충격은 좀 늦게 찾아왔다. 청년은 아까와는 약간 다른 의미로 얼굴이 붉어지며 할 말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굳어버린 그의 몸을 풀어준 건 그의 의지라기보다는 그녀의 행동이었다. 여자가 마치 마법처럼 한걸음 살포시 내딛어 청년에게 다가가자 그는 가까스로 비명을 삼킬 수 있었다.
“저… 저, 이만 강의 시간이 돼서…….”
그리고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듣지 않겠다는 태도로 힘껏 돌아서서 캠퍼스 저쪽으로 달아나버렸다. 물론 강의실은 그가 애초에 걸어가던 쪽이었기에 방향은 완전히 반대였으나, 그것은 별로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는 듯하다.
“……후후.”
혼자 남겨진 그녀는 곧 피식 하고 웃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몸을 돌렸다. 바람이 살포시 불며 때이른 낙엽이 휘날렸고, 그 속을 걷는 그녀의 모습은 드라마 속에서나 나올 법한 연예인의 행보를 연상시켰다.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을 까맣게 모르는 몇 남대생이 그런 그녀의 모습을 멍청하게 쳐다보다가 저희들끼리 쑥덕거렸다. ‘저렇게 예쁜 학생이 우리 학교에 있었나?’ 물론 넓디 넓은 대학교였기에 모르고 지나쳤을수도 있다는 관념이 그 이상의 생각으로 뻗어나가는 걸 방지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학생은 좀 대담했군.’
여자의 생각으로 봐서는 그런 일을 한두번 하진 않은 듯하다. 실제로 그녀가 아까와 비슷한 상황을 연출해서 겪어본 바로는, 대다수의 학생이 말도 한마디 꺼내지 못한 채 범죄자를 보듯 달아나버렸기 때문이다. 지극히 정상적인 학생들만 깔린 재미없는 학교라 되새기면서, 그녀는 또각또각 걸어가면서도 키득거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