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1) - 유미의 시점.
김유미. 그녀의 나이 올해로 스물하고도 셋. 그녀의 삶은 비록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말할 만큼은 아니었을 지라도, 남들에 비하면 참으로 기구한 삶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궁핍했던 가정 형편. 게다가 대학 진학 무렵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아버지. 그 이후 식당 보조 일을 하는 어머니와 더불어 하루에도 두 개씩 아르바이트를 뛰어가며 생계를 이어나갔던 생활이 2년. 결국 가난을 이기지 못한 어머니는 자신과 남동생을 버리고 집을 나가버렸다.
고등학생인 남동생과 한순간 덩그러니 세상에 버려지게 된 유미였지만 헤쳐나가기에는 세상은 너무도 막막하고 힘든 곳이었다. 모녀의 노력으로 찢어질 지언정 그나마 근근히 유지는 되고 있었던 가정 생계가 한순간에 기울어버리자 그녀는 대학 등록금을 벌기에도 급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고 남동생도 정처없이 방황하기 시작했다. 남동생의 대학 진학이야 둘째 문제로 치더라도 어떻게든 고교 졸업만큼은 시키고 싶었던 것이 누나 된 마음이었고, 자신 또한 졸업 이후 안정된 생활을 위해서는 번듯한 직장에 취업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다니고 있었던 대학도 자퇴하지 않고 어렵사리 학업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대학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학교 친구 다영이는 그녀에게 있어 절친한 친구인 동시에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그렇게 가까워진 데에는 다름 아닌 살아온 환경이 비슷했다는 점이 큰 이유가 되었다. 비록 다영이는 유미처럼 부모님을 잃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도 나름대로의 아픔이 있었다.
현지 처. 술집 일을 하던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다영이에게 있어 아버지란 사람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일본으로 돌아간 아버지는 이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다영이가 유미에 비해서 단 하나 나았던 점이 있다면 어머니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비록 술집 창부 신세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어머니는 아이에 대한 책임감이 있는 여성이었고, 숱한 조롱과 업신여김에도 불구하고 딸을 악착같이 키워냈다. 다영이도 철이 들고부터는 불우한 가정에 대한 불평보다는 어떻게든 남들처럼 제대로 살아보겠다는 의지로 어머니를 도와 생계를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삶에 대한 노력'이 오다영과 김유미를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점이 되어준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 세상은 평범한 여대생들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가혹했고, 그녀들은 어느순간부터 그 '노력'을 잘못된 방향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유미에 비해 매사 겁이 없는 다영이의 제안으로 어느날 시작된 단 한번의 '도둑질'. 그 발단은 공중 목욕탕에서 어느 부유한 중년 여성의 소지품함이 우연히 열려있는 장면을 목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행동력이 뚜렷했던 다영이는 당돌하게도 그 여성의 금품과 지갑에 손을 댔고, 이후 두 사람은 그 이익을 반씩 나누어 적지 않은 돈을 손에 쥐었다.
그들이 여지껏 악착같은 알바 생활로 벌어왔던 것보다 훨씬 더 쉽고, 훨씬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그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은 '방법'에 한번 발을 들인 이후, 그들은 점점 더 대담해져갔다. 유약한 성격인 유미는 물론이고 심지어 다영이조차도 가끔씩 양심이 가책을 느끼고 멈칫했던 순간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누가 뭐라고 해도 가족, 생활, 학업이라는 떠안아야 할 숙제가 있었다. 그저, 단 한순간 양심으로부터 눈을 감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여기까지 와버렸다. 처음부터 이 헬스클럽을 선택한 이유는 순전히 다영이의 제안으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 사실 불우한 형편의 두 사람이 운동을 한다는 것부터가 따지고 보면 사치 아니겠는가. 그녀들의 목적은 애초에 아예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의 적당한 시설, 적당한 보안, 적당한 인구.... 게다가 여색을 지나치게 밝히는 호색한 트레이너를 조금만 유혹해서 가까워지고나면 이곳 회원들의 동태와 정보를 살피는 것쯤이야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그러던 차에 나타난 최고의 먹이감이 바로 의사댁의 돈 많은 귀부인.
계획했던 대로 이미 클럽 회원들과 어느 정도 친분을 쌓은 다영이가 문 앞에서 망을 보며 혹시라도 출입하려는 인원이 있거든 적당한 화제로 이야기를 돌리며 신호를 준다. 그러는 사이에 그 동안의 경험으로 어느 정도 기술을 쌓은 유미가 사물함을 따고 금품과 돈을 취한다. 물론 여성 탈의실에 CCTV 같은 장비가 있을리는 없으니 이것으로 증거는 남지 않고 완전 범죄 성립.... 그것이 두 여대생의 절도 계획이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 그녀들에게 있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금이 이 상황은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나 다름이 없었다.
"아.. 아아.. 아아흑..."
호색한 트레이너의 몸 밑에 깔려 신음을 토하는 유미의 절친한 친구이자, 지금은 영락없는 '공범'이 되어버린 다영이. 완전히 발가벗겨진 몸뚱아리에 드문드문 남은 붉은 손자국들. 짐승같은 남성에 의해 온 몸이 유린당하고 범해지고 있는 단짝 친구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그 충격적인 광경에 유미는 그만 온 몸이 굳어버렸다.
오승환이라는 남자.... 자신들의 범죄의 증거물을 도대체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모를 그 악마같은 남자가 그 순간 자신의 귓가에 속삭인다.
"두 번째 요구는 너도 저렇게 날 즐겁게 해주는 거야.."
싫다. 진저리가 쳐진다. 지금 이 상황이 누구라도 좋을 수는 없겠지만 그녀에게는 싫을 만한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그녀는 처녀였다. 여지껏 남자를 모르고 살아온 순결한 몸이었다. 어릴 적부터 예쁘장한 얼굴과 맵시 있는 몸매로 뭇 남성들에게 숱한 인기를 얻어왔던 그녀였지만 여태껏 제대로 된 연애 한번 해본 적이 없었다. 연애를 할 만한 시간적, 물질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찌보면 다영이와 유미의 중요한 차이이기도 한 남자 경험. 남자를 많이 겪어본 다영이에 비해 유미는 남자에 대해 알지 못했다. 물론 그런 그녀에게도 막연히 마음에 들었던 남자들은 몇 있었다. 이를 테면 같은 학과의 준호 선배처럼 자신도 언젠가는 그런 괜찮은 남자와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만 할 뿐이었다. 그 때가 되면 남자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남자 경험이 없는 김유미라 할지라도 지금 승환의 입에서 떨어진 요구와 자신들이 처한 지금의 상황, 그리고 알몸이 되어 윤간당하고 있는 단짝 친구의 모습 등으로 미루어볼 때 승환이 지금 요구한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본능으로 충분히 느낄 수가 있었다.
설마 자신이 뚜렷하게 그려보지도 않은 첫 경험의 상대가 이런 짐승같고 악마같은 남자의 손에 강제로 범해지는 것이라니.... 싫다. 절대로 싫었다.
"일단 옷부터 벗어봐."
노예를 가진 주인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명령하는 승환.... 그러나 그에겐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자신들의 범죄 행각의 증거물이 쥐어져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공개되는 순간 자신은 물론이고 공범인 다영이의 인생까지 모두 절단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절도죄로 감옥에서 콩밥 몇년 먹으면 된다? 너무도 속편한 소리였다. 두 여자에겐 자기 자신 뿐만이 아닌 짊어져야 할 '가족'이 있었다. 유미에겐 하나 뿐인 남동생이, 다영이에겐 하나 뿐인 어머니가. 이 상황에서 자신들이 잘못되는 순간 가족 또한 함께 무너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삶에 대한 의지 하나로 불우한 환경을 여기까지 이겨내온 그녀들로써... 이렇게 한 순간의 실수로 범죄자가 되어 인생에 빨간줄을 긋게 된 다는 것은 차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왜 진작 더 조심스럽지 못했을까, 왜 그렇게 무모했을까.... 이것이 꿈이기를 바라며 악몽에서 깨어나기만을 바랐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악몽은 계속되고 있었다. 좁은 공간을 절절히 울리는 단짝 친구의 처연한 신음소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선택권이 없는 상황. 남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가혹한 기로.... 블라우스의 단추를 쥔 유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승환이라는 작자는 유미의 그 망설임까지도 즐기려는 듯, 재촉하지 않고 느긋하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을 뿐이다.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물을 손에 쥐고 있는 이상 자신이 어찌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도 느끼고 있는 모양. 비록 그가 어떻게 그녀들의 자세한 속사정까지 알 수 있겠냐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눈물이 날 것만 같다.
바로 그 순간,
"아아아악!!!"
귀청을 찌르는 다영이의 높은 비명 소리. 유미는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