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2) - 증거물. (17/50)

# 16. (2) - 증거물. 

"그 쪽은...."

나를 보는 유미의 시선에 한껏 경계심이 느껴진다. 아무도 없을 때이긴 하지만 여자 탈의실을 무단으로 침입한 낯선 남자에 대해 경계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태연하게 탈의실 안 쪽으로 들어와 그녀가 나가지 못하게 문을 닫았다.

"늦게 오셨네요, 유미 씨? 다영이 만나러 오신거죠?"

"네? 아... 네. 그... 다영이랑 만나기로 해서요. 다영이 보셨어요...?"

"다영인 아까 저한테 이걸 맡기고 먼저 가던데요?"

"네? 먼저 가다니요? 그럴 리가 없는데...."

"먼저 이것부터 좀 보세요, 유미 씨. 다영이가 유미 씨 보라고 남긴 거에요."

"무슨....?"

나는 당황해서 딱딱하게 굳은 유미의 면전에 휴대용 태블릿 화면을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동영상 하나가 이미 재생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현구에게는 비밀로 하고 숨겼던 탈의실 촬영 장면의 한 부분을 편집한 바로 그 영상이었다. 

"이게 뭔지 아시겠어요, 유미 씨?"

"그, 글쎄요... 이게 뭐죠?"

처음에는 이것이 뭔지 의아해하던 유미도 어느 정도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자니 그 화면 속에 나타나고 있는 장소가 자신이 지금 서 있는 바로 이 곳, 여자 탈의실의 내부임을 점점 더 알아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기묘하게 굳어있던 유미의 표정이 의이함을 거쳐서 당혹감으로 물들더니, 곧이어 경악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유미 씨, 손버릇이 많이 나쁘시더군요."

"아, 아니... 이건...."

"그 아줌마, 아마 상당히 돈이 많은 의사댁 사모님인 것 같던데. 현구랑도 이렇고 저런 관계로 꽤 친하게 지내구요. 아무래도 이거 경찰에 고소하면 절도죄로 빼도 박도 못하게 될 것 같아 보이는걸요?"

태블릿 화면에 비친 여자 탈의실 안에서는 유미가 조심스럽게 누군가의 락커를 몰래 열고 있었다. 열쇠구멍을 따는데 이용한 가느다란 클립을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은 이미 그것 자체로 하나의 범죄 증거였다. 락커를 뒤지던 유미가 잠시후 안 쪽에서 손을 빼내자 손아귀에 반짝이는 금팔찌 하나가 걸려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의 범죄 행각이 너무나도 뚜렷한 형태로, 이렇게 누군가의 손에 남아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지 유미는 그 빨갛고 매혹적인 입술을 금붕어처럼 뻐끔거리며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느낌이 온다.... 서희 팀장을 이미 한번 먹어봤기 때문에 알 수 있다. 이 느낌은 내가 아주 제대로 덫을 놓았다는 의미다.

"처음엔 생각 못했는데, 아주 우연히도 현구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났죠. 그 아줌마가 팔찌를 잃어버렸다고 했던게. 아무리 그래도 유미 씨도 참 대범한걸요. 보아하니 일부러 돈 많은 사람인걸 알고 노린 것 같은데... 이거 꽃 다운 나이에 벌써부터 인생에 빨간 줄 긋게 생겼으니... 하하."

"자, 잠깐만요.... 도대체 무슨 수로....."

"하하하.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요새 이렇게 유미 씨 같은 도둑고양이들이 하도 많으니 이런 방범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 것도 그리 놀랄건 아니지 않나요?"

"......."

"자, 그럼 이제 이 증거물을 어떻게 처리한다? 지금 바로 경찰서로 가실까요, 아니면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날 밝으면 같이 손 잡고 경찰서로 가실까요? 다행스럽게도 주인 어르신이나 현구는 이 사실을 아직 모릅니다만?"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가던 유미의 표정이 내 마지막 말에 기묘하게 변했다. 

"그.. 게 무슨..."

"말 그대로에요. 이 증거물을 갖고 있는 사람은 저 뿐이고, 저 외에는 아직 유미 씨가 도둑년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거죠. 즉 바꿔 말하면, 내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유미 씨는 인생을 종칠 수도, 아니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무사히 넘어갈 수도 있다는 겁니다."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유미의 얼굴. 이 상황 자체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진대, 내가 하고 있는 말에 대한 신빙성을 갖는 것은 더욱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녀에게 선택권을 주어야만 했다.

"유미 씨,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단 거기 앉아요."

"......."

본능적으로 거부권이 없음을 직감한 그녀가 서서히 탈의실 의자에 앉았다.

"지금부터 내가 무슨 말을 하건, 어떤 질문을 하건 대답은 바로바로 해요. 알겠어요?"

"......."

보기보다 머리가 좋지 않은 것인지 이해를 못 하고 눈만 껌뻑이는 그녀. 나는 핸드폰을 들어 그녀에게 액정을 보여준 후, 그 상태에서 터치로 숫자 키패드 세 개를 눌러 전화 버튼을 찍었다. 액정에 떠오른 번호는 바로 112.

"자, 잠깐만요!"

그제서야 다급하게 몸을 던져 내 손을 양손으로 감싸쥐고 애걸하기 시작하는 유미. 나는 선심이라도 쓰듯이 종료 버튼을 눌렀다. 지금 이 상황에서 경찰에 전화를 걸어봐야 더욱 피를 보는 것은 이 쪽이라는 사실을 그녀가 알 리가 없었고, 알더라도 지금은 어찌할 수가 없을 것이다.

"시간 잡아먹지말고 질문에 바로바로 대답해요, 알겠어요?"

"아, 알겠어요..."

"다영이도 유미 씨가 도둑질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그, 그건...."

더듬거리며 대답을 곧장 하지 못하는 모습에 나는 손아귀로 그녀의 턱을 부여잡고 사납게 치켜올렸다. 

"바로바로 대답하라고 썅년아. 곱게 대해주니까 상황파악 안되냐? 곧장 감방에 처넣어줘?"

"아, 알아요... 제가 안에서.... 일 하는 동안.... 다영이는 바깥에서 망을 보고...."

"뭐야? 아는 정도가 아니라 둘이 공범이었단 말이야?"

"흐.. 흐흑... 네.... 제,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아저씨.... 지, 집이 너무 어려워서.... 흐흑....."

별안간 눈물을 쏟아내는 김유미. 봇물이 터지듯 울음보를 터뜨리고 나니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로 흐느끼기 시작하는 것이 동정심을 유발시키려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서러워보였다. 하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그런게 아니었다.

"질질 짜지말고 내 말이나 똑바로 들어. 아까도 말했다시피 니가 도둑질하는 증거영상은 내 손에만 있고, 아직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니 소원대로 니가 하기에 따라서는 한번 못 본척 눈감아 줄 생각도 있어. 알겠냐?"

"저, 정말...이세요?"

"니가 하기에 달렸지. 별로 어려운건 아냐.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거 딱 세 가지만 제대로 하면 된다. 알아들었어?"

"네... 네. 알겠어요."

한줄기 희망이라도 찾은 것 마냥 착각하는 것인지 순순히 고분고분해지는 유미. 나는 탈의실에 굴러다니는 달력을 한장 뜯어 백지로 된 뒷면을 그녀에게 내밀고는 볼펜 한 자루를 툭 던졌다.

"첫 째, 도둑질을 하게 된 경위와 이유를 쓰고 잘못에 대한 반성문을 그 한 장에 빽빽히 채운다."

"네, 네에...? 지금요?"

"물론. 10분 안에 써. 그리고 자기소개도 확실하게 하도록 해. 학교, 나이, 키, 몸무게 이런 것들 세세하게 적어서 말야."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명령이었지만 철 없는 어린 소녀의 죄를 갱생시키려는 의도로 생각하기라도 한 것인지 유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펜을 집어들었다. 그녀가 달력 뒷면에 반성문을 써내려가는 동안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하며 잠깐 생각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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