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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대처. (15/50)

# 15. 대처.

"이 씨발년이!"

현구의 노한 목소리와 함께 따귀를 치는 듯한 소리가 철썩 하고 울러퍼졌다. 같은 따귀지만 방금 전의 '짝' 소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렬하고 묵직한 소리였다. 누군가가 쓰러지듯 쿵 하는 소리가 문 안쪽에서 요란스럽게 새어나왔다. 문득 상황이 대충 파악되기 시작하면서 덜컥 겁이 났다. 현구 녀석이 괜한 짓을 해서 일을 그르치기라도 한다면 삽시간에 나도 같이 피를 보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봐 이 개 같은 년아, 뭐? 신고?"

"흐.. 흡.."

으르렁대는 현구의 노호성과 따귀를 맞고 위축된 다영이의 움츠러든 목소리가 섞여나온다. 말 뿐만이 아니라 몸으로도 뭔가를 밀어붙이고 있는지 안에서는 자꾸만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평소에 궁둥이 흔들어대면서 따먹어달라고 존나게 꼬리치던 년이.... 꼴같잖게 뭐? 신고? 신고해봐, 이 씨발년아. 그 전에 개창년을 만들어줄테니까."

"미, 미친새끼.... 화장실에 그딴거 달고.... 찍어서 협박하는게 정상이냐? 내, 내가 살다살다 너같은 미친 변태새끼는 처음 본다..."

아뿔싸.... 나도 모르게 탄식이 터져나왔다. 전후 사정이야 정확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방금 전의 내용으로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현구가 이미 다영이에게 몰카의 존재를 밝혀버린 것. 그리고 그것을 빌미로 위협을 가했다는 것.... 사실상 이미 일은 터져버린 것이나 다름 없었다. 

불현듯 후회가 들었다. 현구녀석이 이렇게까지 무대포로 일을 그르칠 정도의 다혈질일거라고는 미처 계산을 못 했던 것이다. 아니, 솔직히 그런 우려를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구는 내 계획에 있어 필수요소였기 때문에 애써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이것은 현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이기도 했다. 

"현구야, 무슨 일이야?"

몸을 숨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기에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얼굴이 벌개져 성난 숨을 몰아쉬는 현구와 세탁물 더미 사이에 쓰러져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 다영이가 보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곧장 내게 집중되었다.

"형님... 아니, 그게 이년이..."

"오, 오빠! 도와줘요! 경찰에 신고해야 해요... 이, 이 사람 완전 싸이코에요....!"

사태분간을 하지 못하는 다영이가 몸을 일으켜 내게로 뛰어왔다. 내 등 뒤에 몸을 숨기는 다영이의 모습을 보니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나는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물었다.

"무슨 일인데?"

사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영이보다는 현구에게서 들었어야 정상일 터였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먼저 대답한 것은 다영이였다.

"저.. 저 사람이.. 여자 화장실에 카메라를 설치해서.. 여자 회원들을 찍고 있었어. 바, 방금 전에 나한테 와서..."

"뭐라고 했는데?"

"영상을 찍었다고...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면 그걸 퍼트리겠다고 협박을...."

불쌍한 다영이는 내가 자기 이야기를 너무 순조롭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갑자기 나타난 구원자에게 매달리기라도 하는 것 마냥 술술 설명을 쏟아냈다. 다영이에겐 날벼락이었겠지만 나에겐 이미 대충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놀랍지도 않았다. 다만 한숨이 나왔다. 

현구 녀석은 정말 그런게 협박거리로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서희 팀장의 불륜장면 정도 되는 약점이라면 모를까 그런걸로 어설프게 협박을 했다간 오히려 역으로 고소를 먹고 감옥에 가게 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렇게 될 경우 나까지 덩달아 인생 종 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현구야, 어쩌려고 이랬냐..."

"죄송함다, 형님.... 처음엔 그냥 꼬실려고만 했는데 씨발년이 가소롭게 자꾸 튕기길래... 장난으로 위협만 할 생각이었는데 저 년이 그걸 보더니 신고를 하겠다고 나와서...."

"그런걸 함부로 보여주면 당연히 안되지, 임마. 누구 인생 종칠 일 있어?"

"면목 없습니다... 욱해서 그만....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거 저 년 입은 막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입을 막아야 할지에 대해서 현구 녀석이 생각하고 있는 방법이야 안 봐도 뻔했다. 다영이는 나와 현구를 번갈아 보며 이상한 낌새를 채기 시작했는지 얼굴이 파랗게 질려 더욱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무, 무슨... 오빠도 설마...."

다음 순간 다영이가 바깥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 것과 내가 몸을 날려 먼저 문을 닫아버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문 밖으로 도망가려다 가로막힌 다영이가 더 피할 데도 없는 모서리 안 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오, 오빠들.... 무슨 생각하는거야.... 이거 범죄야. 알아?"

"씨발, 조용히 좀 해봐 썅년아. 나도 생각 좀 하게."

사태가 복잡해지자 내 입에서도 썅욕이 나오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지금이 웬만한 위기 상황이 아님을 직감한 다영이가 문에다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사람 살려요! 밖에 누구 없어요!? 여, 여기.... 으읍!"

"아, 이 씨발년이 진짜!"

현구가 달려들어 다영이의 입을 우악스런 손으로 틀어막고 악력으로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우.. 우욱.. 우우욱!"

숨통이 조이자 위기감을 넘어서 공포를 느끼는지 다영이가 세차게 몸부림을 치면서도 이내 입을 다물었다. 현구는 남자인 내가 봐도 위협적인 그 두껍고 울퉁불퉁한 팔근육으로 다영이를 압박하며 나지막히 으름장을 놓았다.

"더 짖기만 해 봐 개년아. 경찰서 가기도 전에 변사체로 만들어 줄 테니까."

"........"

겁에 질려서인지 목이 틀어막혀서인지 다영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현구가 세탁물들 사이를 손으로 대강 더듬어 후줄근한 회색 티셔츠 두 장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냅다 악력으로 한장을 길게 찢어 너울거리는 헝겊처럼 만들더니 그것으로 다영이의 양 손을 묶기 시작했다. 대충 감이 온 나는 어쩔 수 없이 남은 티셔츠 한장을 마저 찢어 적당한 크기로 뭉쳐서 다영이의 입 속에 냅다 그것을 틀어박았다.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다영이는 천으로 양손이 등 뒤로 묶이고 포박되어 입은 틀어막힌 채로, 세탁물 창고의 한 구석에 마치 전쟁영화의 인질처럼 내동댕이쳐진 꼴이 되었다. 말을 하고 싶어도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자 그녀는 공포에 젖은 두 눈동자만 파들파들 떨어댈 뿐이었다.

"이제 어쩔거야? 그러게 그런 협박거리도 안 되는 걸 가지도 일을 저지르면 어떡해?"

"그러니까 지금부터 확실한 협박거리를 만들면 되죠, 형님. 제 실수니까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뭘 어떻게?"

"저 년 개창년 만들어버리는 동영상 찍어다가 여기저기 퍼트린다고 협박하면 지가 어쩌겠습니까? 제가 오늘 아주 확실하게 개걸레 만들어버릴테니 형님은 느긋하게 구경하시거나 아니면 같이 끼시죠."

"에라이 막장 새꺄.... 일이란건 신중해야 하는 거야. 이렇게 처리하단 좆 될수도 있단 말이다."

"죄송함다. 이왕 이렇게 된거 어쩌겠습니까."

이미 엎질러진 물이긴 했으나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돌발 전개에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어떻게든 수습을 하기는 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 경악스런 끔찍한 대화내용을 듣고 있는 다영이의 표정도 점점 더 공포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던 그 순간, 적막을 깨고 핸드폰의 진동소리가 또렷이 창고 안에 울려퍼졌다.

- 우우우우웅....

내 진동소리는 아니었고, 표정을 보아하니 현구의 것도 아니었다. 소리는 구석에 포박되어 처박힌 다영이의 몸 한 구석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길까 하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 냅다 다영이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읍..! 으읍..!"

입이 막힌 다영이년이 뭐라고 지껄였지만 신경쓰지 않고 왼쪽 엉덩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뽑아냈다. 액정에 '유미'라는 이름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너 이따 김유미 그 년 만난다고 했지?"

"......."

"빨리 대답해, 씨발년아!"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윽박을 지르니 다영이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문득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희미하게나마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듯 하여 나는 현구에게 지시를 내렸다.

"현구야, 바깥에 사람 아무도 없는거 맞지?"

"예. 다 나갔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한번 살펴봐."

현구가 바깥을 살피러 나가자 나는 다영이의 핸드폰 잠금패턴을 얻어내어 그녀의 폰으로 카카오톡에 접속했다. 다영이가 전화를 받지 않자 때마침 유미로부터 메시지가 날아오고 있었다.

[어디야? ㅎㅎ 왜 전화가 안돼?]

프로필 사진에 떠오른 유미의 모습을 보니 왠지 이 상황에 대한 묘한 흥분이 일어오르기 시작했다. 고민의 순간을 거치고 나니 이 돌발 상황에 대해 적응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다영이의 휴대폰을 이용해 유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아직 헬스클럽이야 ㅋㅋ 혹시 이쪽으로 와줄 수 있어?]

답장을 보내자마자 1이 지워지면서 곧바로 다시 답장이 왔다.

[아직?? 아까 나온다고 했잖아]

[현구 오빠랑 얘기 좀 하다보니까 시간이 걸려서 그래ㅜㅜ]

[흠.. 알았어. 나 곧 버스에서 내려. 그럼 그 쪽으로 갈게.]

[그래 고마워 ㅎㅎ 나 탈의실에 있을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는 다영이는 내가 자기 휴대폰으로 뭘 하고 있는지 알아내려는 눈치였지만 난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고 난 이후 그녀의 휴대폰을 멀찍이 치워버렸다. 그러는 사이에 현구가 바깥을 살피고 돌아왔다. 

"아무도 없습니다, 형님."

"그래, 현구야. 네 말대로 하자."

"예?"

"니가 이 년 책임지고 어디가서 못 떠들게 확실히 입 막아."

"흐, 흐흐흐...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 동안 나는 한 명 더 데리고 올테니까 여기서 일 보고 있어."

"예? 그건 무슨 말입니까?"

"두고 보면 알아."

의아해하는 현구를 뒤로하고 나는 바깥으로 나와 창고 문을 탁 하고 닫았다. 문 안쪽에서는 잠시 지독한 정적이 흐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요한 폭풍이라도 몰아치듯 안에서 엎치락뒤치락 법석을 떠는 소리와 함께 재갈에 가로막힌 다영이의 외마디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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