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서희 팀장의 애인. (13/50)

# 13. 서희 팀장의 애인.

또 하나의 흥미로운 영상을 획득한 그 다음날, 나는 출근길에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회사 입구에 당도했을 무렵 때마침 정문 앞에 검정색 SM 5 한 대가 와서 섰다.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조수석에서 윤서희 팀장이 내리는 모습을 보고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지 조수석 창문을 통해 운전석의 남자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확신에 가까운 직감이 들어 나는 냅다 달려갔다.

"서희 팀장님!"

운전석 남자와의 대화를 내가 보기에도 무례하게 끊어먹으며 등장했지만, 서희 팀장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삽시간에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서희 팀장님, 부장님이 지금 급하게 찾으십니다. 어서 올라가시죠."

"예, 예? 아... 알겠어요. 차, 창식 씨, 먼저 가세요."

"네? 거 이상하네. 출근시간보다 훨씬 일찍 왔는데 왜 그렇게 급하죠?"

처음 보는 남자가 운전석에서 조수석 쪽으로 고개를 뻐끔 내밀고 밖을 내다보았다. 뿔테안경에 정장을 차려입은, 누가 봐도 엘리트 느낌이 나는 샌님 인상의 남자였다. 나이는 30대 초반 정도 되었을까?

"급한 회의가 있나봐요... 신경쓰지말고 먼저 가세요, 창식 씨."

"흠... 그래요. 그럼 저녁에 데리러 올게요, 서희 씨."

남자는 뭔가 낭만적인 작별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는지, 좋은 분위기를 망가뜨린 나를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순간 장난기가 발동하여 서희 팀장의 핸드백을 잡아챘다.

"자, 가시죠 팀장님. 백은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네.. 네? 아니에요, 제가 들 수...."

당황하는 서희 팀장의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등을 돌려 몇 발짝 채 떼기도 전에, 뒤에서 클락션 소리가 울렸다. 돌아보니 운전석의 남자가 창문을 통해 내게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이봐요! 누군데 함부로 서희 씨 가방을 가져가고 그럽니까?"

내가 아무 말 없이 멀뚱하게 운전석을 내려다보고 있자, 약이 오른 남자가 차 문을 벌컥 열고 내렸다. 무언가 불길한 기분을 느꼈는지 서희 팀장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막아보려고 남자를 만류했지만, 그는 이미 내 앞에 떡하니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그쪽이 뭔데 내 애인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고 그러냔 말입니다."

"아,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워낙 일상적인 일이라서 별 생각 없이 그런건데 남자친구분 입장에서는 안 좋게 보일 수도 있었겠군요."

"뭐요? 일상적인 일?"

그게 무슨 소리냐고 눈을 부릅뜨는 남자. 서희 팀장은 이 상황에 낯빛이 벌써부터 새파랗게 질려있었지만 나는 재미있기만 했다.

"서희하고는 대학 다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한 사이라 이런게 좀 익숙해서 말이죠. 가방 정도는 종종 들어주곤 했습니다. 사석에서는 서로 편하게 말도 하고 지내구요. 안 그래, 서희야?"

"......으, 응."

대답하기를 꺼려하던 서희 팀장이었지만, 따로 눈치를 줄 것도 없이 지금의 상황에서 별 수가 없음을 깨닫고 곧 인정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인상이 좋아지지 않자 그녀가 해명에 나섰다.

"그게.... 친한 친구라서 그래요 창식 씨. 별로 거리끼는게 없다보니까 내가 가끔 들어달라고도 하고....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허, 허흠.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이 가방 들어주는 모양새가 썩.... 에이, 모르겠다. 나중에 따로 얘기해, 서희 씨. 나 갈테니까."

"그, 그래요. 이따 연락할게요."

똥 씹은 표정을 한 남자가 차를 몰고 사라지자, 서희 팀장이 예의 그 입술을 꾹 깨문 표정으로 나를 무시하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눈에 서린 원망과 증오를 읽을 수 있었지만, 그녀는 그걸 드러낼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남자친구분이 질투가 심한가봐요. 하하. 겨우 가방 들어주는 영광을 잠시 뺏겼다고 저런다니.... 나는 요새 서희 씨에게서 '훨씬 더 중요한' 걸 뺏고 있는데 말이에요. 흐흐흐."

".....이제 그만 해요."

남자친구와의 접촉은 그녀에게 있어서도 심한 위협이었는지,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 이 정도 했으면 충분하지 않나요? 당신 욕심도 어느 정도 채워졌고.... 내 일상을 얼마나 파괴해야 속이 풀릴 건가요? 다, 당신하고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이제 그만 좀 놔줘요."

"하하하, 서희 씨는 그렇게 감정표현을 솔직하게 할 때가 정말 귀엽다니까요. 걱정 마세요, 나도 설마 서희 씨를 평생 괴롭히기야 하겠어요? 언젠가는 나랑 얼굴도 안 보는 날이 오겠죠. 하지만 적어도 그게 지금은 아니잖아요."

"도,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걸...."

"그거야 서희 씨 하기 나름이죠. 더더욱 분발해서 내가 서희씨한테 빨리 질리게끔 만들어보는건 어때요? 밑천 다 보고 나면 시들해질 수도 있잖아요. 크크크."

주먹을 바들바들 떨어대는 서희 팀장에게 핸드백을 넘겨준 뒤 그녀의 어깨를 한번 탁 두드리고는 나는 등을 돌렸다. 몇 걸음 떼었을까? 뒤를 돌아보니 그녀는 여전히 입술을 깨문 채로 그 자리에 굳어있었다. 나는 씨익 웃으며 그녀에게 한방 더 날렸다.

"서희 씨, 제가 한번 본 걸 웬만하면 잘 까먹지 않는 편이거든요. 머리가 똑똑한건 아닌데 기억력이 좋아서요."

".... 무, 무슨...."

"010 - OOOO - XXXX , 이게 누구의 번호일까요?"

"........"

부릅떠지는 두 눈동자. 벌어지는 입술. 서희 팀장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나는 능글맞게 웃으며 검은색 SM5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남자친구분이 시대에 뒤떨어졌네요. 요새는 다이얼커버라고 해서 굳이 핸드폰 번호를 달아놓지 않아도 차주인에게 연락을 할 수 있는데.... 굳이 그렇게 대문짝만하게 연락처를 유리창에 남겨놓을 것 까지야.... 크크크."

"그, 그걸로 뭘 어쩔 셈이죠!? 그 사람에게 말했다간 당신도 무사할 수 없....!"

"워워, 진정해요. 사람들이 보잖아요."

내게 굴욕적으로 몸을 내준 이후로 그녀가 이렇게 발끈하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당황했다는 뜻일 터. 나는 내 휴대폰에 그녀의 남자친구의 연락처를 저장하는 모습을 그녀에게 직접 보여주며 웃음을 지었다.

"잘 봐요, 서희 씨. 서희 씨가 내가 원할 때 까지만 내 말을 고분고분하게 들어주면서 같이 즐기면 우린 서로 아무 문제가 없을 거에요.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내가 예전에도 말했죠? 우리가 요새 하고 있는 것들을 실시간으로 남자친구분께 보여주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고.... 말하자면 일종의 안전장치죠, 뭐. 서희 씨는 똑똑한 여자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거라 믿어요."

"........"

너무도 분하고 두려운지 서희 팀장의 눈에 눈물 한 방울이 글썽거렸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야릇한 흥분을 주어 지금이라도 사내 으슥한 곳에 데려가 욕구를 풀고 싶었지만 오늘은 따로 할 일이 있으니 참기로 했다.

"그럼 좋은 하루 보내요, 서희 씨. 오늘은 남자친구와 오붓한 데이트하게 내가 손 안 댈테니 실컷 즐기구요, 내일은 평상시처럼 점심 시간에 내 좆물 한번 빼주러 오는 겁니다. 하하. 그럼 이만."

굳어진 서희 팀장을 등 뒤에 두고 나는 다시 가벼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만사가 즐겁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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