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20)

금요일 밤 여덟시경

비밀요정 ‘우미옥’의 안가에는 네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번 회동의 주재자는 이민재 였다.

대현그룹 ‘정중헌’회장과 그의 비서실장 ‘박성재’, 그리고 대현생명 ‘이희도’사장과 ‘이민재’의 이 회동은 민재가 박성재 비서실장에게 긴급 회동제안을 함으로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박실장에게 제안을 하면서도 정중헌 회장이 참석할 걸로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은행장과의 약속을 미루고 왔다는 정회장의 참석은 민재로서는 상당한 의외였다.

“내년 오월경에 사우디아라비아 젯다 인근에 대형 발전소를 건설한다는 사우디 정부의 공개입찰 발표가 있을 것입니다.” 민재가 서두를 꺼낸다.

“박실장. 보통 사우디 정부가 발주하는 발전소의 공사 금액이 어느 정도나 되나?”

“네 회장님! ‘삼정 건설’에서 수주하여 1년전에 완공된 사우디 정부에서 대형이라고 칭하는 ‘리야드’ 발전소의 전체 공사비가 약 20억불 이었습니다.”

정회장의 질문에 막힘없이 바로 응답을 하는 은테 안경을 쓴 40대 초반의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박성재 비서실장은 대현그룹의 파워랭킹 다섯번째 안에 드는 막강한 실력자이다.

“흠~..20억불이라..많군... 그런데 이팀장님! 발전소 건을 수주할 가능성은 얼마나 되죠?”

정회장이 진지한 얼굴을 한다.

“공사 발주 권한을 쥐고 있는 사우디의 ‘마하드’제 3왕자를 만나봐야 정확한 데이터가 나오겠지만 현재 합작투자를 검토 중인 두바이 ‘세이크’왕자의 지원만 확실하다면 50%이상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년 초에 젯다에서 ‘세이크’와 ‘마하드’를 만나기로 잠정 약속한 상태 입니다.”

“흠~ 좋는 소식이군요. 이번에도 삼정에 빼앗기면 안돼죠. ‘리야드’발전소 말고도 지난번 시리아 철도 설비도 막판에 삼정에 빼앗기지 않았나요? 맞지 박실장.”

“네! 회장님. 건설 영업부의 이년에 걸친 영업으로 저희 대현과 사인하기 직전에 삼정에서 치고 들어 왔죠. 이광박 대통령의 중동 방문에 묻어서..대통령궁의 압력으로 시리아 철도청은 삼정의 손을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으음~..” 그때의 기분 나쁜 기억이 되살아나는지 정회장의 이마가 찌푸러진다.

‘대현’의 오너인 정회장은 ‘삼정그룹’이라는 존재에 대해 상당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대현그룹의 창업주인 고 ‘정두영’회장의 창업 초창기인 일제시절부터 ‘삼정’과 ‘대현’의 라이벌 관계는 시작되었다.

해방후 ‘대현건설’로 기업을 일으킨 ‘대현그룹’과 ‘삼정상사’로 돈을 모은 ‘삼정그룹’은 90년대 중반 까지만 해도 국내 기업순위 1위와 2위자리를 놓고 엎치락뒤치락 하던 호각세였다.

그러던 것이 ‘삼정’의 1위 독주체제가 굳어진 것이 90년대 후반부터이다.

이는 ‘이건후’ 2대 삼정회장의 걸출한 경영능력도 있었지만 고 ‘이성철’ 창업주 때부터 꾸준하게 인재에 투자해온 결과물로 소위 ‘삼정 장학생’이라고 불리는 엘리트들 덕분이었다.

‘이성철’회장은 전국의 많은 수재들에게 막대한 장학금을 지급하며 교육과정 전반에 걸쳐 장학생들을 지원하는 재단을 설립한다.

이 재단에서는 장학생들의 교육비는 물론 생활비까지 지급하는 광범위한 지원으로 경제가 어렵던 군사정권 시절에 수많은 수재들이 삼정의 혜택을 입는다.

그리고 이성철 명예회장은 그 장학생들과의 만남을 일년에 수차례씩 가지며 그들에게 삼정의 패밀리라는 인식을 심어주는데 성공한다.

삼정 장학생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한 후에도 삼정그룹과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하며 그룹의 외곽에서 삼정의 이익을 위해 노력한다.

정치계와 재계 그리고 법계와 문화계등 사회전반에 걸쳐 포진되어 있는 삼정 장학생들의 파워는 ‘이성철’창업회장 사후(死後), ‘이건후’ 회장 취임 초기부터 그 힘을 발휘하기 시작해 현재는 한국을 이끌어가는 또 하나의 정부가 삼정그룹 비서실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막강해 졌다.

정부 발주 사업은 물론 각종 이권들까지 불법, 합법을 가리지 않고 삼정에 몰아주며 입법단계부터 삼정에 유리하도록 로비를 펼치는 삼정 장학생들과 뒤에서 그들을 지원하는 삼정의 불법 카르텔은 이미 그 도를 넘어 의식 있는 많은 국민들의 지탄을 받고 있다.

하지만 금력과 권력, 그리고 국정원까지 아우르는 막강한 정보력으로 공고하게 쌓은 그 철옹성을 건드릴만한 배짱과 능력을 갖춘 단체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야심만만한 젊은 오너인 정중헌 대현 회장은 그런 삼정의 독주체제를 비판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1위 탈환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과거 ‘삼정’이 승용차시장에 진출할 때부터 생긴 앙금이다.

90년대 후반,

삼정 장학생 정치인들의 힘을 빌어 ‘대현’이 1위를 달리고 있는 승용차시장에 뛰어든 삼정은 대현을 수없이 괴롭혔었다.

결국 ‘대현 자동차’의 성능과 영업력에 한계를 느낀 ‘삼정’이 지금은 승용차시장에서 한발 물러난 모양새를 취하고 있지만 과거에 입은 자존심의 상처는 정회장 가슴 깊은 곳에 남아있다.

그런데 그런 ‘삼정’이 근래에 들어서는 ‘대현’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 건설에서도 대현을 계속 골탕 먹이고 있다.

국내, 해외의 건설시장을 막론하고 정치인들의 파워를 앞세운 ‘삼정건설’의 저돌적인 공세에 밀려 몇 번씩이나 거의 다 이루어진 건설 계약을 삼정에게 빼앗기고 있는 ‘대현건설’의 임직원들은 요즘 자존심이 많이 상한 상태고 정중헌 회장은 더욱 그렇다.

“이번에는 무슨 수를 쓰든 삼정을 이겨 내야해..할 수 있지요. 이팀장님?”

“네! 회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발전소와 함께 건설되는 초대형 해수담수화설비가 문제입니다. 그 설비도 10억불 정도 예상되는데 아직 ‘대현’에는 담수설비 공사 실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민재의 말을 들은 정회장의 안색이 더욱 나빠진다.

해수담수화 기술은 삼정중공업이 세계최고의 노하우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최근 몇년간 사막이 많은 아랍국에서 삼정이 발주 받은 담수화설비실적도 상당하다.

담수화설비문제는 건설영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발주정보를 타 업체보다 한발 앞서서 인지한 상태로도 까딱하면 삼정에 발전소 공사를 빼앗길 수도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번에는 우리 ‘대현건설’이 발전소를 수주해야 합니다. 지금 이상태로 계속 삼정에 밀리다가는 ‘중동의 대현, 대현의 중동’이라는 별명을 가진 우리 대현건설이 중동에서 사라질지도 몰라요. 박실장은 지금 이 시간부터 이팀장과 협력해서 수주를 받아낼 방법을 연구하도록 해..그리고 이팀장님도 바쁘시겠지만 더 힘써 주시구요..”

“네, 회장님,”

“노력하겠습니다.”

“허~ 이번 두바이 선박건도 그렇고..또 사우디 발전소까지..내가 이팀장에게 계속 신세를 지고 있네요. 이팀장님 제가 뭐 도움드릴 만한 일이 없나요? 뭐든지 말씀만 하세요. 제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릴께요.” 정회장이 노련한 말솜씨로 민재를 띄어준다.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회장님.”

“박실장!”

“네. 회장님!”

“박실장은 그룹차원에서 이팀장을 도울 수 있는 방안이 뭔지..그것을 연구해서 나한테 보고해줘..빠른 시간내에..”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민재와 박실장의 눈이 부딪히고 박실장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머문다.

“그건 그렇고..이 팀장님께서 이희도 사장님까지 부르신 목적이 대현생명에 대해 뭔가 할 말이 있어서라고 들었는데요?”

정회장이 화제를 바꾼다.

정회장이 오늘 회동에 참석한 이유가 바로 대현생명 홍회장에 관해 민재가 할 말이 있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때문이다.

“네! 회장님 먼저 서류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 서류는 제 밑의 장만호 과장이 제 메일로 보낸 사직서 내용을 프린트한 것 입니다.”

말을 끝낸 ‘민재’가 A4용지 열장 남짓의 서류 3부를 각각에게 나누어 준다.

서류를 넘기는 ‘이희도’ 대현생명 사장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정회장도 좋은 안색이 아니다. 박실장만이 평소의 표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 서류 내용에는 홍재경이 공금을 유용한 것과 석유 시추 회사에 독단적으로 투자한 내용과 입금 계좌의 사본 그리고 입금증을 위조해서 ‘로라 컴퍼니’로 보낸 내용과 위조된 입금증 복사본까지 있었고 그것을 함께 공모한 경리부와 총무부 직원의 이름까지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그런데 홍재경이 장만호에게 입금한 천백만 달러에 대한 내용은 한구절도 없었다.

다만 마지막 장에 홍상무가 자신이 저지른 일을 모두 ‘이민재팀장님’에게 뒤집어씌우려 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 나머지 모든 내용을 털어 놓게 되었다는 구절만이 첨부되어 있었다.

“이사장님 이일을 어떻게 처리 할까요?” 서류를 모두 읽은 정회장이 묻는다.

“회장님! 이번일은 외부로 노출되면 안됩니다. 저희 대현생명뿐 아니라 그룹 전체의 신인도에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신중한 사안입니다. 조용히 그룹 내부적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역시 명석한 이희도 사장이 금방 핵심을 파악한다.

“사장님 말씀이 옳습니다. 이라크 석유회사에서 이일을 알게 되면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제가 로라컴퍼니 대표와 협의를 해 봤습니다. 천만 달러를 대현생명에서 대납한다면 로라 컴퍼니에서는 자신들의 단순한 서류착오라고 석유회사 담당임원에게 사과하고 석유회사에 제대로 된 본계약서를 넘겨주기로 로라 컴퍼니 대표와 입을 맞추었습니다. 대신 그 대표가 삼백만 달러정도의 커미션을 요구하더군요...담당 임원에게 찔러 줘야 한다면서.. ”

“그래요? 천만 다행이군요. 수고 했어요 이팀장님. 커미션은 일단 먼저 비서실에서 지급하도록 박실장이 월요일에 처리해 주고 나중에 홍회장에게 징수하도록 하지..그리고 보험 납입금은 이희도 사장님 전권으로 대현생명내부에서 대납하고 추후에 홍회장의 자산으로 압류하면 되겠지...그럼 되겠죠. 이사장님?”복잡한 자금 문제를 단칼에 정리를 하고 정회장이 말을 이어간다.

“그리고 홍상무와 홍회장은 어떻게 처리를 하면 좋을까요?”

정회장의 질문에 박실장과 이사장모두 입을 닫는다.

정회장의 눈이 ‘민재’에게 향한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일단 이 메일 내용을 ..”

한참을 이어지는 ‘민재’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인다.

다시 한번 박실장이 민재의 눈을 바라보며 웃는다.

네 말이 바로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이지만 분위기상 네가 해야할 것 같아서 입을 다물고 이었다. 라는 의미를 담고서..

“박실장님. 그룹 특별감사팀의 감사요원들을 소집하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요?”박실장의 미소에 용기를 얻은 민재가 질문을 한다.

“글쎄요. 사안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틀정도면 소집 가능합니다. 왜요 그룹 직속 특별감사팀까지 이용하시게요?” 박실장이 또 미소를 짓는다.

“박실장! 이팀장님이 요구하는 대로 들어줘..”

“네 회장님! ..그럼 감사팀을 월요일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춰 소집해 놓겠습니다.”

“하하하! 그럼 이제 끝난 건가요. 이팀장님.”

“네! 회장님.”

“그럼 이제부터 개운한 기분으로 한잔 합시다. 다들 어때요?”

정회장이 분위기를 잡는다.

잠시 후 톱탈렌트 저리가라 할만큼 아름다운 아가씨들 네명이 ‘우미옥’ 여사장인 ‘이연주’와 함께 방으로 들어온다.

‘민재’를 바라보는 이연주의 시선에 웃음기가 담겨있다.

짤랑거리는 아가씨들의 웃음소리와 함께한 우미옥의 술자리가 끝난 시간은 밤 11시경이었다.

불타는 금요일,

밤 12시가 가까워 오는 시간임에도 ‘이카루스’의 열기는 뜨거웠다.

각 코너의 스탠드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이 빼곡하게 손님이 몰려 있었다.

‘강민희’와 ‘문영선’ 그리고 민재의 후배이자 ‘로민 솔루션’의 증권부 부장직함을 가진 ‘최동건’이 함께 있었다.

강민희가 민재를 발견하고 손을 들어 여기라는 표시를 한다.

탁자에는 큰 양주병이 반정도 비어 있었다.

“영선씨! 사무실 구경은 했어요? 어때요.?”

“사무실 집기도 모두 새것이고...넓고 좋던데요. 근데 우리 네명이 쓰기에는 너무 커요..호호”

“금방 인원이 충원될 거에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민재가 술을 따라주며 이야기한다.

“동건아! 근데 철주는 어디갔냐?”

“형님이 알아보라는 것 때문에 오전에 평택에 내려갔어요. 아까 올라오고 있는 중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 찾았다고 하든?”

“네~..형님 메일로 약도하고 주소 전송했다던데 못보셨어요?“

“응..오늘은 좀 바빠서 메일 확인도 못 했네.”

“팀장님! 농담이 아니고 이제 팀장님도 이제 비서가 있어야 겠어요. 대현 생명 일에 두바이 선박건, 그리고 이제 ‘로민 솔루션’ 일도 챙겨야 하잖아요..”

조용히 있던 ‘민희’가 진지한 눈으로 민재를 바라본다.

“하하 ..생각해 볼께요. 민희씨. 자 한잔 하세요~”

“얼버무리지 마시구요. 진짜 진지하게 생각해 봐요. 알았죠?”

‘민희’는 요즘 부쩍 ‘민재’를 챙기려고 한다.

술이 두어 순배 돌았을 무렵 ‘한승희’가 서비스라며 과일 안주를 들고 와서 합석을 한다.

‘승희’에게 술을 따라주던 ‘민희’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저 실장님! 우리 언제 만나지 않았었나요?”

“아니요. 초면인데..제가 사람얼굴을 웬만하면 잊지 않거든요.호호.”

“그런가요? 어디서 뵌것 같은데..”

“호호..제가 평범하게 생겨서 그래요..호호호”

“아니예요.너무 예쁘신데요..호호”

“민희씨도 참 아름다우세요. 호호..한잔 더 드세요.”

두달전 지하철에서 민재의 손에 만져지면서 쾌감을 표하던 ‘승희’의 얼굴이 기억 날듯 말듯한 ‘민희’였다.

“흥~ 여자가 한둘이래야 말이지..”

자리에서 일어난 승희가 카운터로 가며 낮게 중얼거린 것을 들은 사람은 ‘민희’밖에 없었다.

‘무슨 소리지?..’

“꺄아~..너무 좋아요.. 단풍도 멋지구요..”

조수석의 민희가 열여섯 소녀마냥 신이 나서 소리친다.

어젯밤을 함께 보낸 민재와 ‘민희’는 토요일 아침 아직은 조금 한산한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히히~ 어제는 오빠 아파트도 첨으로 가보구..아침에 신나게 드라이브도 하구..넘 좋다..야호~히히”

‘이카루스’의 술자리는 영선이 먼저 간다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동건이 그녀를 데려다 준다며 급하게 따라 나가는 통에 끝나게 되었다.

‘동건’은 동글동글 귀여운 ‘문영선’에게 호감을 느낀 듯 술자리 내내 그녀를 챙겼다. 영선도 동건이 싫지 않은 듯 했고..

두 명이 자리에서 빠져나간 뒤 민재는 민희를 데리고 아파트로 왔는데, ‘민재’의 아파트에 처음 와보는 ‘민희’는 데리고 와주어서 고맙다며 감격했다.

‘오연수’와는 몇 번 아파트에서 밤을 보냈는데 어쩌다 보니 ‘민희’는 그 동안 그녀의 오피스텔에서만 섹스를 하게 됐었다.

‘민희’의 감격한 표정을 보며 ‘민재’는 조금 미안해했었다.

“참내~ 드라이브가 아니고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거라니까. 그 사람을 만나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데.. 길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따라왔어?”

“갠차나~ 갠차나~ 차에서 음악 듣고 기다리면 되지 머~..히히”

언발란스하게 숏커트한 머리를 차창 밖으로 내밀어 찬바람을 맞으며 즐겁게 소리치는 ‘민희’의 모습을 바라보는 민재의 마음에 참 마음도 얼굴도 몸매도 예쁜 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해수담수화 특허 문제로 5년전에 ‘삼정중공업’과 법정분쟁까지 갔었던 업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낸 것은 순전히 ‘삼정그룹’에 관한한 어느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민재’의 삼정스토커 기질 때문이었다.

물론 그 업체는 당연하게 ‘삼정중공업’에게 처참하게 패소했다.

민재는 그 업체를 찾으라는 지시를, 증권가 찌라시 정보원 출신인 ‘로민 솔루션’의 직원 ‘한철주’에게 했고 철주는 자기 특성을 살려 오래전에 증권가에서 떠돌던 찌라시 문서를 뒤져서 ‘두강개발’ 이라는 업체를 찾아냈다.

지금 민재가 가는 곳이 평택의 포승공단 내에 있는 ‘두강 개발’ 이었다.

열려진 차창으로 몰려 들어오는 11월 중순의 바람은 차가웠다.

‘민재’가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미리 통화를 한 상태라 ‘두강개발’ 오성식 사장은 직원들이 모두 쉬는 토요일에도 공장에 나와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린 50대 후반의 오사장은 작업복을 입고 ‘민재’와 ‘민희’를 맞았다.

“그래.. 해수담수화에 대해 저에게 물어볼 말이 있으시다고요?”

“네, 제가 이번에 담수화 프로젝트를 맡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특허문제에 대해서도 여쭤보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흠 ..특허 문제는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데.. 좋은 기억이 아니거든요..”

“삼정하고 관계된 일이라는 것은 대충 알고 왔습니다. 어떻게 된 것인지..그리고 사장님의 특허권은 아직 살아 있는지 궁금하군요. 결코 사장님께 피해가 가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여기서 더 피해 입을 일이 뭐가 있겠소..”

허탈하게 웃은 오사장입에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직 특허권은 살아 있지요..비록 유명무실한 서류 쪼가리로 변했지만..

오성식은 대학에서 기계와 화학을 복수 전공하고 졸업 후에 수자원공사 설비 연구팀으로 입사했다.

15년 동안 수자원공사에서 근무하던 그가 사표를 내고 나와서 해수담수화설비 연구를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마흔 둘이 되는 1995년이었다.

7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2002년 전기 투석식(ED:Electrodialysis method) 담수설비를 자체 개발하고 특허를 받았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임야를 처분해 ‘두강개발’이란 작은 회사를 설립하고 국내의 정수회사에 소형의 전기 투석식 정수 장비를 제작해서 팔았다.

당시에는 전기 투석식 담수설비가 해수담수화가 아닌 정수기에 장착되는 소형 정수용으로 상당한 인기를 끌었었다.

문제가 생긴 것은 회사가 한창 잘나가던 2004년 이었다.

오성식과 함께 연구를 진행하던 연구실의 이사와 제품 개발실의 실무자 다섯명이 동시에 퇴사를 하고 삼정 중공업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자신이 개발한 전기 투석설비와 거의 똑같은 설비를 가지고 삼정중공업 명의로 실용신안 등록절차를 밟고 있었다.

배신감에 치를 떨던 오성식은 곧바로 법원에 조정신청을 했고 법정공방으로 이어졌다.

3년간 지루하게 이어진 법정공방은 결국 삼정중공업의 손을 들어주었다.

똑같은 내용의 설비가

하나는 특허로 등록되고

또 하나는 실용신안으로 등록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한국법원에서 승인해준 것이다.

“삼정 비서실의 파워..정말 대단하더군요..내가 제출한 설계도와 한치도 틀리지 않는 설계도를 부품이름만 바꿔 재판부에 제출하고서도 결국 승소를 이끌어 내더군요. 그리고 그 후에도 비서실에서는 삼정 SDI라는 업체를 통해 저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견제하더군요. 덕분에 상장되었던 주식의 가격은 곤두박질치고, ‘삼정’의 입김으로 은행의 대출도 못 받고 투자자들도 삼정이라는 이름에 겁을 먹고는 투자금을 모두 회수해서 지금은 직원들 20명정도만 데리고 근근이 공장을 운영하고 있구요. 허허~ 삼정 중공업은 제가 만든 담수화설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이 되었더군요..”

말을 마친 오사장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감돈다.

“참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군요. 오사장님 !..세계 초일류 기업이라는 광고를 하는 회사가 기업윤리의식은 저 밑바닥에 쳐 박아 두고 있군요..”

“허허..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젊은이도 저처럼 당하면 어쩌시려고..허허”

“하하하..그런 가요..? 그럼 저도 입조심 해야 겠네요. 민희씨! 제가 했던 말, 어디 가서 소문 내시면 안돼요..알았죠?”

“아유~ 팀장님도 참~..호호호”

“허허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과장되게 몸을 움츠리는 민재의 너스레에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 졌다.

“오사장님 전기투석식 설비 좀 볼 수 있을까요?”

“허허~ 삼정중공업에서 TV광고로 수없이 방송했던 것을 봐서 뭐하시게요. 그리고 우리 회사에 있는 것은 TV에서 나오는 것보다 훨씬 작고 초라해요. 그거라도 보시겠소?”

오성식이 공장 내부로 일행을 안내해서 커다란 사각의 수조속에 설치된 장비를 보여 준다.

“이 설비가 예전에 제가 만들었던 전기투석식 담수화 설비요. 이 수조 속에서 48시간정도 음전기와 양전기를 나누어 공급하면 해수가 담수로 변하죠. 그런데 전기투석식 담수설비는 해수를 담수화 하는데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이 많이 들어요. 하긴 뭐~ 그것도 예전에 사용하던 증류식이나 삼투압식 보다는 훨씬 저렴하지만.. 요즘에는 그런 고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전기흡착식(CDI-Capacitive Deionization)설비를 제가 연구 중이거든요.“

“전기흡착식 이라뇨? 금시초문인데요.”

“한번 보시겠소.?”

“설비를 만드셨단 말씀이세요?” 민재가 깜짝 놀라 소리친다.

“여러번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한달전 쯤에야 겨우 시험설비를 완성했어요. 그걸 만드는데 삼년정도 걸렸군요. 아직 보완할 것이 몇 가지 있기는 하지만... 여기 이것이 전기흡착식 담수 설비요.”

오사장이 가리킨 것은 조금 전에 본 전기투석식 설비 곁에 있는 높이 2m, 길이6m정도의 기계로 투석식 설비의 10분의 1도 안되는 크기였다.

“크기는 작아도 똑같은 시간에 투석식의 열배 이상의 해수량를 담수화 할 수 있는 설비죠. 한번 작동하는 것을 보시려오?“

마치 장난감을 자랑하는 어린 아이 같은 들뜬 표정으로 오사장이 말을 건낸다.

“안 그래도 부탁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오사장이 전원스위치를 넣자 기계음이 들리며 몸체가 살짝 진동을 시작한다.

“바닷물이 담수로 변하려면 약 4시간정도 시간이 걸려요. 저쪽에 기계입구 쪽에 설치된 물탱크의 물이 바닷물인지 맹물인지 확인해 보시겠소?”

‘민희’가 손가락으로 탱크안의 물을 찍어서 맛을 보더니 인상을 찡그린다.

“아으~짜요..”

‘민재’가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급하게 전화를 한다.

“여보세요~ 형! 저 민재요.. 여기 포승공단인데 형이 빨리 내려와서 봐야 할게 있어요”

...

“진짜 꼭 봐야 한다니까요. 형도 와보면 깜짝 놀랄 거예요. 여기 주소 보낼 테니까. 빨랑 와요. 후회하지 말고..”

전화를 끝낸 민재가 오사장을 보며 말한다.

“기계에 대해 잘 아는 선배가 있는데 그 분이 이것을 보면 사장님과 저에게 커다란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허허! 그래요..”

“담수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전기흡착식에 대해 조금 설명을 부탁 드려도 될까요?”

“바닷물은 무기질..” 오성식의 설명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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