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화가에 있는 식당에 도착했고 셋은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언니, 언니는 결혼생활 재밌어요?" 지윤이 물었다.
"응. 그럼."
"정말? 엄청 행복하겠네요?"
"그렇지 뭐. 그냥 행복해. 하하." 별거 아닌 질문이었지만 쉽사리 긍정을 못 하는 가현이었다.
"하하. 가현씨 행복하시겠지, 2년이면 아직 신혼인데." 승도가 거들었다.
"네. 맞아요." 가현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술 한잔 하실까요? 지윤이 오늘 술?"
"제가 언제 술 싫다는거 봤어요? 사장님?"
"그래 그럼 소주?"
"당연하죠."
"가현씨도 소주 드세요?"
"아니요. 전 술 잘 안 먹어서."
"에이, 언니 왜 그래요. 그럼 맥주라도 마셔요."
"그래. 그럴까?"
술을 주고 받으며 음식을 먹기 시작했고 승도와 지윤이 각자 한 병씩 비워냈다.
"언니, 소주는 한 번도 안 마셔 봤어요?"지윤이 물었다.
"아니, 옛날엔 조금 마시긴 했는데 결혼하고는 안 마셔서."
"마실 줄 아네. 그럼 한 잔 해요. 언니도." 빈 잔에 소주를 채우며 지윤이 말했다.
"아니야. 괜찮아."
"언니, 재미없어요, 회식인데, 사장님이 이렇게 소고기도 사주잖아요, 소고기 먹는데 소주 안 먹으면 말이 안돼지. 조금만 마셔요."
"그래요. 가현씨 한 두잔 정도만 해요." 승도가 말했다.
"그럼. 조금만 마실게요." 둘이 권하는 걸 거부 할 수 없던 가현은 술잔을 자신의 앞으로 가져 오며 말했다.
"자, 그럼, 짠 해요 언니." 지윤이 잔을 들며 말했다.
음식을 다 비우고도 지윤과 승도는 술을 계속 마셨다. 두 사람이 각 두 병씩 마셨고 가현은 지윤의 성화에 못 이겨 반 병 정도를 마셨다. 가현은 어질어질 했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술기운과 술자리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기분전환도 되는 느낌이었다. 지윤은 술을 좋아하는 것과는 다르게 이미 많이 취한 상태였다. 혀가 꼬여있었고 몸이 갈팡질팡했다.
"오빠! 이렇게 키도 크고 몸도 좋고 돈도 많은데. 왜 결혼 안해요?응?"
"하하. 지윤이 또 시작이네. 몇 번 말하니. 할 때되면 한다니까."
가현도 승도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 동안 카페에서 함께 일하며 친해진 승도지만 그의 개인적인 일은 잘 모르고 있었다. 지윤의 질문에 승도의 대답이 궁금해진 가현이었다.
"그러게요. 사장님은 여자친구 없으세요?"
"없어요. 하하. 카페랑 운동만 해요. 저."
"왜 없으세요?"
"글쎄요. 모르겠네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아직 없나봐요. 가현씨가 한 명 소개 시켜주세요. 가현씨만큼 이쁜 여자로. 하하."
"예? 제가요? 주변에 없는데, 저같이 이쁜여자..." 술기운에 가현은 평소에 하지 않는 농담을 했다.
"오. 역시 미인은 자기가 미인인 걸 안다니까."
"하하. 농담이에요. 무슨 제가 미인이에요."
"언니, 겸손도 지나치면 민폐에요. 언니, 이쁘고 키크고 몸매도 좋고, 남편 분이 횡재한거지 뭐." 눈이 풀린채 지윤이 말했다.
"그럼요. 가현씨 남편 분이 엄청 횡재한거죠. 가현씨 한테 진짜 잘 해 줄 것 같아요."
"안 잘 해줘요. 맨날 싸우는데요 뭘."
"아니, 가현씨랑 어떻게 싸워요? 이렇게 착하고 미인이신 분이랑. 화도 안 내실 것 같은데 가현씨는."
"아니에요. 맨날 제가 화내고 저 혼자 토라지고 그래요." 속상한 마음이 가현의 얼굴에 언뜻 내비쳤다.
"아. 취한다. 취해. 사장님 오빠. 우리 맥주 한 잔 더해요 2차 가야지 2차."
"그래? 그럴까? 가현씨 2차 가실까요?"승도가 화답했다. 주량이 쌘 승도는 알딸딸한 정도였지 취한 정도는 아니였기에 술이 조금 더 필요했다.
"아. 아니에요. 전 이제 들어가야 되서..." 술 기운에 잊고 있었던 남편의 연락이 기억이 났다. 가방에 넣어둔 핸드폰을 살짝 보았지만 문자도 전화도 와 있지 않았다.
"저 잠깐 화장실 좀요." 전화기를 들고 화장실에 간 가현은 남편 정진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전화가 이어지진 않았다.
'어디야?' 문자를 보내고 화장실에서 나와 자리로 돌아왔다.
"그럼, 지윤이랑 저랑만 간단하게 맥주 한 잔 더 해야겠네요. 잠깐 기다리죠. 대리기사 부를게요. 모셔다 드릴게요,"
"괜찮아요. 저 택시타면 돼요."
"아니에요. 그냥 기다렸다가, 같이 가요. 모셔다 드릴게요."
"오케이! 그럼 대리기사 오는동안 남은 술 마셔요." 지윤은 남은 소주를 승도와 자기 잔에 채웠다.
가현은 오랜만에 가진 술자리의 기운이 나쁘지도 않았고, 기분전환도 되었고, 지윤 때문에 말 할 기회도 놓쳐 둘이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며 분위기를 즐겼다.
맥주와 남은 소주를 마시고 있을 때 즘 대리기사가 왔고 셋은 자리에서 일어 났다. 차에 올라탔고 대리기사에게 가현의 집으로 가자고 승도가 말했다. 뒷 자리에 가현과 지윤이 앉았다.
"아. 갑시다. 2차아아." 혀가 꼬일대로 꼬인 지윤이 다 죽어가는 말투로 말 했다.
"지윤아. 괜찮아?" 가현이 쓰러져 가는 지윤의 얼굴을 보며 말 했다.
"네..그험효..저 안추했어여."
얼마 안있어 가현의 허벅지로 지윤의 머리가 내려 앉았다. 지윤이 인사불성이 되었다.
"얘, 지윤아, 얘. 일어나봐. 정신차려."
"으으으으음."
가현의 말에 지윤은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사장님, 지윤이가 많이 취했어요. 집에 대려다 줘야 할 것 같아요."
승도가 뒤를 돌아보았다.
"으이그, 또 저리 됐네. 사장님, 중간에 XX로 가주세요. 가현씨 지윤이 사는 데가 더 가깝거든요? 먼저 대려다 주고 가현씨 집으로 갈게요."
"네." 지윤의 얼굴을 보며 가현이 대답했다.
지윤의 집에 도착하자 승도가 내려 지윤을 차에서 끄집어 내렸다.
"야, 정신차려, 지윤아, 집이야 집."
"으으으음." 대답도 못 하는 지윤을 억지로 끌어 내린 승도가 문을 닫기 전 말 했다.
"잠시만요. 지윤이 어머니한테 문자 드려놨어요. 지윤이 대려다주고 금방 올게요. 기다리세요. 기사님 금방 올게요."
승도는 비틀거리는 지윤을 부축하고 사라졌다. 가현은 가방에 있는 스마트폰을 꺼내 보았다. 정진에게 온 문자가 있었다.
"나 지굼 업ㅊ ㅔ 살람 둘이랑 술 마셔, 오늘 못 가 것 가타."
문자를 보자마자 화가 난 가현은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음만 갈 뿐 전화는 받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정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오늘 일에 외박까지 한다고 하니 화가 가라 앉지를 않았다. 신호음이 울리고 있는 중에 승도가 오는 것이 보였다. 가현은 전화를 끊고 전화기를 가방에 넣었다.
"잘 들여 보냈어요. 이제 가시죠."
가현은 아까처럼 뒷자석에 올라 탔다. 승도 또한 뒷자리에 올라 탔다.
"기사님, 죄송해요. 기다리게 해서. 이제 가시죠."
가현은 화도 나고 남편이 신경쓰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현씨 괜찮으세요?"
"네? 뭐가요?" 가현이 움찔하며 대답했다.
"아, 술 마신거요. 오랜만에 드셨다길래 괜찮으신가 해서요."
가현은 들키면 안되는 일을 들킨 것 같아 덜컹했으나 승도가 한 질문의도를 알자 자기도 모르게 안도했다.
"그럼요. 오늘 재밌었어요. 오랜만에."
"그래요? 다행이네요. 많이 안 취하셨죠?"
"네. 조금 취했는데, 이 정돈 괜찮아요."
"좋네요. 괜히 남편 분한테 혼나는거 아닌가 해서요. 하하." 아무것도 모르는 승도였다.
"혼나긴요. 아니에요. 하하." 가현도 따라 웃었다.
"그럼, 저랑 둘이 2차 가실까요? 지윤이 자식 마시기로 해놓고는 혼자 저렇게 되서는, 사람 기분 들었다 놨다 하네요."
"네? 2차요?"
"힘드세요? 아직 10시 조금 넘었는데, 괜찮으시면 가현씨 집 근처에서 한 잔 더 해요. 저 아직 술이 조금 부족해서요. 혼자 마시고 싶진 않고.."
"아..."
바로 집에 가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남편 때문에 난 화, 오랜만에 느낀 화기애애한 술자리 분위기, 그리고 오늘같은 날 불꺼진 집에 들어가 혼자 있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가현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던 승도가 말을 이었다.
"맥주 한 잔인데요. 뭐. 사는 얘기도 하고요. 오늘 저 바지 젖은거 이걸로 퉁 치죠."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승도였다.
"그럼, 한 잔만 마시고 갈까요?"
"그러실까요? 그러죠. 그럼."
승도는 가현의 집근처에 있는 번화가 쪽으로 가달라고 기사에게 말 했고 차는 가현의 집이 아닌 술집들이 모인 번화가로 향했다.
가현과 승도는 조그마한 술집에 마주보고 앉았다. 각자의 앞에는 500잔과 간단한 안주가 놓여있었다.
"자, 짠 하시죠."
둘은 술잔을 부딪히고 맥주를 마셨다. 술 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갑갑한 기분 때문인지 차가운 맥주가 목을 타고 가슴 속을 내려가는 기분이 가현은 나쁘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맥주의 3분의 1을 마셨다. 결혼 전 정진과 데이트를 하면서 잘 마시지 않게 된 술 이었다. 잊고 살았던 뭔가를 찾은 기분까지도 들었다.
"와. 잘 마시네요, 가현씨."
가현의 마시는 모습을 본 승도가 약간은 놀란 눈치로 말했다.
"아니에요, 오랜만에 마시니 맛있나 봐요. 하하." 가현이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시구나. 어때요. 일은? 할 만해요?"
"네. 할만 한 것 같아요. 사장님이 잘 가르쳐 주시기도 하고, 지윤이도 가끔 알려주고 그러니까요."
"제가 뭘요. 가현씨가 소질이 있더라고요. 이렇게 빨리 배우는 사람 처음 봤어요. 센스가 있어요. 가현씨가. 그러니까 빨리 배우죠."
승도가 웃으며 가현의 칭찬을 해왔다. 가현이 근래에 들어 받은 유일한 칭찬이었다.
"감사합니다." 가현의 입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가현씨가 잘 하시는건데요. 뭐. 자 짠 하시죠."
둘은 웃으며 다시 맥주잔을 부딪혔다. 일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둘의 잔이 비어 갔다.
"가현씨, 소맥하세요? 전 소맥 좋아하는데."
"소맥이요? 안 마신지 오래되서, 전 그냥 맥주만 마실게요."
"그래요? 역시 소맥은 안 되시는구나, 술 쌘 줄 알았는데. 사장님, 여기 맥주 두 병, 500 한 잔 주세요."
곧 이어 승도가 주문한 술들이 나왔고 승도는 능숙한 솜씨로 소맥을 두 잔 말았다.
"맛 없는 500 말고 이거 한 잔 해 보세요. 천천히 드셔도 되니까. 어차피 500 한 잔 마시나 그거 소맥 한 잔 마시나 비슷해요."
자신이 만든 소맥을 가현의 앞에 가져다 놓았고 자신의 술잔을 바로 들었다.
"자, 다시 짠!"
가현은 반사적으로 오백잔에 있던 손을 소맥잔으로 옮겨 들어 승도의 잔과 부딪혔다. 이미 술기운이 어느정도 오른 가현에게는 소맥도 나쁘지 않았다. 소맥 또한 정말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었다. 대학시절 동기나 친구들과 술 마시며 놀던 옛날 생각이 잠깐 떠 올랐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둘의 잔은 조금씩 비어져 갔다. 일상적인 이야기와 일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다 자연스레 승도의 사적인 이야기로 넘어가게 됐다. 승도는 잘 나가던 증권가 회사원이었고 독립해서 젊은 나이에 자신의 사업까지 일군 사람이었었다.
하지만 몇 년전 사업이 크게 손실을 입었고 동업을 하던 사람에게 배신 당해 회사에서 쫓겨나듯 나왔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당시 결혼을 하려 했던 여자친구까지 자신을 떠났다고 한다. 승도는 당신의 힘들었던 일을 담담하게 가현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담담하지만 표정은 썩 밝지 않은 승도의 표정에 가현은 안쓰럽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며 자신의 손에 돈이 어느정도 남은채로 쫓겨나서 지금은 커피숍이라도 하며 다음 사업을 구상하는 중이라고,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 뒤로 연애 안 하시는거에요?" 가현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승도에게 물었다.
"네? 아...그런거죠, 뭐." 조금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승도가 대답했다.
"이제, 나이도 있으신데 좋은 분 만나셔서 결혼 하셔야죠."
"그래야되는데, 가현씨 같은 미인이 안 나타나네요. 하하하. 혹시 모르죠, 가현씨 결혼하기 전에 만났으면 제가 대쉬 했을지도."
"하하.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세요. 제가 어디가 이쁘다고, 결혼해서 이젠 아줌만데요." 가현의 말과는 다르게 싫지 않은 내색이었다.
"농담아닌데요. 저도 살면서 여자도 많이 만나보고 사랑도 해보고, 결혼도 생각했었는데, 가현씨 만큼 미인은 못 봤어요 지금것."
"네?" 승도의 진지한 대답에 가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하. 귀여우시네요. 본인이 미인이신거 잘 모르시나봐요. 남편 분이 이쁘다는 말 자주 안해줘요?"
"옛날엔 많이 해줬죠." 가현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음, 희한하네요. 지금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남편 분이 이쁘다는 말도 안 해주시고, 알콩달콩 재밌게 살 것 같은데."
"하하. 그렇지도 않아요. 결혼이라는게 연애라는 다른가 봐요." 평소같으면 하지 않을 말들이 쓴 웃음을 짓는 가현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사를 온 뒤로 만날 친구도 없었고 불평할 곳도 없었다. 게다가 어느정도 술기운까지 올라 온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