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98)화 (98/100)

98.

문이 열리는 동안 서혜의 심장은 크게 두근거렸다. 인생이 나락으로 추락할 수도 있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황제의 밤을 방해하는 황후라니,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황후라는 직위를 위협받을 수 있지만 서혜가 생각하는 나락은 그런 게 아니었다. 이연이 다른 여인을 안는 걸 보는 것. 그러므로 그를 독점하는 여인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것. 그게 그녀에게는 나락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서혜는 바로 처소에 들어섰다. 월아와 서 상궁이, 그리고 다른 궁녀들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감히 황후의 진로를 방해하지 못했다. 도리어 서혜를 방해하려고 한 것은 태감과 내관들이었다. 그러나 서혜는 태감을 밀치고 내관들을 노려봄으로서 그들을 물리쳤다. 태감과 내관들이 물러나자 그들보다 낮은 금위병들은 황후를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황제를 모시는 첫 밤이라 홍등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처소였다. 그 처소를 보자마자 서혜는 부아가 치밀었다. 홍등을 전부 떼 내어 밖에 내다 버리고 싶은 흉포한 충동이 치밀어 올랐으나 그녀는 겨우 참았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목도하기 위해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남녀의 교성이나 뜨거운 분위기가 감지될 거라고 생각되었는데 의외로 신방은 냉랭한 삭풍만 감돌고 있었다. 서혜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안쪽, 침상에 이연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는 여전히 의복을 정제한 채였다. 익선관조차 벗고 있지 않은 그는 음울한 얼굴로 침상에 걸터앉아 서혜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을 읽을 수가 없어서 서혜는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그를 바라보며 멈춰 섰다.

아랫사람들이 서둘러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탁 닫히고 나서 서혜의 시선이 힐끔 움직였다. 연 재인이 어디에 있을까, 그녀는 궁금했다. 이곳은 연 재인의 처소인데 왜 연 재인이 보이지 않는가.

“연 재인은 없어.”

서혜가 궁금해하는 걸 이연이 먼저 대답해 주었다. 서혜가 이연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그가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내보냈다. 오늘 하루는 다른 궁에서 머물게 될 거다.”

“다른 궁이면 어느 궁에서….”

서혜가 조심스럽게 물으려 하자 이연이 말을 끊었다.

“나는 연 재인이 어느 궁에서 머물든, 혹은 밤이슬을 맞으며 자든 궁금하지 않아. 너는 지금 그게 궁금한가?”

이연의 눈에 보이는 냉소는 서혜가 느낀 적이 없는 것이었다. 이연은 서혜의 앞에서 냉소를 머금은 적도 거의 없었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 냉소는 서혜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냉소는 서혜를 향하고 있었다. 서혜는 가만히 있다가 눈을 감았다.

“아니옵니다, 폐하.”

서혜의 말을 끝으로 연 재인의 처소는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이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서혜 또한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연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고 서혜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연이 왜 이러고 있었는지 서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잘못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이연은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왜 이렇게 늦었어?”

이연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그 목소리는 분에 가득 차 있었다. 묻지 않으려 했는데 도저히 묻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입 밖에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서혜는 눈을 깜빡였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

“폐하….”

자신은 여기에 와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결코 이런 짓을 저질러서는 안 되는, 도리어 지아비를 다른 여인의 처소에 들여보내서라도 황권을 더 탄탄하게 만들어야 하는 소임을 가지고 있는 이다. 그러니 여기에 온 것을 질책받을 수는 있지만.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시간이면 서혜야, 나는 연 재인을 안고도 남았어.”

이연은 왜 늦었냐고 질책하고 있었고 서혜는 할 말이 없었다. 와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이야기는 무의미했다. 그걸 모를 이연이 아니었으니까.

서혜가 입을 달싹거리면서도 대답을 못 하자 이연이 말했다.

“내가 다른 여인을 안아도 너는 괜찮은가?”

“폐하, 신첩이 여기에 온 것은….”

“조금쯤은, 안 괜찮아?”

“폐하, 신첩은….”

이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독 그가 커 보이는 것은 어둠 속에서 일어났기 때문이었을까. 서혜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칠 뻔한 것을 간신히 참고 두 다리에 힘을 줘서 버텼다.

이연이 한 발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폐하도 신첩도 그딴 소리는 필요 없어. 심서혜, 말해 봐. 내가 다른 여인을 안아도 너는 괜찮아? 나는 네가 내 아들을 나보다 우선으로 하는 것에도 가끔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데, 너는 내가 생판 남인 여인을 안는다고 해도 괜찮은가?”

이윽고 이연이 서혜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는 게 보였다. 아까의 무표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고통과 비참함으로 그의 얼굴은 엉망진창으로 구겨져 있었다. 왜 이런 표정을 짓는지, 왜 이런 표정을 짓게 한 건지, 서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첩이 괜찮으면.”

머릿속이 징징 울렸다. 이성이 빠른 속도로 먹혀 들어가고 있다. 분노가 모든 것을 먹어 버린다. 서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을 여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신첩이 괜찮으면, 여기에 어찌 왔겠사옵니까? 폐하, 신첩은 지금 목숨을 걸고 폐하의 밤을 방해하러 왔사옵니다.”

“늦었다고 말하는 거야.”

이연의 낮은 목소리에 서혜의 목소리 또한 낮아졌다.

“시험하신 것이옵니까?”

“…….”

“폐하께옵서 황상이시기에 신첩은 시험받아야 하옵니까?”

이연의 손이 다가왔다. 그 손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는 한 번도 서혜를 상처 준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손이 어디에 당도할지 알 수 없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서혜는 이연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이제까지 서혜는 이연의 손이 무엇을 의도하고 오는 것인지 알려고 한 적이 없었다. 그가 머리를 만지든 입술을 만지든 팔을 잡든 그건 모두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어디에 닿든 상관없었으니까. 그러나 시험받은 것에 대한 상처가 희미한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서혜의 시선이 그의 손길을 끝까지 좇았다.

“무서워?”

이연이 물었다. 상처받은 목소리로.

“아니옵니다, 폐하.”

“…….”

“정녕 아니옵니다, 폐하. 신첩은 그저….”

“…….”

“그저 마음이 놓이지 않을 뿐이었사옵니다. 지금 신첩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사옵니다.”

놀라서 마음이 전혀 놓아지지 않는다는 말에 이연이 천천히 손으로 서혜의 팔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아프지 않게 그녀의 양팔을 잡았다. 옴짝달싹 못하게 잡혔지만 고통은 없었다. 그러나 서혜는 어쩔 수 없이 올라오는 경계심을 느끼고 조금 놀랐다. 자신이 이연을 상대로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당혹감과 슬픔이 같이 들었다.

그때 이연이 속삭였다.

“네가 오지 않으면.”

“…….”

“정말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다.”

이연이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지친 것처럼 그는 마른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정말 바다와 같은 이해심으로 이걸 이해해 버리면.”

“…….”

“나는 정말 죽고 싶었을 거다.”

서혜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황제였다. 모든 것을 가진 자. 그가 죽음을 말한다. 그는 여러 번 세상과 충돌했었지만 한 번도 죽고 싶다는 말 따위는 한 적이 없었다. 서혜 때문에 정말 죽음 직전까지 갔을 때조차도 그는 여유롭게 그것을 감수했던 이였다. 게다가 황제가 된 이후 그의 황권은 매우 강력해졌고 나이가 든 지금에는 아주 느긋하고 강해졌다. 그래서 서혜는 그가 사라진 천지신명 대신이 되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 생각은 서혜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죽고 싶었을 거라니?

“나는 이해 못 해. 네가 나 아닌 다른 이를, 설사 우리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우선시하는 걸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내가 황제라서가 아니야. 내가 네 지아비이기 때문이다.”

이연은 서혜의 넓고 넓은 이해심을 볼 때마다 그녀가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상처받았다. 그녀는 모든 걸 이해했다. 그 많은 후궁들조차 아우르고 언니, 동생, 하면서 모두 다 자매처럼 돌봤다. 그녀들은 언제든지 이연의 총애를 받을 수 있는 여인들이었는데도.

자신이었다면 다 끝장내 버렸을 것이다. 입장을 바꿔 그녀들이 황제인 서혜의 앞에서 가끔 춤을 추거나 금을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어졌을 텐데 서혜는 말갛게 웃으며 같이 그것을 감상하고는 했다. 이연의 심장은 그때마다 얇게 저며지는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크게 티가 나지 않았는데 지속적으로 저며지자 결국 그의 심장은 반쪽이 되었다.

처음에 서혜는 그를 원해서 시집온 게 아니다. 그녀는 그저 시집와야 해서 왔다. 한동안 서혜를 원하고 연모지정을 품었던 건 이연 혼자뿐이었다. 서혜는 철저하게 그를 태자로만 대했었다. 결국 다시 서혜는 그 상태로 돌아갔는가.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씩 미쳐 가는 기분이었다. 어느 날 서혜의 애정을 확인하는 날에는 괜찮다가도 어느 날 서혜의 무심함을 엿보는 날에는 숨이 막혔다.

“네가 오지 않으면.”

이런 말은 하면 안 되는데. 아까가 차라리 좋았다. ‘바다와 같은 이해심으로 이해해 버리면.’ 그 정도가 괜찮았는데.

“죽어 버리려 했다.”

‘죽고 싶어졌을 것이다.’ 정도면 충분했는데.

알면서도 이연은 자신의 진심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 맺혀 있던 핏덩이가 왈칵 치밀어 올라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기분이었다. 서혜의 검은 눈이 크게 뜨여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믿을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황후에게도 신하에게도 백성에게도 황제는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알지만 이연은 참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은 다 괜찮다. 어차피 바닷속 물고기 같은 것들이니까. 그러나 망망대해에 단 한 명의 사람인 너는 나를 등지고 있으면 안 돼. 나는 그걸 견딜 수가 없다.

이연은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서혜의 이해와 외면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서혜에게 금야 오지 않았다면 죽어 버리려고 했다 했지만 사실 그는 이미 반쯤 죽어 가는 기분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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