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황후전의 구미호가 동궁의 구미호가 되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황궁에 퍼졌다. 그 소식을 들은 서혜는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나 그리운 마음이었겠는가. 장장 오 년이었다. 그럴 만했으니 서운하지 않았다. 서혜는 기본적으로 집착이 좀 없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은 이연의 마음은 영 좋지 못했다. 목숨을 걸고 낳았고 때로는 황제의 성심을 거스르면서까지 서혜가 금이야 옥이야 기른 태자였다. 기껏 그리 길러 놓았더니 오 년 만에 황도에 귀환하였으면서 제 어미도 보지 않고 여우만 안고 동궁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걸 확.
이연이 눈살을 찌푸리는데 그의 얼굴을 더 찌푸리게 하는 소식은 그다음에 들려왔다. 서혜가 웃고 말았다는 것이다. 설마, 기분이 상했겠지. 아무리 성인군자 같은 서혜여도 기분이 어찌 안 상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 생각했는데 석반을 들면서 서혜의 속내를 아무리 확인해도 그녀는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다과상이 들어왔을 때쯤 이연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혜는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기분이 상하지 않으셨군요.”
밑도 끝도 없이 꺼내는 말에 서혜는 잠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곧 그 뜻을 유추해 내고는 맑게 웃었다.
“귀엽지 않사옵니까? 만나자마자 하나는 엉엉 울고 하나는 미안하다 했다 하옵니다.”
“귀엽습니까….”
“예, 폐하. 신첩은 무척 귀여웠사옵니다.”
그날 달이 뜨지 않았다. 아마 문제는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아주 작은 것. 서혜와 이연의 관계와는 상관없는 것. 그런 것이 갑자기 이연의 감정을 후려쳤다. 그는 찻잔을 내려다보다 냉소했다.
“황후께서는 다 귀엽습니까? 오 년 만에 돌아온 아들이 황후를 보지도 않고 동궁으로 돌아가 버려도.”
이연의 목소리가 심상찮다는 것을 깨달은 건 그맘때쯤이었다. 서혜는 찻잔을 내려놓고 바르게 앉아 이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찻잔으로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이연의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연륜이 더해진 얼굴이 수심에 잠긴 것은 하나의 그림이었다. 서혜는 그 얼굴에 잠시 넋을 잃었다. 그녀는 요즘 종종 지아비의 얼굴에 넋을 잃을 때가 있었다. 이연은 어릴 때 마치 여아처럼 예뻤고 나이가 들면서 섬세하고 아름다운 미장부가 되었는데 좀 더 연륜이 붙자 아주 사내다워졌다. 그리고 서혜는 한 해, 한 해가 지날수록 이연의 얼굴이 더 좋아졌다.
어릴 때도 다소 얼굴을 밝히는 편이었던 서혜는 요즘 자주 이연의 얼굴에 정신을 놓았다. 요즘 그녀의 작은 비밀이었다. 그녀는 이 비밀을 아무에게도, 이연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만의 것으로 간직했다. 누군가에게 알려지기에는 조금 수치스러웠던 탓이었다.
그러나 이 심각한 와중에 얼굴에 넋을 잃었던 터라 서혜는 말끝을 놓치고 말았다.
“…하면, 도대체 황후는 무엇이 괴롭습니까?”
앞의 이야기를 못 들었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지만 불행히도 감히 서혜가 아무렇게나 유추할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닌 듯했다. 서혜는 잠시간의 망설임 끝에 물었다.
“황송하옵니다, 폐하. 신첩이 옥음을 잘 듣지 못하였나이다.”
“…….”
“폐하, 신첩이….”
“너는 아무것도 괴롭지 않구나.”
이연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 말을 끝으로 이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혜가 허둥지둥 같이 일어났지만 그는 평소 보여 주지 않는 싸늘한 태도로 황후전을 나가 버렸다. 홀로 남은 서혜는 당혹감에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놓쳤을까.
그리 오랫동안 늘 모든 것을 감싸 주시던 분이 저토록 노여워하시는 건 무슨 연유이실까.
서혜는 밤새도록 생각했지만 결국 합당한 대답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
***
황제가 황후전을 사흘째 외면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태자와 구미호에 관한 이야기는 한순간에 묻어 버릴 정도로 활활 타올랐다. 이런 적이 없었던지라 모두가 당황했다. 가장 당황한 일은 사흘째 되는 날에 일어났다. 황제가 다른 여인의 처소에 들르겠다고 태감에게 선언한 것이다.
가장 당황한 사람은 서혜였지만 그다음으로 당황한 사람은 그 여인으로 지목된 연 재인이었다. 연 재인은 올해 열여덟 살로, 총명한 여인이 제 꿈을 펼치며 정조를 지키기에는 황궁이 제격이라는 말을 듣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궁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떨어진 날벼락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까무러쳤다.
연 재인의 궁녀들은 하늘을 날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정작 황궁을 잘 돌아다니지는 못했다. 후궁은 황후의 손 안이나 마찬가지였고 후궁 안의 후궁들도 모두 황후 편인지라 이번 일에 대해 무척 감정적인 대응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고작 하루 동안 연 재인의 궁녀들은 몹쓸 일을 많이 겪어야 했다. 발이 걸려 넘어지고 걸레 빤 물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식은 죽만 배당되기도 했지만 다 상관없는 일이었다. 연 재인이 성총을 받는다면 황후를 제외한 유일한 인물이 될 터이니 이 어찌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녀들은 자신의 상전을 닦달했다.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얼굴을 한 상전을 앉히고 최대한 어여쁘게 꾸몄다.
그동안 서혜는 황후전에서 두문불출했다. 식사를 하지도 잠을 자지도 못했다. 그녀는 그저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기만 했다. 물 한 모금 마시는 게 겁날 정도로 속이 뒤집어졌다.
서운해하면 안 되지.
그녀는 자신에게 몇 번이고 타일렀다. 그는 황제이고 후궁을 취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자격이 다 뭔가, 사실은 그것이 그의 소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소임을 외면하고 서혜만을 총애해 온 것이다. 이제 와서 그가 변했다고 하여 서운해해서는 안 되었다. 그건 도리어 당연한….
당연한데.
이런 삶을 생각하지 않았던가. 처음 태자의 정혼녀가 되었을 때는, 그리고 태자비로 책봉되었을 때는 이런 삶을 당연히 여겼다. 그저 그때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마마.”
누군가가 불러서 서혜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서 상궁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왜? 서혜가 입 모양만으로 묻자 서 상궁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서혜도 같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달이 떠 있었다.
서혜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어 물었다.
“시간이….”
서혜는 자신의 얼굴이 부디 평소와 비슷하길 빌었다. 너무 희게 질리거나 파랗게 떨고 있거나 하진 않기를. 그건 너무… 불경한 짓이니까.
그래, 불경한 짓이니까. 이제까지의 긴 시간이 긴 꿈결과 같았을 뿐이다. 이제 와 현실이 도래했다고 해서 놀라거나 상처 입으면 안 돼. 서혜는 주먹을 쥐었다.
시간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으면 되는데 그 말을 꺼낼 수가 없다. 대답이 무서워서. 어차피 다가올 현실이 너무 두려워서 물을 수가 없다.
그때 서 상궁이 대답했다.
“폐하께서 연 재인의 처소에 드셨다고 하옵니다.”
그 순간 서혜는 일어나 버렸다.
벌떡 일어나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처소를 나오려 했다. 그러면 안 된다고 머릿속에서는 계속 붉은 깃발을 흔들어 댔지만 상관없었다. 서혜는 머릿속의 깃발을 부숴 버렸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지만 그 고통조차 남의 것처럼 무감하게 느껴졌다.
“마마, 가시면 아니 되시옵니다!”
“마마, 불경이옵니다! 경을 치시게 될 것이옵니다!”
서 상궁을 위시한 수많은 궁녀들이 무릎을 꿇었다. 월아를 비롯한 궁녀들은 서혜의 앞길을 막으며 무릎을 꿇었다. 서혜는 아주 잠깐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아주 잠깐뿐이었다.
경을 친다? 나도 알아.
불경? 너희보다 내가 더 잘 알아.
아는데 멈출 수가 없었다. 서혜는 궁녀들 사이를 빠져나가 처소 문을 스스로 열었다. 이 문이 이렇게 무거운 것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혼자 열기에는 상당히 무거운 문이었지만 그녀는 바들바들 떨면서도 끝까지 문을 열고 황후전을 뛰쳐나갔다.
“마마!”
궁녀들이 서둘러 뒤를 쫓았다. 등을 들고 서혜의 겉옷을 챙겨 궁녀들이 마구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서혜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달리고만 있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찼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배신이라고 생각하는 게 말도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배신이라니, 그는 황제인데.
그래도 마음이 배신이라고 말하는 걸 어찌한단 말인가. 종일 마음과 실랑이를 해 봐도 마음은 이해할 수 없다는데. 이건 배신이 분명하다는 데야, 머리가 어찌 마음에게 감정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감정에 대해 머리보다야 마음이 더 잘 알지 않겠는가.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그가 나 아닌 다른 여인을 안는 걸, 안게 되었다는 걸, 우리가 그렇게 되어 버렸다는 걸, 더 이상 우리가 둘만이 아니라는 걸, 그걸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동침하였다고 알려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 불경의 대가로 무슨 일을 겪게 되든 상관없었다. 어떤 치욕을 당하게 된다 하더라도 감수하겠다. 그러나.
보지 않고는 믿을 수가 없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마마, 천천히 가시어요!”
“다치시옵니다. 마마, 저희가 모시겠사옵니다. 제발,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그 말들이 머릿속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 고정을 해? 머리가 포기하자 억눌러져 있던 마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어떻게 고정을 해?! 이제 우리가 변한다는데!
서혜는 두 번째 꿈속에서 만났던 황제가 떠올랐다. 그녀는 정말로 그가 싫었었다. 지금의 이연은 그 꿈속의 황제보다도 나이가 많지만 이제 와서 그처럼 변하게 되는 것일까.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결국 그들은 모두 같은 사람인가? 그러하다면, 그러하다면 자신은 어찌하여야 좋은가. 그가 변한 건 누구의 탓인가.
“너는 아무것도 괴롭지 않구나.”
자신의 탓인가?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하여 그가 변한 것인가?
빌기라도 해야 하나?
마음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소리쳤다. 마음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날뛰기 시작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게 아니라 분노가 머리끝까지 올라온 것 같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럴 권리 따윈 없는데.
권리가 다 무슨 소용이야!
서혜는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연 재인의 처소에 도착했다. 서혜를 본 태감이 눈을 크게 떴다. 그 얼굴이 무슨 의미인지 알 바 아니었다. 서혜가 고함을 쳤다.
“문을 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