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수영은 열일곱 살이 되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어리지 않았다. 일 년 뒤에는 더 이상 ‘수영’이라는 아명을 쓰지도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이미 거의 없지만 일 년 뒤에는 완전히 그 이름을 과거로 두게 되는 것이다. 수영은 자신의 이름이 뭐가 되든 관심이 없었다. 아마 좋은 뜻을 가진 이름으로 지어질 것이다. 목숨 수, 길 영. 그보다는 훨씬 높은 기상을 가진 이름이 되겠지. 그리고 그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하는 소임을 지니게 될 것이다.
뭐, 부황께서 승하하시지 않는 한은 적당히 살아도 될 거 같긴 하지만.
수영은 피식 웃었다. 자신이 지닌 화려한 금빛의 호사스러운 것들이 그만큼 의무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을 일일이 인지하고 지켜 가는 부황이나 모후와는 달리 수영은 좀 적당히 하자는 주의였다. 강산이니 하늘이니 하는 것들보다는 자기 자신이 소중했다.
내가 살아 있어야 그것들을 느끼는 것이지. 내가 죽었는데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선조들의 뜻을 기려라? 수영은 선조들이 막돼먹었다고 생각했다. 조부, 조모, 증조모, 다들 엉망이었다. 그 위는 또 어떠할 것인가. 자신은 운이 좋아 부황과 모후의 사이에서 태어났고, 그들의 유일한 자식이 되었으나 그런 이는 역사상 자신 하나뿐이었다. 대부분은 수십 명의 자식 중 하나로 태어나 언제나 비교당하고 왕위에 오르기까지 피바람이 불곤 했다. 그런 선조에게 뜻은 무슨 뜻. 열일곱 수영은 좀 삐딱했다.
소중한 건 하나뿐.
“란 님에게 가실 것이옵니까?”
교전 지역에서 돌아와 다시 태자부의 자리를 꿰차는 데 성공한 상장군부의 셋째 아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도로 귀환하자마자 황제를 알현한 수영은 동궁이 아닌 황후전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모후를 배알하기 위함인가 생각하기 쉽지만 전장에서 오랫동안 수영을 보필한 상장군부의 셋째 아들은 그가 사실은 란을 무척 그리워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수영은 전장의 전리품 중 여인의 물건들을 꽤 많이 모았던 것이다. 그게 다 누구를 위함인지, 전장에서 태자를 모시는 이 중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모후께 가는 것이다.”
태자와 함께 있던 장수들이 하나같이 쓴웃음을 지었다. 거짓말이라는 게 뻔했지만 상대는 태자이니 야유할 수는 없다. 그저 쓰게 웃으며 삼키는 수밖에.
수영도 등 뒤의 기척을 모르지 않았으나 픽 웃는 것으로 날려 버렸다. 그는 란이 궁금했다. 란은 오 년간 서신 한 장 보내지 않았다. 수영은 서신을 계속 보냈고 그 서신을 란이 받았다는 것 또한 전해 들었으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왜 답장을 주지 않는지 자신을 잊었는지 궁금했다. 사람들은 란이 자신을 잊었다고 수군거렸다. 태자의 구미호가 황후의 구미호가 되었다고들 했다. 그러나 수영은 왠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미련한 탓인가.
수영은 황후전으로 걸으며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란이 자신을 잊었다는 게 조금도 믿기지 않았다. 근거는 없지만 란이 자신을 기억한다는 데 의심 한 점 없어 수영은 남들이 뭐라고 떠들던 간에 태연히 란에게 서신을 보내왔었다. 무엇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종 란에게 보내고 싶은 전리품을 소유하면 그것에 대한 그림을 그려 주기도 했다. 혹시 이번엔 답신이 올까 했지만 역시나 란은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내 여우는 이제 글도 잘 쓰고 노래도 잘한다던데.
왜 답신을 하지 않았을까.
남들은 다 더 이상 란이 수영의 여우가 아니라는데 수영은 여전히 그녀가 자신의 여우라고 생각했다. 도저히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걸 용납할 수가 없었다. 정말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수영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많은 사람을 죽였다.
여우 한 마리 더 못 죽일까.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란을 어찌 훼손한단 말인가. 그 피부에 흠 하나 어찌 낸단 말인가.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어떻게 하게 될 것인지 알게 될 결전의 날이 온 셈이었다. 수영은 란을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란이 자신의 여우인지, 아니면 타인의 여우가 되었는지. 아니면 아예 자유를 찾아 버렸는지.
그리고….
짝!
뺨을 후려치는 소리가 무척 날카로웠다. 그와 함께 궁녀가 허공을 날았다. 수영은 눈을 크게 떴다. 뺨을 후려친 여인은 뒷모습만 보였는데 귀한 신분인 듯 황녀에 가까운 옷을 입고 있었다. 저 여인은 누구일까. 이 황궁에 황녀 따위는 없는데.
새까만 머리카락을 곱게 단장하고 우아한 물건들로 장식했다. 체구는 왜소하고 낭창하나 손맛은 매운 듯 날아간 궁녀가 엉엉 울면서도 재빨리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 움직임이 빠른 것을 보았을 때 평소에도 무척 매서운 성미임을 알 수 있었다.
궁녀가 펑펑 울면서 매달리듯 애원했다.
“란 님, 정녕 오해이시옵니다.”
란?
수영은 눈을 크게 떴다.
란의 은색 머리카락은 어디 가고 검은 머리란 말인가. 귀도 없고 꼬리도 없다. 내 여우는 어디에 갔지? 수영은 덜컥 두려워졌다. 정녕 사람들이 말한 대로 자신의 여우는 사라졌는가?
“오해? 오해라고 했느냐?”
살벌한 목소리였다. 북풍한설이 흩날리는 듯한 목소리에 궁녀가 어깨를 바들바들 떨었다. 란이 궁녀의 얼굴에 연을 집어 던졌다.
“네 눈으로 보아라. 이 연 어디가 연 놀이를 하던 연인가. 금방 만든 듯 이토록 깨끗한 연이다. 그런데 이 연을 가지고 노느라 네가 감히 황후마마의 행차를 보지 못하였다?”
“란 님….”
“그리고 마주치자마자 미주알고주알 후궁마마님의 근황을 읊어 대? 어찌나 줄줄 읊는지 어디 써 둔 줄 알았다. 아니지, 써 두었겠지. 쓰고 외운 건 아니더냐?”
수영은 상황을 알 것 같았다.
궁녀는 연 놀이에 몰두한 척하다가 모후의 행차와 부딪혔다. 그러고는 모후에게 사죄를 올린 뒤 곧 제 상전의 어려움을 읍소하였을 것이다. 돌봐 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 처음부터 연 놀이를 하는 척 부딪힌 것이다. 그리하지 않으면 한낱 궁녀가 어찌 황후와 대면할 수 있겠는가.
그런 얕은 수작에 란은 화가 난 것이다. 화가 날 만은 했다. 수영이 어릴 때도 후궁들은 늘 모후에게 와서 이러쿵저러쿵 종알거렸다. 다과를 청하고 음식을 해 오고 그러면서 제 앞가림을 도와 달라고 징징거렸다. 사람들은 후궁들이 부군이 황제가 아니라 황후인 줄 안다고 빈정거릴 정도였다.
당시 수영은 그런 말에 무척 마음이 상했었으나 이제는 왜 그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잘 안다. 부황은 모후 외의 여인에게 관심도 없지만 자비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잘 아는 후궁들은 자신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총애를 독점하고 있는 모후에게 기대었던 것이다.
“란님, 천부당만부당하신….”
“내가 구미호인 걸 잊었나 본데 네 간이라도 빼 먹어야 네가 정신을 차리겠느냐?!”
꺄아아악!
궁녀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어졌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하고 궁녀가 병에 걸린 사람처럼 경련하며 울부짖는 것을 보던 수영은 문득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란아.”
그러자 이제까지 앞만 보고 있던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어떤 사내가 감히 자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가, 라고 화를 내는 눈으로.
눈이 마주쳤다.
수영은 두 손을 벌려도 될까, 생각했다. 이리 오라는 말을 하기엔 이미 둘 사이엔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갔는가. 그리 생각하자 심장이 지끈거렸다. 내 여우가 아니었는가. 세상 모두가 자신의 여우가 아니라고 말할 때도 코웃음만 쳤는데 정작 눈앞에서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는 걸 보고 있자니 속이 뒤집혔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의 여우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놔주든가 목을 베든가 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현실은 둘 다 아니었다.
검으로 찔린 듯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아아, 그렇다. 처분은 란이 하는 것이다. 수영이 하는 것이 아니었다. 수영은 그저 란의 처분을 기다릴 뿐이다.
란이 수영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그의 얼굴을, 그리고 그의 전신을 확인했다. 눈을 깜빡깜빡하는 란의 얼굴에서 의아함, 당혹감, 그리고 놀라움, 그런 감정들이 퍼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란의 검은 머리색이 머리 뿌리서부터 은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란의 검은 눈도 보라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머리 위에 귀가 생기고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장의 아래로 풍성한 아홉 개의 꼬리가 생겼다.
“변신했었구나….”
수영의 말을 란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란은 그저 수영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휘청거리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휘청, 하고 한 걸음. 또, 휘청, 하고 한 걸음. 그렇게 걷던 란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지더니 어느 순간 뛰었다. 구미호는 순식간에 도약해서 수영의 품에 달려들었다. 두 팔을 벌린 수영이 란을 끌어안은 것과 그녀가 그의 품에 뛰어든 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란이 울기 시작했다. 흐어엉, 하고 우는 그 소리가 어린애처럼 커서 조금 전까지 동행하고 있었던 궁녀들도 혼나고 있던 궁녀도 다 얼이 빠진 눈으로 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란은 남이 어떤 눈으로 보든 관심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태자가 귀환했다는 것에 기뻐서, 그의 부재 동안 쌓였던 서러움이 폭발해서 울고 있었다.
“미안해.”
수영은 란을 안은 채 중얼거렸다.
오 년 동안 서신을 보낸 사람은 자신이었다는 것도, 전장에서 위험에 처해 있었던 사람 또한 자신이었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여우는 아팠고 슬펐고 괴로웠다. 그리고 자신을 보자마자 변신이 전부 풀려 버릴 정도로 넋을 놓았다. 다시 말하자면 그 정도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미안해, 란아.”
란은 괜찮다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저 펑펑 울기만 했다. 수영은 란을 안고 동궁으로 걸으며 그 보드라운 머리에 입술을 묻고 몇 번이고 사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