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94)화 (94/100)

94.

이연은 상장군에게 아이의 이름을 짓는 걸 허락해 주지 않았다. 아이의 이름을 지은 사람은 수영이었다. 수영은 사흘을 고민한 끝에 ‘란(欗)’을 선택했다. 목란. 수영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고 아름다운 꽃에 향도 좋고 약으로도 쓰는 꽃이기 때문이다. 목란은 어디에 있어도 대접받는 꽃이고 어디에 있어도 버림받지 않는다. 다시는 버림받지 말라는 뜻으로 수영은 목란의 란 자를 선택했다.

“좋은 뜻이네요.”

서혜는 싱긋 웃었다. 며칠 사이 수영이가 좀 야위었다. 그 모습을 보니 속상했지만 서혜는 아는 척하지 않았다. 수영이는 란이를 오가에 보내기 싫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 수영이는 여러 가지를 고려한 끝에 란이를 오가에 보내는 것이리라. 여러 가지. 서혜는 그 의미를 안다. 이 황궁에서 사람 하나를 온전하게 보호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그녀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봐 왔다.

고작 여덟 살인데 벌써 컸구나.

수영이는 란이를 안고 다녔다. 란이 걷고 싶다 하면 내려 주었지만 그게 아니면 늘 안고 걸어 다녔다. 여덟 살밖에 안 되었다 하더라도 수영이는 태자이고, 그런 태자가 손수 안아서 데리고 다니는 존재에 대해 황궁에서는 말이 많았다. 그 말을 막고 있는 것은 외명부에서는 이연이요, 내명부에서는 서혜였다.

원하는 대로 하렴. 이연도 서혜도 그러길 바랐지만 수영은 아주 긴 생각 끝에 아이에게 이름을 정해 주고 오가로 보내기로 했다.

“자주 만나야지요.”

서혜의 말에 수영이가 희미하게 웃었다.

“소자는 곧 출정하여야 합니다. 모후, 소자는 태자임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란이는 아직 인세에 적응도 못 하였는데 후궁으로 적응할 수가 있겠습니까. 수저질도 못 하는 애입니다.”

“…….”

“상장군은 인품이 훌륭하고 여식을 무척 바랐으며 란이가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알고 있으니 그곳에서 보호를 받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마치 마지막을 말하는 듯한 말투에 서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시는 아니 볼 것인가요?”

서혜의 물음에 수영이는 잠시 찻잔의 표면을 어루만지며 말이 없었다. 조금의 시간 끝에 고개를 들 때 수영이의 얼굴에 망설임은 없었다. 수영이는 싱긋 웃었다.

“예. 부황께도 청을 올리려고 합니다.”

왜 부황이 란이를 후궁으로 들이려고 하는지는 알 것 같지만 그리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다섯 꽃잎의 아들이고 그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 자기 자식의 정통성은 자신이 황권을 강력하게 유지하면 결국 아무도 입을 대지 못할 일. 란이를 희생시킬 필요는 없다.

손으로 먹는 걸 더 좋아하고 네 발로 뛰어다니고 싶어 하고 털실을 가지고 노는 게 즐거운 란이는 오가에 있는 게 나을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는 사람답게 살아야겠지만 그래도 그 집안은 무가 집안. 여인에게도 비교적 많은 것이 허용되는 편이니 란이에게는 그나마 가장 나은 조건이다.

수영이는 모후인 서혜를 바라보았다. 천하제일미, 완벽한 황후. 그렇게 불리는 어머니처럼 란이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란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일 것이다.

그래, 오가에서 사람다워진 란이는 결국 수영이의 란이는 아니다.

“태자. 사람 마음은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서혜는 탁자 위에 올라와 있는 수영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주었다. 며칠 사이 수영이는 훨씬 어른스러워진 것 같다. 그게 좋은 일일까, 혹은 그렇지 않은 일일까. 알 수가 없다.

서혜는 수영이 돌아간 뒤에도 내내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무언가 하나의 고비가 있었던 것 같다. 아들은 그 고비를 잘 넘긴 걸까. 성장한 건 알겠는데 여윈 얼굴이라든가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쓸쓸한 기운이 모친인 서혜를 옭아맸다. 서혜는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수영이에 대해 생각하는 걸 멈추지 못했다. 수영이는 행복한 걸까, 아니면 지금 힘든 걸까.

이게 결국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까.

어미로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석반을 들기 위해 황후전에 당도한 이연을 만났을 때 서혜는 이 이야기를 했고 이연은 쓰게 웃었다.

“그래서 마음이 많이 무거웠습니까?”

이연이 서혜를 앉히고 휘건을 펼쳐 주며 물었다. 종종 그는 어릴 때처럼 서혜의 시중을 들어 주었다. 서혜는 몸 둘 바를 몰라 그의 시중을 받지 않으려 했지만 이연은 자신의 낙이니 빼앗지 말라며 즐겁게 해 주고는 했다.

“예….”

이연은 서혜를 바라보았다. 서혜는 밥상을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생각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수영이를 생각하며 염려하는 옆얼굴이 수려하고 아름다워 이연은 그녀의 걱정이 아닌 그녀의 얼굴에 빠져들 뻔했다. 간신히 그는 입을 열었다.

“천하를 돌봐야 할 아이입니다. 한 명의 구미호도 제 뜻대로 거두지 못한다면 천하는 더욱 어려울 것이니, 이 모든 것은 과정이에요. 그리 걱정하시지 마세요.”

거짓말이다.

이연은 천하를 거두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연이 어려웠던 건 서혜를 갖는 것이었다. 때때로 한 사람을 갖는 것이 세상을 갖는 것보다 어려울 수 있다. 하늘이 모든 것을 허락해도 그 한 사람만은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늘의 뜻을 꺾는다는 건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연은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그는 서혜가 아무 걱정도 하지 않길 바랐다. 그것이 설사 서혜가 목숨처럼 아끼는 제 아들에 관한 일이라 할지라도 이연은 사실을 말해 주고 싶지 않았다. 사실을 안다 하더라도 서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더 문제다. 서혜가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동안도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서혜가.

“그렇겠지요?”

서혜가 매달리듯 물어서 이연은 웃어 주었다.

그는 몇 번이고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서혜가 안전하고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는 몇천 번의 거짓말도 태연히 할 수 있다. 이연은 서혜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서혜의 입술을 머금었다. 서혜가 아, 하고 신음하며 입술을 열었다. 서혜의 도톰한 입술이 부드럽고 달콤하게 이연의 입술에 닿았다.

이연은 수영의 뜻대로 해 주었지만 도대체 상장군이 무슨 소리를 하여 수영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는 알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둘은 독대했기에 알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없어서 수영을 앉혀 놓고 살살 구슬렀다.

수영은 말하고 싶지 않은 듯했지만 이연은 이런 쪽에서는 백전노장이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수많은 것들에 대해 유도 심문을 던졌다. 수백 개의 낚싯대를 던지자 낚싯대 하나가 살그머니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연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적당한 속도로 낚시를 시작하였다.

“모후가 냉궁에 갔었던 이야기를 상장군이 해 주었느냐?”

수영은 대답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머리가 복잡할 것이다. 상장군이 경을 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구미호 아이가 오가에 가지 못하거나 그 가문에서 피해를 보는 게 걱정이라는 것을 이연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감히 모후의 흠을 타인으로부터 들었다는 것에 대해 경을 칠까 봐 염려가 가득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혼을 내려는 것이 아니다.”

이연은 수영의 손을 잡았다.

“그저 어린 태자의 마음이 아팠을 터인데 짐이 정확히 말해 주고 싶어 그러한 것이니 개의치 말고 말해 보아라.”

“…예, 부황. 상장군에게 들었사옵니다.”

이제야 어떻게 상장군이 수영이에게서 구미호 아이를 훔쳐 냈는지 알 것 같았다. 모후가 냉궁에 갔었던 이야기를 들으니 곧 출정해야 하는 수영이는 공포심이 들었던 것이다. 이연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대체로 신하들의 행동에 대해 무심하고 관대한 편이나 감히 태자를 세 치 혀로 움직이려 한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에게 어머니의 일을 말하며 그 마음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하다니 그냥 두고 볼 일은 아니었다.

반드시 이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

이연이 속으로 마음을 다지면서 태자를 끌어와 품에 안았다. 꽤 커서는 이연에게 안길 일이 별로 없었던 태자가 품속에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상장군의 이야기는 전부 사실일 것이다. 내, 그 이야기를 전부 묻지는 않겠다. 단지 태자, 아니 수영아.”

이연은 오랜만에 수영의 이름을 불렀고 수영이 “예, 부황.” 하고 나직이 속삭였다.

“선황께옵서는 짐하고는 다른 분이셨다.”

“…….”

“짐은 어릴 때부터 선황께서 하사하신 독약을 먹어야 했다.”

수영이 고개를 퍼뜩 쳐들었다. 눈이 화등잔만 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에는 경악이 가득했다.

“선황께옵서는 그런 분이셨다. 언제나 아무도 믿지 않으셨다. 짐이 태자이던 시절, 짐의 모후께옵서는 총애를 받지 못하시는 분이었다. 아니, 미움을 사셨었다. 폐후가 되지 않으셨던 것은 그분이 세 꽃잎이셨기 때문이었고. 그러나, 수영아.”

이연은 수영의 작은 뺨을 가만히 도닥거렸다.

“나는 서혜와 너를 아주 아낀단다. 그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 너는 내가 아니다. 너는 당당하고 행복해도 될 태자인데 어찌하여 네가 잘 알지도 못하는 과거 이야기를, 그것도 나도 어머니도 아닌 다른 사람에게 듣고서 이리 움츠러드느냐.”

수영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보며 이연이 웃었다. 수영은 아마 힘들었던 것 같았다. 당연하겠지. 충격적인 이야기였을 테니까.

“부황.”

수영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떨어졌다.

“소자가, 소자가 원하면 란이도… 란이도 보호해 주시겠사옵니까?”

아아, 그것이 문제였군.

이연은 수영이 자기 스스로에 대한 안위 때문에 겁먹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수영은 자신의 안위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 대한 부모의 애정은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구미호인, 란이에 대한 보호를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힘은 미약한데 혹시 부모가 자신의 부재중에 란이를 냉궁에라도 보내서 아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수영의 공포였던 것이다.

“수영아. 너는 동궁의 주인이다.”

“…….”

“동궁의 것은 모두 너의 것이야. 부황이 약조하마. 동궁의 것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다고.”

“정녕, 정녕이시옵니까?”

“성지라도 내려 주랴?”

이연이 묻자 갑자기 수영의 입에서 울음이 터졌다. 어어엉, 수영이 울기 시작했다. 몇 년 만에 어린아이답게 울기 시작하는 수영이를 안고서 이연은 토닥거렸다. 괜찮아, 괜찮아. 그렇게 달래는 한편 이연은 상장군에 대해 이를 갈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