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동궁에 어린 후궁이 들게 되었다. 제 나이도 모르는 이 후궁을 들이기 위해서는 일단 형식적으로라도 배경이 될 집안이 정해져야 했는데 의외로 이 일에 발 벗고 나선 사람은 상장군이었다. 상장군은 아들만 열둘이 있는 사내로 평생소원은 딸 하나를 두는 것.
그러나 하늘은 결코 그에게 딸을 허하지 않았다. 그의 집안도 모두 아들만 있어 제발 딸 하나만 보자는 게 그 집안 전체의 소원이었다. 무인 집안이다 보니 다들 골격도 크고 시커먼 사내 녀석들뿐이라며 양녀라도 들이고 싶다고 상장군은 애처롭게 말했다.
“후궁으로 들일 거라니까, 장군.”
그런 마음으로 들일 상황이 아니야, 지금. 이연은 곤란해져 머리를 짚었다. 가끔 황제의 자리에 있다 보면 여기에 군림을 하는 건지 청을 들어주기 위해 있는 건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었다. 심지어 이렇게 애처럼 떼를 쓰기까지 하면 더욱 그랬다.
“그래도 일단 가정 교육이 되어야 하니 소신이….”
“짐이 알아서 한다.”
“폐하. 고작 세 살이옵니다. 후궁으로 입궁하기엔 연치가 너무 어리니 부디 하해와 같은 아량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태산 같은 체구의 상장군이 머리를 조아리는 걸 보며 이연은 한숨을 쉬었다.
“아직 그대의 자식도 아니야. 앞서가지 마라.”
“폐하. 무엄하오나 소신 상장군 오치언, 한 말씀 올리겠나이다. 소신만 한 배경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상장군은 애초에 이연이 황권을 잡을 때 이연의 편에 섰던 인물이었다. 용장이고 지장이면서도 정세를 보는 데도 능한 인물이었고 이연에 대한 충심도 깊었다. 물론 태자에 대해서도 아주 긍정적이었다. 그러니 그는 외척으로 세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안온함을 추구할 뿐 분에 넘치는 야심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대만큼 귀찮은 외척이 어디 있겠는가.”
이연이 코웃음 쳤다.
상장군의 저 여식에 대한 열망을 이연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자식을 열둘이나 낳은 남자가 아닌가. 물론 처첩 다 합쳐서 열둘이지만 말이 열둘이지 사실 낳은 건 그 이상이었다. 어릴 때 죽은 아이, 낳다가 죽은 아이, 배 속에서 죽은 아이까지 합치면 훨씬 더 많았고, 처첩도 참 많은 사내였다. 그런 그가 여식을 안게 된다면 품에서 놓고 싶겠는가.
그리고 그 꼴을 수영이가 어찌 보겠는가.
“태자가 매우 아끼는 여우다.”
이연은 일부러 사람이 아닌 여우로 아이를 칭했다. 그 말에 상장군이 두툼한 입술을 삐죽였다.
“누가 봐도 사람 아이….”
“짐을 알현하기도 전에 동궁부터 다녀왔느냐?”
이연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산만 한 덩치로 동궁을 기웃거리며 아이의 모습을 확인했을 상장군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황제를 배알하러 온 것이니 동궁에 당당히 들를 수는 없을 노릇이고 아이의 모습은 궁금해 미치겠고 그래서 분명 산 도둑처럼 움찔거렸을 것이다.
“송구하옵니다.”
상장군이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는 너그럽다면 너그러운, 좋게 말하면 관대하고 나쁘게 말하면 무심한 부분이 있는 성정이었다. 그러니 망정이지 선황이었다면 큰 경을 치고도 남을 만한 행동을 했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아이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가. 구미호 아이라니! 남들은 삿되다, 신목을 없앤 탓이다 떠들어 댔지만 상장군은 ‘하늘이 나에게 아이를 내렸나!’라며 바람처럼 달려온 터였다. 그 아이를 후궁으로 들인다면 반드시 배경이 필요할 터. 그 배경 자리만은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이었다. 그러자면 아이를 일단 보아야 했다. 어떤 아이인지 한번 보기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려 보았는데 아이는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귀여웠다. 하얀 머리를 양처럼 머리 위에 돌돌 말아 올리고, 그 위에 귀가 쫑긋거렸다. 연한 녹색 의복을 입고 아장아장 두 발로 뛰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복슬복슬한 하얀 꼬리 아홉 개가 살랑거렸다. 아이는 나비를 쫓아 풀밭을 뛰놀다가 태자가 “연아.”라고 부르자 냉큼 그쪽으로 가 버렸다. 상장군은 한눈에 반해 버렸다.
내 아이야.
저 아이의 부모 자리는 내 것이다.
상장군은 피로 심장에 각오를 새기고 편전에 든 참이었다.
“무엇에도 집착하는 법이 없는 태자가 난생처음 애착하는 것이다. 상장군, 짐이 원하는 건 호적이지 아비가 아니야.”
“…….”
“그러니 마음을 접고 물러가라. 그 자리는 대충 알아볼 터이니.”
상장군 같은 권문세가일 필요는 없다. 그저 호적만 있으면 되는 것을. 이연이 그를 물리려고 했을 때 상장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태자 전하께서 소신을 기꺼워하신다면.”
“…….”
“윤허해 주시겠나이까?”
태자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상장군의 자식이 되면 일부라도 상장군에게 양보해야 한다. 상장군은 일주일에 며칠이라도 아이를 데려가려고 할 것이고 자신의 자식으로서 남부럽지 않게 모든 걸 누리게 해 주려고 들 것이다. 그 과정에서 둘은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연은 여덟 살 때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때 자신이 세 살의 서혜를 만났었다. 어쨌거나 나이는 둘 다 비슷한 셈이다. 지금의 태자도 여덟 살이고 구미호 아이도 두세 살, 거의 세 살에 가깝다 하니. 태자는 자신을 많이 닮았으니 이연은 태자의 마음을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자신이 만약 태자만큼의 안정감이 있었다면, 그리고 동궁에 들일 수 있는 위치였다면 자신은 서혜를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서혜를 동궁에 들여서 고이고이 키웠을 것이다. 이만큼 아름답지 않아도 좋다. 이만큼 우아하지 않아도 좋다. 지금의 가녀린 몸이 아니라 선나라에서 별로 선호하지 않는 뚱뚱한 몸에 제멋대로인 성격의 여인이어도 좋다. 그저 서혜이면 되니 행복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그런 고난과 고통을 안겨 주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연은 가끔 생각한다. 서혜와 온전하게 둘이서 살고 둘이서 크고 둘이서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보다 서혜는 건강하고 좀 더 자유로운 사람이었을 텐데. 황궁에서 자유로우면 얼마나 자유롭겠냐마는 그래도 이토록 스스로를 옭아매지는 않았을 것이다.
“…폐하?”
상장군이 생각에 빠져 있는 이연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이연이 피식 웃었다.
“그러자꾸나.”
***
연은 털실을 가지고 놀다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면 가까운 곳에 수영이 앉아 생각에 빠져 있었다. 수영은 자신의 이름을 수영이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그를 전하라고 불렀다. 엄마라는 사람은 그를 태자라고 불렀다. 아니, 다른 사람들도 종종 태자 전하, 라고 부르기도 했다. 수영은 많은 이름으로 불렸지만 정작 수영이라고는 잘 불리지 않았다.
그래서 연도 그를 수영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수영은 자신의 이름은 알려 주었지만 그 이름은 왠지 불러서는 안 되는 것 같았다. 하여 연은 수영을 부를 때면 그에게 다가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왜, 연아?”
수영은 연을 안아 자신의 무릎에 앉히면서도 연이라는 이름이 신경 쓰였다. 한자라도 바꿔 주고 싶었다. ‘버릴 연’이라니. 왜 이름을 그렇게 지었을까. 평생 버려졌음을 기억하라는 것처럼.
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영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파?”
수영은 의아해져 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자신이 아프다고 생각할까? 자신의 안색이 안 좋았다면 내관들도 물었을 테고 태의도 들었을 터인데 아무도 말이 없었더랬다. 하면 안색에는 문제가 없다는 뜻일 텐데 왜 이런 말을 할까, 하다가 수영은 깨달았다.
‘기분이 안 좋아?’라는 말을 연은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무작정 아프냐고 묻는 중이었다.
“안 아파.”
수영은 연의 머리를 조심조심 어루만져 주었다. 연은 귀 근처를 만져 주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그는 연의 귀 근처를 긁어 주었다. 연의 목에서 앓는 듯한 소리가 났다. 수영은 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졌다.
오늘 낮, 그는 상장군을 만났다. 알현을 청한 상장군의 용건을 이미 알고 있었던 수영은 일부러 그를 오래 기다리게 한 뒤 만났다. 진을 빼어 단숨에 쫓아낼 요량이었지만 상대는 그렇게 쉽지 않았다.
“태자 전하. 황후마마께옵서 냉궁에 가셨던 것을 아시는지요?”
모후께서 냉궁을 왜 가시지?
수영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고 많이 놀랐다. 냉궁에 간 여인에게 남은 건 죽음밖에 없는데 어떻게 모후는 살아 돌아오셨는가. 그리고 모후에게 그런 일이 생기는 동안 부황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셨단 말인가. 수영이 당혹스러워하는 사이 상장군은 그때의 상황을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수영이 그동안 들은 이야기는 부황이 모두를 제거하고 황권을 장악했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는 잔혹한 것들뿐이어서 수영은 부황이 자신을 무척 총애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왜 부황이 그래야 했는지 수영은 오늘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출정 끝에 돌아오는 게 총애하는 비의 냉궁행이라면 자신 역시 눈이 뒤집힐 것이다. 수영이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새로 알게 된 사실의 격차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 상장군이 말했다.
“이제 전하께서도 곧 출정하시게 되실 것이옵니다. 그럼 어디에 맡기시겠사옵니까.”
무엇을, 이라는 말은 없었으나 수영은 알아들었다.
자신은 태자다. 당연히 출정해야 한다. 전장은 없어도 국경 지대에서는 늘 잡음이 끊이질 않고 자신도 그곳으로 움직여 전공을 세워야 한다. 그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두려워한 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자신이 가게 되면 이 동궁에 연이 혼자 남는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니 소신이 적격자이옵니다.”
수영은 연을 내려다보았다. 연은 수영의 옷에 놓인 자수를 만지작거리며 놀고 있었다. 그 맑고 아무것도 모르는 행동에 미소가 나오는 한편 마음이 무거워졌다.
부황께서도 모후를 지키지 못하였는데 여기에 연이를 혼자 남겨 둔다고?
물론 이곳은 그때보다 안전하다. 부황께서도 모후께서도 지켜 주실 것이다…. 아니, 부황께서는 거추장스럽다고 여기시면 바로 제거하실 것이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어.
수영은 눈을 감았다. 여덟 살 어린 태자의 마음이 납덩이를 매달고 고뇌의 바다로 침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