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89)화 (89/100)

89.

황제가 명명한 이화호는 한때 신목이 거하던 호수였다. 신목을 다 자르고 나자 해를 가리던 것이 사라져 호수는 햇빛을 그대로 받아 청명하게 빛났다. 그 주변에 자두나무가 자라는 것도 신목이 다 잘린 다음에나 알 수 있었다. 신목을 다 자르고 나서 찾아온 첫 봄, 흐드러지는 자두꽃을 보며 황제는 호수를 ‘이화호’라고 명명했고 그곳에 아주 아름다운 별궁을 하나 지어 황후에게 주었다.

별궁, 이화궁.

황후의 별궁이며, 황제를 제외하면 황후만이 사용할 수 있는 별궁. 봄이 되면 온 세상에 하얀 자두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절경을 보여 주는 곳. 봄마다 별궁에 머무는 서혜 때문에 이연은 사실 이 별궁을 지어 준 걸 조금 후회하는 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을 지어 주겠다. 이곳에 가장 아름다운 것을 지어 너에게 선사하겠다. 그렇게 생각했던 이연이지만 서혜가 이렇게 자주 머물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그는 서혜가 별궁에 갈 때마다 내키지 않아 했고, 이제 이연을 좀 알게 된 서혜는 별궁에 가고 싶을 때마다 잠자리에서 청을 올려 그의 윤허를 받아 내곤 했다.

어제도 그러했었다….

궁을 짓지 말았어야 해.

이연은 혀를 찼다. 궁을 짓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놈의 궁을 짓지 말았어야…. 아아, 선택은 한순간이었고 후회는 평생을 가지.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렇다고 손에 쥐여 준 것을 도로 빼앗을 수도 없는 노릇. 서혜는 왜 그 별궁을 그리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음이다.

“태자도 데려갔느냐?”

이연이 태감에게 물었다. 제대로 물은 것도 아닌데 태감은 바로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태감이 웃음을 슬쩍 참고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이연이 구겨진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태감이 황제의 앞에 일거리들을 쌓기 시작했다. 황후가 없을 때 황제가 그저 묵묵히 일만 하려고 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황후가 없으면 황제에게는 낙이 없는 탓이다. 황제의 흥취와 도락은 모두 황후에게 있음이니 그 모든 것이 날아간 지금 황제는 일하는 물레방아와 다를 바가 없다.

사실 신하의 입장에서는 이럴 때의 황상도 참 괜찮으신데.

태감은 별말 않고 황제의 시중을 들었다. 사실 이 상황이 오래가면 황제는 별궁으로 달려가곤 했다. 황제는 황후가 없는 삶을 잘 버티지 못하는 편이었다. 즉위식이라는 일생 한 번의 거대한 일을 앞두고도 그 일에 대한 부담감보다는 황후와 오순도순하지 못한다는 것에 더 불편해했던 황제인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황상도 결국 사람이신 게지.

사람은 다 단점이 있는 게지.

태감은 그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뭐, 남들은 황족은 사람이 아니라는 둥, 신의 일족이라는 둥 하지만 황족도 결국 사람이라는 걸 태감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잣대에 비춰 보면 이 정도 단점은 정말 단점 축에도 들지 못했다.

“황후는 왜 짐이 보고 싶지 않을까?”

…정정. 단점 축에는 든다.

태감은 황제의 혼잣말을 못 들은 척하며 차를 따랐다. 아아. 황제는 신음하더니 갑자기 장계 하나를 잘 만났다는 듯이 집어 던졌다.

“태감. 공부상서를 불러라.”

“…예, 폐하.”

그냥 넘어갈 일도 황후가 별궁에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지 않는다. 황제는 매우 심란하고 언짢으며 희생양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첫 희생양은 아무래도 공부상서가 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태감은 아아, 하고 속으로 한탄했다. 이번에 황후마마는 얼마나 별궁에 머무르실 생각이실까? 혹시 금야에 돌아오시는 그런 기적은 없겠지? 아무래도 황제의 예민함이 극에 다다를 것 같은 기분에 태감은 벌써부터 황후 행차 소리가 그리워졌다.

***

“별궁이 뭐가 좋으시지?”

별궁이 뭐가 좋은지 모르겠는 건 아버지인 이연뿐만 아니라 아들인 수영도 마찬가지였다. 수영은 올해 여덟 살, 부황은 이 나이에 모후를 만나셨다는데 어마마마는 ‘더 큰 다음에 혼처를 찾아볼 거예요.’라며 그의 혼처를 찾아보지 않으시고 계셨고 그는 좀 초조했다. 사람들은 모후보다 아름다운 여인은 세상에 없다 했고, 그렇다면 자신은 못생긴 여인과 혼인해야 했다. 왜에에? 그는 그 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태자였다. 세상을 호령할 강산의 주인이 될 자. 그런 자신이 왜 비를 들이는 데 있어 타협해야 하는가!

“태자비의 위에 서는 것은 미모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에요, 태자.”

모후는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어마마마 정도는 되어야 할 거 아니에요!’ 하고 수영이 말할 때마다 난처하게 입만 벙긋거리셨다. ‘그게….’ 수영은 매우 강경하게 말했다. ‘제가 많은 걸 바랐나요? 어마마마만큼만 되면 된다고요!’ 수영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모후는 곤혹스러워하고 태자궁의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얼굴이라 수영은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왜? 나는 아바마마처럼 어여쁜 여인을 품에 안으면 안 돼?! 수영은 호수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참으로 아름다운 내 얼굴. 이 얼굴에 걸맞는, 어여쁜 여인을 만나고 싶다고! 그게 뭐 그렇게 큰 바람이라고!

“수많은 미인을 품에 안으시게 될 것이옵니다.”

유모 상궁은 그리 말했지만 수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수많은 미인을 안으면 어마마마께서 아바마마를 생각하시는 것만큼 그런 충정과 연정을 받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단 한 명이면 족했다. 사실 그녀가 아주 잘난 집안의 여식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모후께서도 집 안이 한미하시어 차라리 외척이 없다는 점이 좋지 않은가. 자신은 부황을 이을 몸. 강력한 황권을 가지게 될 것이니 여인은 그저 자신의 안에서 보호를 받고 총애를 받으면 그뿐이다.

그러니 예뻐야 한다고!

그거 하나 바라는데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려워!

별궁에 있기 지루해진 수영은 자신이 사냥을 오자고 해 놓고선 정작 다른 이들을 사냥 보내고 홀로 타박타박 숲을 걸었다. 말을 타는 것도 귀찮고 그냥 걷고 싶었다. 어서 자신만의 여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부황도 여덟 살에 만났다는데 자신도 여덟 살에 만나면 딱 좋은….

컁!

이게 무슨 소리야?

수영은 활을 바로 치켜들었다. 어린아이용의 작은 활이긴 해도 그 위력은 성인의 것 못지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걸음마와 동시에 무예를 익힌 수영은 활을 매우 잘 다루기로 유명했다. 그는 활시위에 화살을 건 채 소리가 난 쪽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컁! 캬앙!

사냥감인가?

수영은 자신의 기척을 완전히 지웠다. 보법을 써서 왼쪽으로 조금씩 움직이는 가운데 갑자기 풀숲에서 컁!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수영은 그대로 활시위를 당길 뻔하다가 간발의 차이로 손에 힘을 주어 멈췄다.

사람?

분명 작았지만, 그리고 형태가 기묘하긴 했지만 사람이었다. 정말 한숨 차이였다. 잘못했으면 화살로 쐈을 것이다. 늘 부황께서 이르신 대로 사냥감을 끝까지 보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더라면 활시위를 놓았을지도 모르겠다.

컁!

머리가 은색이었다. 눈은 보라색. 피부는 희고 머리 위로 귀가 돋아 있었다. 누가 봐도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려웠으나 한편으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꼬리가 살랑거렸다.

살랑거리는 꼬리가 하나, 둘… 아홉. 구미호구나. 수영은 눈을 깜빡였다. 구미호. 말로나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부황이나 모후는 보신 적이 있으시려나?

컁, 컁!

보라색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필사적으로 짓는 모습이 다급해 보였다. 수영은 가만히 살피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구미호는 풀숲에서 왜 뛰쳐나왔을까. 도대체 뭐 하러 뛰쳐나왔을…. 야, 잠깐. 너 계집애가 왜 나체야.

“옷 입어, 옷.”

수영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외면하며 재빨리 자신의 장의를 벗어 구미호에게 건네주려 했지만 구미호는 앙칼지게 그 옷을 쳐 냈다. 캬아앙! 구미호가 울음성을 터뜨렸다.

아, 왜! 수영이 화를 내려는 순간 사람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구미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구미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구르더니 수영이 건네는 장의는 안 받고 그의 팔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야! 내 팔목 잡지 마! 아직 혼처 안 정해졌다고!”

컁!

“아, 씨. 야! 안 된다니….”

구미호에게 끌려가면서 수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여인에게 팔목을 잡힌다고 무슨 일이 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계집애가 아무리 구미호라지만 벌건 대낮에 숲속에서 왜 알몸이야?! 차라리 사내아이였다면 손목을 잡혔어도 미물이라 아는 게 없구나, 했을 텐데 계집아이니 너무나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 좀 놓고….”

수영이 화를 내려는 순간이었다. 풀숲을 지나자마자 보인 광경에 수영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거대한 은여우 한 마리가 화살 몇 개를 맞은 채 쓰러져 있었다. 컁, 컁! 구미호가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달달 떨었다. 멀리서 사람의 소리가 들리자 어쩔 줄 모르는 꼴이 도움은 요청해야겠고 화살을 쏜 저이들보다는 수영이 나을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꼬리는 하나네.

이 여우는 구미호가 아니구나. 하지만 분명 소중한 동족이겠지. 수영은 무릎을 꿇고 여우의 맥을 확인했다. 맥은 완전히 끊겨 있었다. 오래 고통받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게 이 아이에게 위로가 될까.

수영은 구미호를 바라보았다. 컁, 컁, 하며 우는 보라색 눈이 서글펐다.

아니, 나는…. 그저 심심해서 사냥을 시켰을 뿐이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수영은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듣다가 구미호에게서 제 손목을 비틀어 빼내었다. 그리고 불편한 얼굴로 장의를 건넸다.

“지금 오는 건 내 사람들이고 그들이 이 여우를 죽인 거 같아.”

“……!”

“너까지는 죽이지 않을 테니 가. 이 옷 입고.”

사냥을 한 걸 사과할 수는 없다.

이 숲은 모후의 숲이니 들어온 쪽이 잘못이다. 사과하는 순간 모후의 숲임을 부정하게 된다. 그러니 사과할 수 없다. 자신은 태자이고 결코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일 수 없다.

아는데도.

보라색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걸 보니 마음이 불편해서 수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서 가!”

수영이 고함을 지르자 아이가 고개를 돌려 은여우를 한 번, 그리고 수영을 한 번 바라보았다. 이윽고 아이가 더듬, 더듬 중얼거렸다.

“갈… 데가, 없… 어….”

태자 수영. 여덟 살 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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