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88)화 (88/100)

88.

서혜는 홍 부인의 딸이 보고 싶었다. 그 아이가 유음과 비슷한지, 혹은 전혀 다르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홍 부인은 딸을 한 번 데려오라는 말에 바로 다음 날 제 딸과 함께 입궁했다. 홍 부인은 사실 권문세가의 딸이었는데 금왕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다 보니 황후에게 줄을 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열혈의 풍모가 돋보이는 여인이었다. 그녀에게 이리저리 치장을 당한 그녀의 딸이 서혜의 앞에 섰다.

“홍가의 하련이옵니다.”

홍하련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딸은 유음과 판박이었다. 애초에 그렇게 태어날 인물이었는지 제 어미를 많이 닮아서인지 외모가 유음과 비슷했고 그 기질도 아주 똑같아 보였다. 오랜만에 성장한 것인 듯 영 불편해하는 것이 귀여워 서혜는 웃고 말았다.

“여기는 태자다.”

서혜는 일부러 데려다 놓은 수영이를 인사시켰다. 그녀는 유음에게 자신의 아이를 보여 주고 싶었다. 그저 혼자만의 욕심이었다. 자신으로 인해 목숨을 빼앗겼던 아이 둘을 한자리에 두고 차 한 잔 마시며 그들이 살아 있음에 행복해하고 싶었다. 다른 가지에서는 그들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여기에서는 그들이 부디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모후.”

아직 연치는 어리나 교육은 완벽하게 받은 태자, 수영이 하련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서혜를 불렀다. 은은하게 웃는 얼굴에 불만이 가득 있어 보였다. 느낌이 좋지 않아서 서 상궁이 재빨리 수영의 반쯤 빈 잔에 차를 따랐다. 어서 차나 마시며 입을 다물었으면 하는 바람이 담긴 행동이었다. 그러나 수영은 입을 다물지 않았다.

“소자의 혼처를 정하실 때 오직 하나만 청코자 하옵니다.”

“혼처?”

아직 수영이의 혼처는 생각도 않고 있었는데.

수영이는 아직 어렸다. 물론 태자의 혼처는 어릴 때 결정이 나지만 서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서혜는 수영이의 혼처를 좀 더 나이가 든 다음 결정할 예정이었다. 본인의 의사도 조금은 생각하고 싶었다. 동궁의 안주인을 정하는 자리이니 수영이가 좋다고 다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본인의 의사를 아예 무시하는 처사도 하고 싶지 않아 이연에게도 말해 둔 터였다. 이연은 늘 그렇듯 서혜가 원하는 대로 하라며 웃었었다.

그런데 정작 어린 수영이가 먼저 혼처 이야기를 할 줄이야.

“무엇이더냐?”

“소자는 최소, 모후만큼의 아름다움을 가진 처자와 혼인하기를 원하옵니다.”

최소?

월아와 서 상궁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절세미인인 데다 나이도 잘 먹지 않는 황후를 두고 최소라고? 다섯 꽃잎들이 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황후도 어지간히 아름다웠다. 여전히 그녀는 수많은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외신들은 종종 그녀가 나타나면 술잔을 떨어뜨리기 일쑤였다. 그토록 독보적인 미모를 지닌 모후를 두고, ‘최소’?

“그… 그래?”

아름답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서혜다. 그녀도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순간 말문이 막혀 말을 못 했다. 더 기가 막힌 건 그다음이었다. 수영이 빤히 홍하련을 바라보며 말한 것이다.

“예, 모후. 최소.”

한마디로 홍하련은 못 생겨서 싫다는 것이다.

수영이 오해를 해도 단단히 했는데 문제는 홍하련이 그 오해의 대상이라는 것에 있었다. 홍하련의 눈에 불꽃이 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홍하련이 벌떡 일어났다. 깜짝 놀란 홍 부인이 제 딸을 막아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홍하련이 소리를 질렀다.

“황후마마! 소녀도 청이 있사옵니다!”

우렁찬 청이었다.

“마, 말해 보아라….”

서혜가 아들의 눈치를 힐끔 보며 허락했다. 아무래도 좋지 않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막을 명분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 싸움을 먼저 시작한 것은 수영이지 않은가. 아니 애초에 그 씨앗을 제공한 건 자신인가.

서혜가 괜히 둘을 만나게 했다고 후회할 무렵 홍하련이 외쳤다.

“소녀의 혼처로 여인보다 얼굴이 허옇고 가늘가늘한 사내를 고르게 하지 말아 주옵소서!”

“…너희의 혼처를 고르려고 한 적이 없느니.”

서혜가 어두워진 낯빛으로 한마디 했다. 그러자 그 목소리를 알아들은 홍 부인이 “어머.” 하고 안타까운 신음을 흘렸다.

신분이 신분이니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아니었군.

하련의 신분을 생각하면 태자비 자리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갑자기 이 자리에 태자를 부르기에 어쩌면, 하고 식은 국을 벌컥벌컥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역시 아니었구나. 어미의 쓰린 마음도 몰라주고 홍하련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코가 삐뚤어져라 코웃음을 치는 또래의 여아를 보며 수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나 제 모후만 보아 온 수영에게 저렇게 대가 센 여아는 듣도 보도 못한 생물이었던 셈이었다.

“모후, 소자는 물러가고 싶사옵니다.”

홍하련이 질색이라고 수영이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나. 서혜는 한탄을 하면서도 수영을 물러가게 해 주었다. 수영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냉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석반을 물리고 차를 마시며 오후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연은 서혜의 곤란했던 심정을 거들어 주기는커녕 웃음만 터뜨렸다.

“최소, 황후라고요? 최소?”

크게 웃는 이연을 서혜가 원망스럽게 흘겼다. 미인의 새치름한 눈길에 이연이 팔을 뻗어 그녀를 품으로 당겨 안았다. 하지만 그는 웃음을 멈추지는 못했다. 그는 서혜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키들거렸다.

“수영이가 늘 효자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혼사 건으로 크게 불효를 저지를 모양입니다.”

“폐하.”

“우리 황후마마만한 미모를 도대체 어디서 만나겠다고 최소라는 소리를 하는지.”

누가 봐도 아름다운 서혜였지만 이연의 눈에는 특히나 아름다운 서혜이기에 그는 아무래도 수영이 혼인을 못 할 것 같다며 계속 웃었다. 태자가 혼인을 하지 못한다면 그 무엇보다 심각한 일인데도 그는 그저 웃기만 했다. 서혜는 그런 중차대한 문제를 농지거리 삼는 지아비가 무심하게 느껴져 그의 가슴을 한 번 툭 쳤다. 그러자 이연이 또 웃었다.

“더 세게 때려 보시지, 왜.”

“폐하!”

“…어찌합니까? 태어나서부터 본 얼굴이 이 얼굴이라.”

이연이 서혜의 턱을 부드럽게 잡았다.

“이 얼굴만큼은 되어야 한다는데.”

이연의 입술이 서혜의 입술을 부드럽게 빨았다. 응. 서혜가 몸을 가볍게 뒤로 물리려 했지만 이연의 팔이 어느새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있었다.

“아비로서 아니 된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서혜야.”

“폐하.”

“여보, 나도 이 얼굴이 아니면 안 되는데. 내 아들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한다면.”

이연이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뭐가 웃긴지 자꾸 웃었다. 아무래도 어린 아들이 벌써 외모를 운운하는 게 우스운 듯했다. 서혜가 미간을 찌푸리자 이연이 서혜의 턱을 놓고 대신 미간을 살살 펴 주었다.

“아들이 그렇다는데, 아비가 뭐라 하겠어? 나 또한 대륙 최고의 미인을 품은 것을. 모범을 보일 수 없으니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하지만 태자비 자리는 미모로 오를 수 있는 곳이….”

서혜가 답답해하며 말하려는 순간 이연이 고개를 저었다.

“누가 오르나 결국 똑같아.”

이연의 단호한 말에 서혜가 그를 바라보자 그가 속삭였다.

“동궁도, 용상도, 누가 오르나 똑같아. 뭐 하나 대단치 않은 곳이지. 그보다 나는 심서혜의 남편 자리가 훨씬 좋은데.”

이연의 속삭임에 서혜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용상보다 남편 자리를 더 탐낸다는 말에 가슴이 들뜨지 않을 여인이 어디 있을까, 서혜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진심이라는 걸 서혜는 이미 여러 차례 봐 왔다. 서혜는 가만히 손을 들어 이연의 뺨을 쓰다듬었다. 저녁이라 살짝 수염이 돋은 그 뺨은 훨씬 사내다웠다. 뺨의 까칠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훑자 이연이 입술을 올렸다.

“물러가옵니다.”

서 상궁이 재빨리 고하고는 모든 궁녀들을 수습해 뒤로 물렸다. 어느새 침소에는 단둘이 되었다. 서혜는 이런 분위기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아이를 낳은 이후로는 거의 매일같이 이런 분위기가 되고는 했으니까.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시작 직전, 그녀는 여전히 가볍게 긴장하게 되었다.

“탕약은?”

이연이 물었다. 서혜는 회임을 막아 주는 탕약을 매일 먹고 있었다. 이연은 서혜가 출산 끝에 목숨을 잃을 뻔했었다는 걸, 정확히는 잃었다는 걸 잊지 않았다. 그는 다시는 서혜에게 임신을 시키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태자는 있었고 설사 태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태제로 올릴 인간은 득시글거렸다. 그러니 굳이 자식은 더 필요 없다는 게 이연의 생각이었다. 어떻게 생겨 먹은지도 모르는 자식 따위와 서혜를 맞바꿀 수는 없었다.

서혜는 먹었다는 대답 대신 이연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서혜의 작은 혀가 이연의 입술 안으로 들어왔다. 할짝, 할짝. 소동물이 핥는 것처럼 서혜는 이연의 입 안을 핥아 나갔다. 음. 이연이 나지막이 신음했다. 그는 늘 그렇듯 서혜가 해 주는 것에 약했다.

서혜의 우아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이연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몇 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이연이 더 못 참고 자신의 옷을 벗어 던졌다. 빠른 속도로 옷을 벗는 그의 앞에서 서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지아비의 탈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뒤로 달이 뜬 게 보였다. 보름달이었다. 그 보름달을 바라보던 서혜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별궁에 가고 싶어요.”

서혜의 말에 나신이 된 이연이 다가오며 물었다.

“지금?”

“내일쯤에요.”

이연은 서혜의 머리카락을 입술로 애무했다. 그의 입술이 떨잠을 하나, 또 하나 빼내기 시작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가만히 미소 지었다.

“그래, 내일.”

오늘은 내가 조금, 급해서.

그렇게 말한 이연의 손 안에서 서혜의 고운 옷자락이 찢겨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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