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87)화 (87/100)

87.

“마마, 요즘 소인의 모심에 부족함이 있으신지요?”

서 상궁이 어느 날 하는 말에 서혜는 난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태현력 5년. 여전히 이연은 서혜만 총애했고 다른 여인들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결국 조정의 강력한 압박으로 그는 후궁을 들였으나 책봉식에서 그녀들의 얼굴을 보는 것 외에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으며 간택도 서혜가, 책봉식 준비도 서혜가, 문안도 서혜가 받았다. 가끔 서혜는 자신이 그녀들의 지아비인 것처럼 느낄 때조차 있었다.

“아니, 괜찮다.”

“후궁마마들이 좀… 너무 드세십니다.”

드세다고 서 상궁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정5품인 서 상궁의 상전이 존재하기 않기 때문이다. 성총을 받지 못하였으니 지위도 다들 높지 못하여 기껏해야 재인 정도가 한계인 후궁들은 늘 서혜의 주변에서 안달복달했다. 서혜를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 하고 서혜에게 이르고 싶어 하고 서혜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며 가장 큰 문제는 황제에게 여간 관심이 없는 게 아니었다. 뭇사람들이 이 후궁은 황제의 후궁이 아니라 황후의 후궁이라고 비웃을 정도였다.

서혜는 이마를 짚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말하지 마라.”

평생 홀로 지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서혜로서는 갑자기 생긴 수많은 자매들의 앙탈과 애교에 약간 지쳐 가고 있었다. 간택을 잘못했나? 서혜는 머릿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이연은 간택 시에 단 하나만을 요구했다. 평생 독수공방해도 괜찮은 여인인지 확인할 것. 그런 게 괜찮은 여인이 어디 있겠냐고 반문하자 그럼 후궁은 한 명도 안 들이겠다며 이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쩔 수 없이 서혜는 그런 여인들을 찾아보기로 했는데 의외로 세상에는 그런 여인이 꽤 있었다. 심지어 아름답고 교양 있고 멀쩡한 권문세가 여인들 사이에서 ‘밤 시중도 안 들어도 되고 평생 호사하며 황궁에서 살 수 있다’는 소문이 도는 바람에 그 어느 때보다 후궁 후보 경쟁이 치열해지는 이상 현상이 발생할 정도였다.

서혜가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라고 생각할 무렵 황후전 앞이 소란에 휩싸였다.

“아니, 마마님. 아직 조반도 드시기 전인데 어찌하여 이런 이른 시간에.”

월아가 나와 눈살을 찌푸리자 월아의 오른팔 같은 궁녀가 재빨리 월아와 재인의 중간을 막아섰다. 재인이 눈을 새치름하게 뜨더니 생긋 웃었다.

“내가 떡을 해 왔느니라. 언니는 깨알만큼 드시는데 조반을 드시기 전에 드려야지.”

“언니라니요. 그분은 존귀하신 황후마마십니다.”

궁녀는 등 뒤의 월아에게서 어금니가 바스라지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바로 재인에게 지적했지만 재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자매지간이지 않느냐. 같은 지아비를 모시는 자매간이거늘, 그런 사소한 것은 잊어버려라.”

“황후마마의 지엄함이 어찌 사소합니까!”

아, 미치겠네, 진짜!

후궁이 질시와 시기와 치정과 암투로 질척거릴 때는 목숨의 위협이 참으로 괴로웠으나 대놓고 발랄하게 황후 쟁탈전이 벌어지는 것도 봐주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 황후 쟁탈전은 묘하게 서 상궁이나 월아, 혹은 황후전의 궁녀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도대체 왜 황후에게 대놓고 친한 척인가. 그럴 만한 위치들도 안 되면서.

“너희는 상궁이고 나는 후궁이다. 비키거라!”

“아니, 황후마마께옵서는….”

궁녀가 쉬셔야 한다고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소 재인.”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그 절세의 미모만큼이나 아름다운 목소리에 재인이 활짝 웃는 얼굴로 계단 위를 올려다보았다.

“언니!”

서혜는 소 재인의 환한 웃음을 볼 때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차라리 적의를 드러내면 어찌 감당해 보겠는데 호의로 가득 찬 이 얼굴에 어찌 침을 뱉으리오.

“그리 부르면 아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소 재인.”

서혜의 말에 소 재인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공부상서의 독녀인 소 재인은 올해 열여덟 살이 되었다. 본래대로라면 이미 정혼자가 있고 성인이 되는 올해 성혼을 올려야 맞으나 소 재인은 하늘이 내려 준 재녀라는 소문이 돌 정도 글과 그림에 모두 능하지만 정작 여인으로서의 훈육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왈가닥이었다. 공부상서는 아주 보수적인 사람이었으나 아들이 열 명이었고 딸은 하나였다. 심지어 그 딸인 소 재인은 친가 외가를 합쳐 단 한 명의 손녀였으니 그 귀함이 어찌 아들에 비하리.

하고 싶은 것은 모두 하게 해 준 끝에 소 재인은 문과에 응시한다면 장원 급제를 할 학식을 갖추었으나 자수도 요리도 전혀 모르는 특이한 여인으로 자라 버린 것이다. 제 아들보다 똑똑한 며느리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소 재인은 아름다운 외모에 출중한 재능까지 갖췄으나 정혼자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후궁의 조건을 듣자마자 온 집안을 발칵 뒤집으며 자신은 후궁이 되겠다고 선언한 인물이었다.

대체로 후궁들이 이런 유형이었으니 다들 사이는 좋았다. 총명하고 안목도 높고 서로 매일 즐거이 다과를 즐기며 신선놀음에 빠져 있었다. 다 같이 뱃놀이, 꽃놀이를 가고 술을 마시고 연회를 즐기고, 세상 모든 최고의 유흥은 후궁에 있다고 할 정도였다.

그 모든 걸 조율해야 하는 서혜만 힘들어지고 있었다. 후궁들은 다들 어렸고 철부지였으며 왠지는 모르지만 서혜를 언니처럼 따라서 그녀에게 말하면 모든 게 이루어진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꽃놀이 가고 싶어요. 연회 열고 싶어요. 비단이 갖고 싶어요. 눈썹먹이 갖고 싶어요. 그녀들은 매일 서혜에게 와서 조잘거렸다.

“언니, 제가 떡을 해 왔어요!”

“소 재인이?”

소 재인은 요리를 못 한다. 아주, 못 한다. 서혜는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소 재인이 새벽부터 일어나 자신에게 주겠다며 바지런을 떨어 요리를 하는 동안 얼마나 열심히 했을지, 두근거렸을지도 잘 알고 있었다. 도대체 왜 자신에게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운 일이긴 했다.

서혜가 도시락을 받아 뚜껑을 열자 월아가 눈썹을 찡그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소 재인은 요리를 못 한다. 아주, 못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재인이 그렇게 요리를 못 하는데, 왜인지 모르지만 자꾸 요리를 시도하고 그 시도한 요리를 황후에게 진상하고 싶어 한다. 황후에게 진상이라니? 웃기지도 않지. 황후는 세상에서 가장 잘된 음식만 먹어야 하는 고귀한 분이거늘.

아니나 다를까, 황후는 떡을 한 입 먹고는 잠시 굳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주 잠시뿐이었고 이윽고 그림처럼 웃으며 끝까지 떡을 먹은 뒤 아주 환하게 웃었다.

“맛있습니다.”

황후의 말에 소 재인이 양손으로 양 뺨을 감싸고 “아이, 진짜요.”라며 기뻐했다.

모든 궁녀들이 그 순간 헤식은 얼굴로 웃었다. 그럴 리가. 황후의 저 미칠 듯한 환한 웃음은 주로 거짓말할 때 나오는 것이다. 이제는 모두가 그걸 알고 있었다.

그날 오후 사왕비가 입궁했다. 그녀는 한 거상의 아내인 여인을 데리고 입궁하겠다고 하였는데 서혜는 개인적으로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다. 동궁에 소속된 상단도 그 크기가 거대한 편이었으나 저 거상 또한 대륙을 흔든다고 할 정도로 규모가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거상은 자신의 아내에 대한 총애가 매우 지극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금왕. 그는 그렇게 불렸다. 금력으로는 왕과 같다고 불리는 사내가 제 아내를 어찌나 연모하는지 늘 아내뿐이라 하였다. 자신 말고 그런 여인은 처음 들어 봤는지라 서혜는 그녀가 궁금했었다.

“황후마마를 뵈옵니다.”

황후를 본다는 것으로 흥분해 홍조를 띤 뺨을 하고 나붓하게 절하는 여인의 얼굴을 보고 서혜는 순간 말을 잃었다. 서혜가 아는 얼굴이었다. 저 얼굴을 어찌 잊을까. 저 얼굴은.

“마마?”

저 얼굴은 분명히.

사왕비가 당황한 얼굴로 서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데려와서는 안 될 이를 데려온 것일까. 지금이라도 물러가게 해야 하나. 그런 기색이 역력했다. 그건 같이 온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거상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는 여인은 그만큼 호사스럽고 아름다웠는데 자신이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난 건 아닌지, 황후의 어떤 심기를 거스른 건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서혜는 그녀의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어서 오라.”

목소리가 잠긴 것 같았다. 서혜는 겨우 한마디를 뱉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보다 못한 서 상궁이 웃는 얼굴로 그들을 봄날의 정자로 안내했다. 서혜는 가만히 걸으며 멍한 머리를 일깨웠다.

정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건너편에 있는 여인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다시 봐도 그녀가 맞다. 그녀는 첫 꿈에서 만난 여인. 유음 황녀의 어머니였던, 바로 그녀였다. 그녀를 이번에는 서혜 자신이 황후인 상태로 만나게 된 것이다.

이런 얄궂은 운명이.

말이 잘 나오지 않는데 사왕비가 분위기를 깨려는 듯 입을 열었다.

“황후마마, 여기 이 사람은 금왕이라고 불리는 홍단영의 안사람입니다.”

“아아, 홍 부인. 어서 오시게나.”

서혜가 겨우 말하자 홍 부인이 활짝 웃었다.

“지엄하시고 존귀하신 황후마마를 뵈어 지극히 광영이옵니다, 마마.”

서혜는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홍 부인, 그 이름이 어찌 황후에 비할까. 그런데 그녀는 황후라고 불릴 때보다 홍 부인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행복해 보였다. 그때와는 달리 얼굴에 그늘 한 점이 없었다. 온몸을 호사스럽게 감싸고 행복해하고 있었다. 아마 여기서 자신이 내쳐도 조금 시무룩해하고는 금세 행복한 삶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그 정도로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서혜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아이가… 있나?”

홍 부인은 갑자기 나온 말에 의아한 듯 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딸아이가 한 명 있사옵니다.”

딸이 한 명.

서혜는 저도 모르게 유음 황녀를 떠올렸다. 자신이 그 육체를 갈취했던 작은 여자아이. 그 아이가 죽었던 것인지 자신에게 생을 빼앗겼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자신이 사라진 다음에 그 아이는 살아남았을까. 그 삶 속에서 그 아이는 괜찮았을까. 마음에 걸리는 순간순간이 있었었는데.

“그래, 어떤 아이인가?”

서혜의 하문에 홍 부인이 사왕비를 바라보았다. 난처한 얼굴이었다. 사왕비가 킥, 웃음을 터뜨렸다. 홍 부인이 왜 난처해하는지 아는 것처럼. 이윽고 홍 부인이 곤란한 표정으로 한마디로 표현했다.

“활발하옵니다.”

유음 황녀가 딱 그러했다. 아주 완곡하게 표현하자면 활발했고 제대로 표현하자면 제멋대로의 천방지축이었다. 그러나 사랑스러운 아이였을 것이다. 서혜는 그렇게 생각했다. 분명히 다른 곳에서 태어났더라면 그 아이는….

서혜는 저도 모르게 또 물었다.

“부군은 아이를 귀여워하나?”

그 말에 홍 부인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연히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서인 듯했다.

“계집아이인데도 상단을 물려받게 하겠다며 벌써부터 교육이 한창이옵니다. 아주 귀여워하지요.”

“본인은 상단을 물려받고 싶어 하고?”

“계집아이지만 대범한 편이라서요, 마마.”

행복한가 봐.

아아, 서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신벌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신목을 그렇게 다 잘라 버려서 신벌을 받으면 어떡하지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구원받을 거 같을까. 왜 이렇게 안심이 될까. 모든 것이 마치 제자리에 있는 것만 같아서.

천지신명이 용서하는 것만 같았다. 서혜는 하아, 하고 가늘게 숨을 쉬었다. 오래도록 묵었던 숨 한 자락이 흘러나와 공중에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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