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달이 반짝이고 있었다. 보름달이 유독 환하고 컸다.
“전, 아니, 폐하, 폐하. 어디로 가시나이까.”
서혜의 손목을 잡은 이연이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즉위식의 대연회가 한창이었다. 외신들의 인사를 받는 데만 한나절이 걸렸는데 정작 인사를 다 받자마자 이연은 황후가 된 서혜를 데리고 자리를 나와 버렸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알 바 아니라는 식이었다. 그들의 뒤를 태감과 그 일행, 서 상궁, 월아 그리고 그들의 궁녀들이 따르고 있었다. 다들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발걸음으로, 그러나 빠르게 움직였다.
가장 당혹한 사람은 서혜였다. 그녀는 하얀 손목을 잡힌 채 빠른 걸음으로 이연을 따라가고 있었다. 이연이 어디로 가는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서혜가 몇 번이나 이연을 불렀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끔씩 서혜를 돌아보며 웃을 뿐이었다.
후궁 안쪽으로 들어가자 말 몇 마리와 함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게 보여 서혜는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이건 어디를 가려는 분위기인데. 서혜가 이연을 바라보자 이연이 면류관을 벗어 기다리고 있던 태감에게 건네며 말했다.
“가실 데가 있습니다.”
“예?”
즉위식 연회를 두고 어디를 가잔 말인가. 서혜가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그리할 수는.” 하고 서혜가 중얼거렸지만 이연은 활짝 웃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을 거추장스럽게 하는 것들을 하나씩 벗어 태감에게 건넸고 태감은 주변의 내관들에게 바로바로 넘겨주었다. 이윽고 의복이 다소 편안해진 이연의 몸 위로 검은 장의를 입힌 태감이 난처하게 미소 지었다.
“정녕 가시나이까.”
“금야에 드려야지.”
이연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얼굴로 웃어서 태감이 아아,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그렇게 난처해할 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엄한 황제가 하겠다는데 무엇을 말리겠는가. 그저 그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태감의 의무일 뿐이다.
그 의무는 서혜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서혜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궁녀들의 탈의 시중을 받았다. 궁녀들은 서혜의 머리 위의 관을 빼고 머리의 수많은 장식들을 적당히 빼어 그녀를 조금 편하게 해 주었다. 감히 옷을 벗기지는 못하였으나 그 위에 검은 장의를 덧입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검은 장의. 서혜는 이연이 궁 밖으로 나갈 생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 이연도 자신도 검은 장의를 입어 신분을 숨기고 호위들도 잠행을 돕기 위해 의복을 갈아입고 있는 것이다.
“폐하. 어, 어, 어디로 가시려 하시옵니까?”
연회의 책임은 서혜에게 있다. 서혜는 이연의 생에, 그리고 그녀 자신의 생에 단 한 번밖에 없을 즉위연을 위해 수많은 정성을 기울였다. 그녀는 잠잘 시간을 아끼며 이 즉위연을 완성해 냈다. 천하의 아름다운 것들, 희귀하고 신기한 것들, 그런 것들을 통틀어 만든 연회였다. 연회장을 설치하는 데만 보름이 걸렸고, 인공 냇물이 연회장을 은은하게 감도는 가운데 냇물 대신 술이 흘렀다. 산해진미는 제국 방방곡곡의 수많은 명인들이 황도로 올라와 만든 작품들이었다. 이런 연회를 두고 어디를 가시겠다는 말인가.
“받으실 게 있으십니다.”
이연이 말했다. 받을 거? 서혜는 눈을 깜빡였다. 자신이 받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그게 뭐든 간에 오늘 밤에 받을 물건은 아닐 것이다. 서혜는 거의 빌 것 같은 얼굴로 “폐하….”라고 중얼거렸지만 이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혜를 안아 말 위로 올렸다. 서혜는 어쩔 수 없이 말에 올라탔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지만 곧 포기했다. 황제는 무치(황제는 수치가 없다. 즉 그의 모든 행동은 정당하다는 뜻). 그는 강산의 주인이니 아무도 그의 뜻에 반하지 못한다.
이연이 훌쩍 말 위로 올라 한 팔로 단단히 서혜의 가느다란 허리를 붙잡았다.
“오래는 걸리지 않을 것이나 그래도 날이 날인지라 조금 빠르게 달려야 합니다. 힘들면 기대세요.”
“어디를….”
“가면 아십니다.”
이연은 즐겁게 웃더니 이랴, 하고 소리쳤다. 말이 순식간에 튀어 나갔다. 그러자 그 뒤를 이어 호위무사들이 일제히 말을 달렸다. 말 한 무리가 달리자 모든 궁의 문이 동시에 열렸다. 황제의 무리는 아무도 모르게 후궁 안을 마구 달려 궁의 후문으로 나왔다. 그리고 어느 한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곧 겨울이 되려는지 바람이 제법 쌀쌀했으나 춥지는 않았다. 워낙 의복을 여러 겹 겹쳐 입은 까닭이다. 도리어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와닿아 서혜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황후로서의 첫 과제, 결코 실수해서는 안 된다는 중압감에 등뼈가 내려앉는 것 같았다. 상전이라도 계시면 혼나고 눈치를 보더라도 조금쯤은 그분의 조언을 받을 것이고 그만큼 자신의 책임도 덜어질 텐데 서혜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오롯하게 홀로 책임을 져야 했다.
수많은 외신들이 달려들어 하나하나 눈으로 재단하고 판단하는 자리. 그리고 본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주군에게 평가를 할 그 첫 자리를 스스로 온전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매일 제대로 식사도 못 했는데 어쨌거나 즉위연은 그녀가 바라는 모습으로 열렸고 그 연회에서 나와 바람을 쐬는 것이 무척 시원했다.
서혜가 눈을 감자 마치 그 모습을 본 것처럼 이연이 서혜를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했다. 서혜는 더 이상 허리를 세우지 않고 이연에게 기대어 눈을 감았다. 불편한 말 위에서도 잠을 잘 수 있을 것처럼 이 순간이 달콤했다. 그냥 자고 싶어. 서혜는 눈을 감은 채 그렇게 생각하다 정말로 선잠이 들어 버렸다.
“황후, 일어나셔야 합니다. 다 왔어요.”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에 서혜는 눈을 번쩍 떴다. 귓가를 간질이는 입술에 신음할 뻔한 것을 이를 악물어 겨우 참고 눈을 뜨자 보이는 건 거대한 호수였다.
이 호수가… 왜 이렇게 낯이 익지?
서혜는 고개를 갸웃거릴 뻔했다. 낯이 익으면서도 한없이 뭔가 어색한 호수였다. 여기가 어디지? 알 것 같은 기분도 드는데.
이연이 먼저 말에서 내리더니 서혜를 안아 말에서 내려 주었다. 그는 서혜의 손을 잡고 천천히 호숫가로 움직였다. 반짝이는 별들이 하늘 위에, 그리고 호수 안에 떠 있었다. 서혜는 호수를 가만히 바라보며 한 발짝씩 움직였다. 어디선가 본 듯한 호수다. 너무나 익숙한, 호수….
이 호수를, 내가 어디서….
그때 호숫가에 다다라 호수 물에 서혜는 자신을 비춰 보게 되었다. 호수 물에 비친 자신을 보는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서혜는 다시 고개를 들어 호수를 확인했다. 이 호수. 서혜는 그제야 이 호수가 무슨 호수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바로 알아보지 못한 까닭도 알게 되었다.
“폐하, 신목은….”
서혜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신목을 어떻게 했냐고 묻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연은 싱긋 웃었다.
이연은 신목을 잘랐다. 아무도 신목에 해를 가하려고 하지 않았다. 신벌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인들을 동원해 신목을 자르고 또 잘라 냈다. 그 신목을 어디에도 쓰지 않고 모조리 태웠다. 자르는 것뿐만 아니라 물속에 있는 신목까지 모조리 베어 끌어냈다. 물속에도 신목은 가지 하나 남지 않았다.
수천 명이 동원되어 나무를 자르고 또 잘랐다. 죄인들조차도 신벌은 두려운지 엉엉 울며 신목을 잘랐다고 한다. 신목을 자를 때마다 기이한 현상이 계속 발생했다. 신목은 피가 흐르기도 했고 고름이 나오기도 했다. 어느 부분에서는 갑자기 벼락이 치기도 했다. 죄인들은 용서해 달라고 빌기도 하고 스스로 자진하려는 자조차 나왔지만 이연은 태연했다.
조정에서는 이연이 신목을 자르는 것을 반대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잘려 나가는 신목보다 신목을 자르면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이연을 더 무서워하게 되었다. 나무에서 피가 나든 고름이 나든 벼락이 치든 호수 물이 피로 물들든 이연은 코웃음만 쳤다. 신벌이 무섭다는 신하들에게 “황제가 더 가까운지 신이 더 가까운지 보고 싶으냐.”고 으름장을 놓자 신하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신목이 사라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였으나 이연은 기필코 그 일을 해냈다. 호수가 새까맣게 죽어 가는 걸 보면서 사람들은 이제 제국은 멸망할 것이라고 떠들어 댔다. 신목을 자르는 일 자체는 기밀이라 아는 사람만 아는 것이었지만 그 아는 사람들은 매일 사당에 가며 자신의 죄를 빌고 또 빌었다.
그런데 정작 신목을 전부 회수하자 호수가 푸르러지기 시작했다. 그 어느 때보다 맑고 영롱한 호수가 되기까지 걸린 것은 오직 하루였다.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호수는 깨끗해졌다. 신목이 모두 없어졌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처럼.
그러자 사람들은 ‘어쩌면 신목은 괴물이었을지도 몰라.’라고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간사하다면 간사한 태도 변화였으나 이연은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행복해지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것에 그가 타박을 어찌 놓겠는가.
“신목은…?”
서혜가 다시 한번 물었다. 경악에 가득 찬 얼굴로.
“잘랐습니다.”
그 엄청난 우여곡절을 이연은 한마디로 줄였다. 잘랐다. 그 한마디에 서혜가 양손으로 이연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서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쩌시려고, 어찌하시려고. 폐하, 어찌하시려고!”
서혜의 목소리에 비통함이 담겼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이연이 잘못될까 봐. 이연은 웃었다. 신목을 자르는 동안 이연이 잘못될까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이연을 원망하기만 했는데 서혜는 순수하게 이연을 걱정하고 있었다. 신목을 자르는 걸 결정한 이연이 잘못될까 봐 얼굴이 희게 질린 서혜를 안고 이연이 속삭였다.
“너와 살려고, 서혜야.”
“폐하…!”
“이제 아무도 널 데려가지 못해. 내 옆에 있는 거다.”
다른 꿈의 누군가가, 다른 선택의 누군가가.
다른 선택지가.
거슬렸다.
서혜를 데려가려는 자.
서혜에게 선택받을지도 모르는 자.
모두 말살하고 싶었다. 연결은 끊겼고 더는 아무도 서혜를 움직이지 못한다.
서혜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신첩은, 신첩은 폐하의….”
이렇게 하지 않아도, 이런 무서운 짓을 하지 않아도.
자신은 그의 것인데.
서혜의 얼굴을 본 이연이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가두는 겁니다. 아무 데도 가시지 못하도록.”
“폐하….”
“무서우십니까?”
이연이 물었다. 목소리가 이연답지 않게 무뚝뚝했다. 서혜는 문득 이연이 두려워하는 건 신벌이 아니라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무섭다고 하면 그는 상처 입을지도 모른다. 고작, 그런 것에. 신벌도 두려워하지 않은, 모든 것을 이겨 내고 용상에 오른 사내가.
서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녀는 더 말하지 않고 이연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녀는 가만히 있다가 쥐어짜내듯이 속삭였다.
“신목이 없으면 신첩도 다섯 꽃잎이 아닐 것이옵니다, 폐하. 신첩은….”
세상을 밝힌다는, 정통성을 부여하는, 성군을 낳는, 그 어떤 것도 해 드릴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서혜의 말에 이연이 쓰게 웃었다.
“너는 그저 내 아내면 돼. 다섯 꽃잎 따위 되지 마. 나는 그게 아주 진저리가 나.”
이연의 말에 서혜도 웃었다. 웃으며 그녀는 조금 울었다. 자신의 존재가 소중한 지아비를 어디까지 몰아붙인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왜 자신의 지아비는 여기까지 와야 했을까. 신벌을 받을지도 모르는 일을 자처했을 때 모두가 얼마나 증오했을까. 그 증오를 자처하고, 패륜아를 자처하고, 그 모든 것을 감내하여.
자신이 뭐라고. 고작 여인 하나가 뭐라고.
서혜는 이연의 허리를 와락 부둥켜안았다. 등 뒤로 보이는 호수가 반짝이고 있었다. 별빛을 담은 호수가 달빛을 머금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호수였구나. 서혜는 눈을 감았다.
<본편 완결, 외전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