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이연의 즉위일은 서혜에게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이었다. 즉위가 다가올수록 서혜와 이연은 서로 만나기도 어려워졌다. 잘 시간을 내는 것조차 어려울 지경이니 서로를 만나 다정히 말을 건넨다는 건 어불성설, 만나더라도 공적으로 할 이야기들이 태산같이 쌓여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서로 마음에 담아 두는 수밖에 없었다. 서혜는 잘 버티는 편이었다. 그녀는 본디 인내심도 강한 편이었고 이연의 총애에 집착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연은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황제 즉위라는 생애 최고의 일을 앞두고 그는 바짝바짝 말라 갔다. 서혜를 볼 때마다 손가락이 저릿저릿한데 그녀가 상냥한 얼굴로 용건만 말하고 사라지는 것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서혜를 끌어안고 그녀의 보드라운 몸을 맛볼 수 없다는 것이, 아니 몸은 고사하고 그녀의 다정한 마음 한 조각 핥아 볼 수 없다는 것이 그를 미치게 하고 있었다. 황제가 되는 것을 모두가 경하, 경하, 경하한다는데 이연은 벌써부터 용상이 싫어졌다.
“서혜는?”
장계를 확인하고 첨언하며 묻는 말에 참다못한 태감이 “전하.” 하고 한마디 나직하게 그를 일깨웠다. 아침부터 틈만 있으면 자신의 비에 대해 묻는 태자의 작태가 한심스러웠던 탓이다. 즉위가 코앞이다. 수많은 외신(타국의 신하)들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제국에 걸맞는 장엄한 즉위를 위해 모든 대소 신료들이 전국에서 올라왔다. 수많은 이들이 한순간을 위해 모든 정성을 다하고 있는데 정작 그 본인은 때마다 처의 동태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으니 그 꼴을 어찌 봐주랴.
태감이 왜 자신을 부르는지는 알지만 이연은 도무지 서혜를 살피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서혜는 깔끔하게도, 간단하게도, 자신에게서 관심을 거두었다. 그녀는 바빠 보였다. 수영이와 세상일에 치어서 자신의 지아비는 아예 잊어버린 것 같았다. 가끔 만나면 그 해사한 웃음을 보여 주긴 하지만 그 웃음을 주는 것조차 힘겨워 보일 때가 있을 정도였다.
애새끼도 낳지 말았어야 했고.
이 빌어먹을 자리에도 오르지 말았어야 했어.
이연의 속은 여덟 살 때의 그보다 더 어리게 변하여 한없이 투덜거리고 있었다. 모든 걸 해결하면 행복만 남을 줄 알았는데 웬걸, 일상은 운명보다 더 큰 장벽이었다.
“그래서 내 비는?”
이연이 짜증을 내자 태감이 희미하게 한숨을 쉬었다. 상전의 심기를 거스를 정도는 아니게, 그러나 불만을 적절하게 표출한 조심스러운 한숨이었다. 그리고 태감이 대꾸했다.
“황태손 전하와 계십니다.”
“도대체 유모 상궁들은 쓰임이 무엇이다 하더냐?”
“전하께옵서 모체를 알아보시고 기꺼워하시는 효자시니 이 어찌 복이 아니오리까.”
태감이 태연자약하게 대꾸했다. 실제로 황태손 수영은 여전히 제 어머니나 아버지를 기가 막히게 알아보고 있었다. 곧 돌이 되는데도 그는 품을 많이 가렸다. 잠이 들어야만 겨우 유모 상궁에 품에 순순히 안길 정도였다. 다들 황태손의 까다로움에 쩔쩔매기 일쑤였다. 그 노고를 알아주기는커녕 이연은 험상궂은 태도로 일관했다.
“복 같은 소리.”
이연의 말에 태감이 희미하게 웃었다.
하기야 요즘 황상께옵서 마음이 적적하실 때지.
태감도 이해는 했다. 제 부모를 죽이고 모두를 나락으로 떨어뜨려 권좌에 오른 마음이 어디 녹록하고 쉬울 터인가. 총애하는 여인은 한 사람뿐이니 그녀가 황상의 마음을 보듬어 드리면 좋으련만 그녀가 하필 황실 최고의 여인이라 공사가 다망하기 이를 데 없으니 어찌할 것인가.
이래서 총애는 후궁에게 줘야 한다니깐.
태감은 혀를 찼다. 혜비가 총애를 받던 선황 시절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일은 황후가, 마음을 보듬는 것은 혜비가 하는 것으로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인들은 그 일이 나뉘어져 있다는 것을 서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나 황제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만족스러운 구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성정이 아니기에 태감은 결국 이 남자를 선택했다. 한 명에게만 집착하는 성미.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반대급부도 극복하겠다는 의지의 사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냐마는 변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것도 희귀하다. 그렇게 보이는 것만으로도 그는 가치가 있었다.
다시는 현비 같은 여인이 나오지 않기를.
다시는 그녀같이 희생당해 찢겨 죽는 여인이 없기를.
태감은 간절히 바랐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기일 아닌가?”
이연이 무심히 물었다. 눈으로는 여전히 장계를 훑으면서.
태감은 말없이 입꼬리만 올렸다. 오늘이 현비의 기일이었다. 사랑받고 싶었던 여인. 호사를 바란 게 아니라 그저 한 남자에게 가장 사랑받는 여인으로 남고 싶었던 사람. 그녀는 결국 희생양으로 죽었고 그녀의 제사를 지내는 것조차 무도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걸 가장 잘 알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죽은 날을 ‘기일’이라고 존중해 준다.
“제사는?”
이연이 이어 물어서 태감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사당에 올렸나이다.”
“그럼 만났겠군.”
“…….”
“월아가 그래 봬도 의리는 좀 있지. 안 그런가?”
태감은 이번엔 저도 모르게 대답을 삼켰다.
월아는 현비의 상궁이었다. 현비의 상궁이라는 이유로 혀를 잘렸던 여인이었다. 제 상전을 원망할 법도 한데 월아는 아무도 모르게 현비의 제사를 지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현비는 월아에게 잘해 주었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그녀는 아마도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 태감과 그녀는 다른 곳에서, 태감이 한없이 높은 곳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는 한없이 낮은 벼랑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도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칼을 갈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태자비였던 황후가 냉궁에 나타났다.
월아는 거기에 모든 것을 걸었다. 당시 태자비였던 황후는 그때 태자였던 황제를 구하면서 전화위복했다. 그때 그녀를 냉궁에서 꺼내 준 건 누구였을까. 냉궁의 문을 연 건 누구였을까. 태감은 월아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월아는 승리했다. 지금이야 황후의 둘도 없는 심복이나 그때 월아는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그걸 이연은 언제 알았을까.
태감이 차마 묻지 못하는 말을 이연은 알아들은 것 같았다. 태감의 질문에 굳이 대답해 주지는 않았으나 이연은 웃으며 다른 말로서 알고 있었다는 걸 긍정해 주었다.
“죽은 자에 대한 의리가 그 정도라면.”
“…….”
“결국 내 비의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비에 대한 믿음으로 이연은 간자와 다를 바가 없는 월아를 두고 본 것이다. 태감이 가만히 이연을 바라보자 이연이 별거 아닌 것처럼 한마디 덧붙였다.
“태감은 모르지만 내 비는 정말 매혹적이거든.”
***
황후 책봉은 즉위날 같이 진행되었다.
즉위식, 태황태후를 책봉하였으나 정작 태황태후는 자리에 나타나지 못했다. 그녀는 와병 중이었다. 태황태후전은 가면 갈수록 쓸쓸하고 스산한 기운만 감돌게 되었다. 즉위식이 열려 온 황궁이 빛을 머금은 것처럼 반짝이는 가운데에도 태황태후전은 마치 냉궁처럼 싸늘하기만 했다. 궁인들이 바쁜 걸음을 재촉하다가도 태황태후전 근처에만 가면 기척을 죽이고 어깨를 움츠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오늘 유독 안 좋은 기미가 느껴진다며 궁인들이 소곤거렸다. 물론 그럴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쁜 날이기에 모두들 기척을 죽이고 빠르게 사라지기 일쑤였지만 그 와중에도 다들 태황태후전을 흘끔거렸다. 그 안쪽, 태황태후전의 궁녀들은 어제와는 다른 태황태후의 분위기에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매일 뭔가를 부수고 비명을 지르던 태황태후가 정작 정식으로 태황태후로 책봉이 된 오늘 묘하게 조용한 탓이었다. 어제와 다르니 더 불안하여 궁녀들은 숨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무릎을 꿇은 채 내내 고개를 숙이고 눈치를 보며 서로 시선을 교환할 뿐이었다.
무슨 일일까? 모르겠어. 결국 눈으로 할 수 있는 대화는 이 정도가 전부인데도 그들은 계속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렇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분위기가 무거웠다.
“소손은 금야가 지나면 황위에 오르옵니다, 마마. 태황태후의 위에 오르시는 것을 경하드리기 위하여 찾아뵈었나이다.”
어젯밤, 태자 아니 이제는 황제인 이가 와서 태황태후를 놀리듯 말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녀는 꽤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매일 부수는 백자 항아리를 집어 던졌을 정도로 강경한 반응을 보이며 꺼지라고 소리 지르던 그녀에게 황제가 말했다.
“마마, 소손과 마마 사이에 오해가 있는 듯하여 경사스러운 날이 오기 전에 그 오해를 풀기 위해 왔나이다. 그러니 부디 고정하시옵소서.”
“무엄한 자가 감히 세 치 혀를 놀려 나를 농락하려 드는구나!”
“불행히도 아직 제 용건은 시작되지도 않았고 농락은 차후에 당하시게 될 터지만.”
황제는 차가운 눈으로 태황태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나, 마마. 소손이 농락을 하는 것일지, 마마께옵서 존체를 농락하신 것일지는 소손이 가늠하지 못하겠나이다.”
“궤변을 늘어놓으려고 왔느냐?!”
“마마.”
황제는 차를 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앉겠다는 의사 표명도 없었다. 그는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왔고 용건이 끝나면 바로 사라질 예정인 것 같았다. 그래서 태황태후는 순간 불안해졌다. 간단한 용건 같은데 왜 굳이 와야 했을까.
듣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
누군가가 머릿속에서 속삭였다. 귀를 막는 게 어떨까. 그러나 태황태후는 그럴 수 없었다. 지체 높은 자신이 어찌 그런 체통 없는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녀는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말해 보라는 듯이. 그러자 황제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달도 없는 밤, 유독 그 미소가 환하게 느껴진 것은 왜일까. 악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미소였다. 도리어 약간의 연민, 동정, 안타까움, 그런 것들이 뭉쳐 있는 미소가 태황태후를 더 거슬리게 했다. 어서 말하고 썩 나가라고 고함치려는 찰나, 황제가 말했다.
“소손은 용상에 오르고 싶지 않았사옵니다.”
그 말에 조금의, 아주 조금의 거짓이라도 있었더라면.
태황태후는 지금도 그 목소리를 반추해 보았다. 수백 번, 되새김질해 보아도 그 목소리는 친절하고 동정에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손은 친왕으로 살며 부황과 마마와 모후와 서모에게, 그리고 태자 전하께.”
이 아이가 친왕이 되었더라면 태자의 자리에는 운왕이 올랐을 것이다. 태황태후는 그런 미래를 한 번 상상해 보았다. 이 아이가 친왕이고 태자의 자리에 운왕이 올랐을 그런 미래.
“충성을 다하였을 것이옵니다.”
“…….”
“소손과 소손의 가정만 지켜 주셨더라면 소손은 얼마든지 전쟁에 나가 검을 휘두를 준비가 되어 있었사옵니다. 그러니 마마.”
황제가 안타깝게 웃었다.
“오해를 푸시고 심화를 가라앉히시어 만수무강하시옵소서.”
마지막 말은 조금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나머지 말들에서는 비웃음을 찾을 수가 없었다. 도리어 황제는 약간 ‘왜 일을 이렇게까지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그녀를 추궁하는 것 같았다. 자기 자신도 답답하다고, 왜 여기까지 일을 몰아붙여야 했냐고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했다. 시종일관 웃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담담했고 부드러웠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태황태후는 눈을 감았다. 이제 흘릴 눈물도 남아 있지 않았다. 회한의 눈물도 슬픔의 눈물도 더는 아무것도 남지 않아 그저 텅 비어 버렸다. 이렇게 살다 죽겠지. 그녀는 의자에 앉은 채 거울을 돌아보았다. 거울 속의 여인은 피부가 시커멓게 얼룩덜룩했다. 이렇게 살다가.
누군가는 자진하였고
누군가는 불구덩이로 뛰어들었는데.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자신은 아마 이렇게 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죽을 것이다. 그것이 손자가 자신에게 행한 복수라는 걸 그녀는 희미하게 깨달았다. 죽지 못해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복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