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84)화 (84/100)

84.

“황상께옵서 최근 광증을 보이신다고 하옵니다.”

보고는 가면 갈수록 음울해졌다. 이연은 장계를 읽으면서 시선도 들지 않았다. 그렇겠지. 그는 당연하게 생각했다. 자신이 서혜를 생각하는 만큼은 아니어도 꽤 혜비를 아끼던 분이 아니시던가. 혜비가 기어코 그곳으로 기어 들어와 같이 병에 걸렸으니 그 꼴을 시시각각 보고 있는 마음이 미쳐 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약은 잘 조절하고 있다더냐?”

장계에 붉은 먹을 묻힌 붓으로 무언가를 적어 내리며 이연이 물었다.

“예, 전하. 차질 없이 행하고 있나이다.”

“그럼 됐다. 어쨌거나 존귀한 몸, 오래오래 광영을 누리셔야지. 아니 그러냐?”

이연의 말에 내시감이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숙였다.

태자는 어디까지 사람을 심어 놓은 것일까? 그 생각만 하면 내시감은 등골이 바짝 조여들었다. 내시감도 다른 고위 내관들도 아무도 모르게 시작된 이 일은 어느 날 갑자기 황제가 역병에 걸리면서 수면 위로 드러났다. 황제는 역병에 걸렸다. 그건 역병이 분명했다. 온몸이 짓무르고 붓고 열이 끓어오르고 구멍이라는 구멍에서는 전부 피가 흐르며 피부는 모두 수포가 생겨 고름이 흘러나왔다. 누가 봐도 역병의 모습이었다.

누가 역병을 옮겼는가. 많은 이들은 이것을 궁금해하면서도 사실은 누가 그랬는지 마음으로는 짐작하고 있다. 태자가 분명했다. 황제와 척을 진 태자가 기어코 황제를 벼랑 끝에서 밀어 버린 것이다. 차라리 완벽하게 밀었다면 자비로웠을 텐데, 황제는 계속 벼랑에 매달려 있다. 시시각각 손끝에서 힘이 빠지는데도 그는 벼랑에 매달리는 걸 멈출 수가 없다. 그러는 사이 이제 그 옆에 혜비까지 매달리게 되었다. 황제가 미치지 않을 수가.

도대체 어떻게 역병을 옮겼는가. 내시감은 태의원의 누군가가 황제가 매일 먹는 탕약을 이용했으리라 추측했다. 그러나 태의원의 누구를 도대체 간자로 심었을까. 태의원은 그 어느 곳보다 철저하게 관리된다. 간자를 심기가 결코 쉽지 않은 곳인데.

“전하.”

내시감은 나지막한 목소리에 고개를 흘끗 돌렸다. 황제를 가장 옆에서 모시는 태감이 부드러운 얼굴로 태자의 앞에 서 있었다. 황제의 곁에 있어야 할, 최소한 지금 진선전 근처에 머물러야 할 태감이 여기에 있다는 건 결국….

내시감은 속으로 혀를 찼다. 진선전, 즉 황제의 최측근들이 태자의 곁으로 움직였다는 이야기인가. 권력은 한순간이고 덧없는 것이지만 이렇게나 잔혹하고 빠르게 이동된 적이 있었던가.

“소신이 전하를 뵈옵니다.”

태감은 상대를 전하라고 칭하면서도 절은 아무렇지도 않게 황제에게 하는 절을 했다. 내시감은 그 절을 보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저 절을 보았다는 티를 내서는 안 되리라. 저것은 태감이 태자에게 바치는 충성의 맹세이고 자신 따위는 저 냉혹한 태감의 눈에 잘못 들면 하루아침에 세상 하직인 것이다.

“그래, 진선전 이야기는 들었다.”

“소신은 모르옵니다.”

태감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진선전을 책임지고 통괄하는 자가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에 내시감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목숨이 위태로운 것인데. 내시감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내시감을 내보내시지요. 담이 작은 자라 심장에 무리가 올까 소신이 염려되나이다.”

마치 꿰뚫어 본 것처럼 태감이 말했고 내시감은 히익, 하고 숨을 집어삼켰다.

“담이 작으면 키워야 하지 않겠나?”

이연이 비릿하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

“타고난 그릇을 어찌 키우겠사옵니까?”

태감의 말에 이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장계를 닫더니 턱짓을 했다. 그 턱짓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시감으로서는 볼 수 없었으나 태감은 볼 수 있었다. 태감이 다정하게 내시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가 보시게.”

마치 자비를 베푸는 듯한 태도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태도에 발끈해야 하지만 내시감은 정말로 태감이 관대하게 배려해 주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이상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위험한 일에 얽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시감은 “화, 황송하옵니다.”라고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 스스로도 모를 인사를 하고선 줄행랑을 치듯 물러났다.

이연은 픽 웃으며 이미 식은 찻잔을 들었다.

“겁주기는.”

“저 남자는 너무 잘 이리저리 옮겨 다니니 이 정도 목줄은 해 두는 게 좋사옵니다, 전하.”

“그렇잖아도 요즘 간이 콩알만 해졌다. 옮겨 다니기는커녕 걸어 다니기도 힘든 신세야.”

“대자대비하신 건 좋으나.”

태감이 이연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찻잔을 빼어 들었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내관들이 다가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으로 찻잔을 바꿔 주었다. 이연은 자신의 손에 당도한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마시던 차와 똑같은 차가 그 안에 찰랑이고 있었다.

“과연 빈틈이 없군.”

이연의 웃음에 태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내관들이 전부 물러나 단둘이 되자 태감이 말했다.

“아직 자비를 베푸실 때는 아니옵니다, 전하.”

태감의 목소리는 차분하여 감정이 없었다. 마치 주군에게 충심으로 고하는 신하처럼 느껴졌으나 이연은 속지 않았다. 황궁은 그렇게 돌아가는 곳이 아니므로.

“현비가 그렇게 좋았는가?”

이연의 질문에 태감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이연은 그 모습을 보며 쯧 혀를 찼다. 황제의 최측근 중의 최측근인 태감은 예순이 넘은 나이의 사내였다. 그는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은 자였고 내시였으나 원하는 여인과 살림을 차릴 수 있었으며 어떤 고관대작에 비할 바 없이 강력한 권세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본 성정이 냉혈한에 아무도 믿지 않는 완벽주의자라 대부분의 삶을 황궁 안에서 보냈으며 여인도 가까이하지 않았고 남색도 거부하였다. 오로지 일에만 매진하며 높이, 그저 높이만 올라가던 그였다.

그런 그가 왜 현비에게 빠져들었는지는 이연도 알 수가 없다. 현비와 그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고, 사실 현비가 그의 마음을 알고나 있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러나 이연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현비의 유례없는 출세는 그의 입김이 상당히 많이 발휘된 것이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현비를 출세시켰다. 황제에게 더 노출시켰고 황제의 총애를 받을 수 있도록 조종했다. 현비가 행복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것 같았다. 그 결과 그녀는 찢겨 죽었다.

그리고 태감은 그녀가 찢겨 죽자 그걸 윤허한 황제도, 그렇게 만든 황후도, 현비를 거기까지 이용하고 발을 뺀 태후도 용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때 마침 태자가 모두와 척을 졌고 태감은 아무도 모르게 배를 갈아타 버렸다. 아무도 모르게. 그것은 그의 특기였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비밀이 없는 법.

“어디가 그렇게 좋았지?”

이연의 하문에 태감의 눈이 잠시 먼 곳을 헤매는 듯했다. 그러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태감의 시선이 이연을 향했다. 그는 붉은 먹을 집어 들어 갈기 시작하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저 존재만으로 충분했습니다.”

태감의 목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감정이 녹아 있었다. 이연은 태감이 어쩌면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그는 당연히 눈물 따윈 흘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분명히 비통함과 고통에 젖어 있었다. 태감이 이윽고 물었다.

“무엄하오나 전하께옵서도 그렇지 않으신지요?”

이연은 잠시 서혜를 떠올렸다. 꽃과 달을 좋아하는, 절세미인인데도 호사스러운 것을 별로 내키지 않아 하는, 언제나 순종적인, 늘 그것을 강요받은, 그러나 연모지정을 깨달았을 때 그 누구보다 활활 타오르는 그녀를. 강하고 약하고 섬세하고 대범한, 그 모든 것을 가진 그녀를.

‘그’가 아니면 안 되는.

변질된 그조차 용서하지 않는, 오로지 순수한 지금의 ‘그’를 원하는 서혜를.

“그래.”

다른 이들은 여인의 정조를 중시한다고 했다. 정조를 잃을 바엔 죽어 버리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그것이 절조라고 했다. 그러나 이연은 서혜가 아무리 더럽혀져도 좋으니 그저 살아 있기만을 바란다. 그저 살아 있기만. 내가 찾으러 갈 수 있도록, 네가 버티기만 하면. 버텨 주기만 하면 내가, 반드시.

존재만으로도 감사하고, 존재만으로도 사랑스러운.

설사 누군가에게 빼앗긴다 하더라도 너는 그대로 어여쁘고 아름답기를. 내 고통과는 상관없이.

그게 뭔지 아주 잠깐이나마 느껴 봤었다.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지.”

이연의 말에 태감이 작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다 이연이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동안 위험한 일 하느라 고생 많았다. 네 몸에 이상이 없어서 기쁘군. 진심이다.”

태감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무도 모르게 무언가를 하는 것. 그것이 태감의 특기였다.

그날부터 한 달 동안, 세인들의 관심사에는 참 많은 것이 오르내렸다. 혜비가 죽었고, 결국은 황제가 훙서하였다. 황제의 죽음으로 세상일이 너무나 많이 바뀐 탓에 작은 것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사라져 갔다. 심상운 대감이 심장 마비로 죽은 것, 심씨 일족들에게 닥친 수많은 파란 따위는 사람들이 알 바가 아니었다. 황제가 죽었는데 이미 세도가도 아닌 양반의 우여곡절 따위에 그 누가 관심이 있겠는가.

서 상궁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전이 떠올랐다. 이젠 황후에 오른 심서혜가 태어났을 때 붕새가 날아들어 온 황도 사람들이 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그날이. 어제처럼 생생하면서도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전설 속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옷깃을 살며시 잡아끌어 옆을 보자 월아였다. 월아가 어서 가자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여인은 황후마마 외에는 남 따위 관심도 없고 세상사에도 무정한 여인이라 이런 마음 같은 걸 알아줄 턱이 없었다. 서 상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어느 초라한 초가집 앞에 선 월아가 손가락으로 한 여인을 가리켰다. 갓난애를 안고 있는 여인은 초췌하고 삶이 힘겨운 게 역력해 보였다. 서 상궁은 낮은 담 너머로 흘끗 그녀를 보고는 월아의 손을 들어 글을 썼다.

저 여인?

그러자 월아가 서 상궁에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턱짓으로 갓난애를 가리켰다.

심씨 가문이 완전히 끝장나면서 그 집 며느리의 삶은 팍팍해졌다. 그녀는 꽃잎을 낳았는데 황제는 더 이상 심씨는 황궁에 들이지 않는다고 성지를 내린 상황이었다. 보통 때라면 조정에서 극렬 반대가 일어났을 것이나 지금 황제는 완전한 황권을 소유하고 있어 찍소리도 못 하고 있었다. 성지는 내려졌고 심씨는 갈 곳이 없었다.

타국에서 찾고 있다 하니 아마 이국으로 떠날 것.

몇 꽃잎이지?

하나.

역대 한 꽃잎이 나온 적은 없었다. 적어도 세 꽃잎. 혹은 네 꽃잎. 드물게 다섯 꽃잎. 그런데 한 꽃잎이 나왔으니 그건 그것대로 모자란 취급을 받으리라. 아아, 삶이 기구하겠구나. 서 상궁이 혀를 찼다. 차라리 꽃잎이 아닌 삶을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심씨 가문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꽤나 미모의 여인으로 자랄 것. 꽃잎만 포기하면 삶은 꽤 여유로울 수도 있다.

힘들어 보이는군.

서 상궁의 한마디에 월아가 쌍심지를 켰다.

살림살이를 잘 보십시오. 제 버릇 개 못 주고 저리 낭비를 해 대는 평민이 어디 있습니까?

월아의 말에 자세히 보자 살림살이가 다 궁에서나 쓸 법한 물건들이기는 했다. 이제 평민과 다를 바가 없는 삶을 살게 되었는데도 눈높이를 낮출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초가집이라고는 해도 갖출 건 다 갖춰져 있는, 꽤 넓은 곳이었고 입지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저토록 불행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다른 평민들에겐 모욕적인 일이 되리라.

서 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꽃잎의 세상도 끝난 듯했다. 마지막 꽃잎은 황후 자리에 올랐고 세상은 달라졌다. 달라진 세상에서는 또 어찌 살아야 할까.

서 상궁은 잠시 아이를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황후에게는 한 가지 인생밖에 존재하지 않았으나 저 아이에게는 두 가지의 인생이 존재하게 된 셈이다. 꽃잎으로서의 인생. 보통 사람으로서의 인생. 부디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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