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서혜가 진선전에서 내려와 가마에 오를 때 내관 하나가 다가와 서 상궁에게 연통을 내밀었다. 서 상궁이 날카로운 눈매를 엄하게 치켜뜨자 내관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매를 회수했습니다.”
연통을 받아 든 서 상궁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서혜가 태어난 날을 떠올렸다. 그날은 누구도 잊기 힘든 날이었다. 대여섯 살만 되었어도 그날을 잊지 못하는 것은 역시 붕새가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붕새.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붕새라고 하기에 정녕 부족함이 없는 크기와 위엄을 갖춘 새가 다섯 꽃잎이 태어나는 내내 그 근처에 있었다. 제 새끼를 보호하는 것처럼.
높이 오르실 거라 믿었지.
황궁에서 높이 오를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는 어렵다. 그녀가 태자비라 할지라도 황후라 할지라도 그녀가 완주하는지는 다른 문제다. 그가 황제라 할지라도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곳이 바로 황궁이다. 호사스러운 독 안개로 가득 차 있어 조금만 크게 숨을 쉬어도 잘못되는 곳.
당금의 황제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는 도대체 어디서 병을 얻었는가? 병이긴 한가? 병이 아니라면 어떻게 된 것인가? 병이라면, 또 어떻게 된 것인가? 역병을, 도대체 어떻게 황제가, 황제 혼자 걸릴 수 있는가.
당연히 계략이 있었음이다.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가? 황제 자신이다. 황궁은 그런 곳이다. 고꾸라진 쪽이 잘못한 것이지, 발을 건 쪽에는 잘못이 없다.
태자비 또한 험한 일을 많이 겪었으나 그녀는 기어코 이 자리에 오르지 않았는가. 물론 오르는 것만큼이나 유지하는 것이 어렵기는 하나 태자비의 경우는 괜찮을 것이다. 태자의 총애가 워낙 강력하지 않은가.
무엇보다 태자비가 달라졌다. 늘 순종적이고 방어에 급급하던 태자비가 이제 더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공격적이 되었다. 강해졌다. 그것은 황궁의 높은 자리에 있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모습이었다. 아랫사람으로서는 매우 기꺼운 상전의 변화라고 할 수 있었다.
“비 전하, 매를 회수했나이다.”
서 상궁이 연통을 내밀자 가마 밖으로 서혜가 손을 내밀었다. 하얀 손은 꽃을 닮았다. 우아하고 섬세한 하얀 꽃. 그러나 저 손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졌는지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서 상궁이 그 손 위로 연통을 조심스럽게 올리자 서혜가 연통을 받아 휘장 안쪽으로 손을 들였다.
연통을 꺼내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사왕부의 인장이었다. 사왕부? 서혜는 눈살을 찌푸렸다. 사왕부에서 동궁에 간자를 심었나. 곧 서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사왕이나 사왕비라고 하더라도 동궁에 간자 한둘 정도는 심었을 것이다. 운왕부가 해체되어 사왕부에 편입되기는 했지만 그걸 다시 해체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 태자였다. 언제나 동태를 살펴야 마땅했다.
하지만 적당히 눈치는 봤어야지.
동궁에서 매를 날리다니. 눈살이 찌푸려질 만한 일이다, 생각하며 연통을 보던 서혜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혜비마마께서 진선전 입전을 요구, 태자비 전하께서 저지를 위해 진선전으로 행차 중. 폐하의 와병에 대하여 의문이 증폭될 듯.
와병에 대하여 의문이 증폭될 듯?
꾸깃, 서혜는 서신을 구기기 시작했다. 주먹 쥔 손으로 조금씩, 조금씩 꾹꾹 눌러 구기면서 어떤 무엄한 자가 이딴 서신을 보냈는지 알아봐야겠다고 이를 갈았다. 의문이 증폭돼? 말에 뼈가 있다고, 이 말은 깊은 뜻을 숨기고 있었다. 황제는 와병 중이 아니라 감금 중인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월아.”
서혜가 부르자 월아가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은 그녀의 말 대신 움직이는 도구가 되어 마치 노래하는 듯이 움직였고, 그녀의 손짓을 본 월아의 아래에 있는 궁녀가 재빨리 가마를 멈추게 했다. 월아가 가마의 휘장을 걷고 서혜에게 자신의 귀를 내밀었다. 서혜의 목소리가 심상찮은 것이 심각한 하명이 떨어지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서혜는 작은 약과처럼 구겨 놓은 서신을 월아의 손에 쥐여 주며 속삭였다.
“서신을 보낸 자를 찾아내라.”
월아의 눈이 서혜를 빤히 바라보았다. 찾아내서 어찌하오리까? 월아가 그렇게 묻고 있었다. 서혜는 잠시 생각 끝에 월아에게 손짓했다. 월아가 다시 귀를 가까이 대 주었다.
“이 서신이 정확히 누구에게 갈 예정이었는지 알아내고 나라 밖으로 쫓아내라.”
나라 밖.
월아는 묵례로서 복종을 표하고 휘장 안쪽에서 빠져나왔다. 휘장을 잘 여민 다음 손가락을 움직이자 궁녀가 눈치 빠르게 다시 가마를 출발시켰다. 월아는 가마를 따라가며 모두의 사각지대인 것을 확인한 뒤 슬쩍 서신을 손안에서 펴 보았다. 그러고는 피식 웃었다.
나라 밖이라.
태자비는 많이 강해졌지만 기본적으로 유한 사람이었다. 이런 서신을 쓴 사람을 나라 밖으로 쫓아내는 것으로 마무리 지으라니.
뭐 바다도 사막도 나라 밖이지.
월아는 서신을 다시 구겼다. 서혜와는 달리 월아의 손에서 서신은 단번에 구겨졌다.
***
혜비가 진선전에 갇혔다는 이야기는 삽시간에 황궁에 퍼졌다. 그 이야기는 마치 사람들의 귀에 빨려 들어가는 듯이 퍼져 나가 저녁 무렵에는 황궁 밖으로까지 흘러갔다. 혜비가 진선전에 들어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는 것, 강 태사를 불렀다는 것, 그리고 본인이 비명을 지르고 울음을 터뜨리고 난동을 부리더니 결국은 나오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 그 자세한 이야기들이 도대체 어디서 샌 건지는 몰라도 묘사까지 아주 상세하게 돌아다녔다.
강 태사는 황제의 현 상황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 중 한 명인 듯하였으나 그는 결국 “역병이신가 보오.”라고 무뚝뚝하게 한마디 하여 이 상황을 종결하고야 말았다.
조정에서 가장 강직한 사람과 가장 황제의 편이었을 사람이 동시에 역병임을 인정한 셈이 되어 황제의 역병설은 갑자기 힘이 실렸다. 더 이상 황제가 감금된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병이겠지.”
그의 어머니조차도.
아니, 태후는 황제가 역병일 거라고 초기에 생각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아들이 감금을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으나 가면 갈수록 역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태후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다 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거울을 내던졌다. 거울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졌다. 궁녀들이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거울을 치우기 위해 움직였다. 매일 거울이 깨지고 똑같은 모양의 거울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태후가 아무리 부셔도 모든 것이 다 그대로다.
“본후를 이 꼴로 만든 놈이 제 아비에게 역병 하나 못 심었을까?”
태후는 이제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이 얼룩덜룩했다. 그 모습을 본 궁녀가 가만히 있다가 무릎을 꿇고 중얼거렸다.
“마마, 냉궁에서 죄인 심 씨가 자진하였다고 하옵니다.”
자진한 것은 어젯밤인데 오늘 오후에서야 알리게 된 것은 내내 태후의 기분이 너무나 안 좋았기 때문이다. 틈을 보려고 노력하였으나 틈이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바로 말하는 수밖에.
“…태자의 친모 말이냐?”
“예, 마마.”
“자진은 왜? 그딴 괴물을 낳았으면 끝까지 살아야지, 왜 죽어?! 조상님을 뵐 면목이 있긴 하다고 하더냐?!”
태후가 노성을 내지르자 궁녀는 그저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태후는 가만히 눈을 내리떴다. 황후 심씨. 그 아이는 자신이 직접 간택했다. 아들은 혜비를 황후로 올리고 싶어 하였으나 태후는 그것을 반대했다. 태후 자신이 심씨가 아니었기에, 꽃잎이 아니었기에, 지아비인 선황은 같잖은 소리를 참 많이 들어야 했다. 아들이 그런 소리를 듣지 않기를 바랐다.
이 나라는 도대체 왜 정통성을 황가의 피가 아닌 꽃잎의 유무로 판단하는 것인지, 그것만 생각하면 속이 뒤집어지지만 그것이 천지신명의 뜻이라니 어찌하겠는가. 아들은 반항이 심했었다. 태어나서 그렇게까지 제 어미의 뜻에 반대하는 아들을 본 적이 없었다.
“정실을 두고! 조강지처를 두고! 어찌 다른 여인을 들여서, 정실로 올립니까? 조강지처를 측실로 삼다니요, 어머니, 부끄러운 줄 아세요!”
아들은 혜비를 참 좋아해서 심 씨를 들이라는 말에 제가 모욕받은 것처럼 벌벌 떨었었다. 거기에 대고 태후는 말했었다. 그 감정이 얼마나 갈 거 같으냐고. 친왕과 태자는 다르고 태자와 황제는 또 다르다. 강산의 주인은 한 여인의 것이 될 수 없음이니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이제 와서는 누가 옳았던 걸까.
알 수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심 씨를 들이지 말아야 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랬더라면 그 괴물을 낳을 일은 없었을 텐데.
이런 꼴을 당할 일은… 없었을 텐데.
아픈 과거는 잔상처럼 계속 머리에 맺혀서 사라지지가 않는다.
“…황상은 어찌 되셨다더냐?”
“혜비마마께옵서 간병 중이시라고 하옵니다.”
역병인 황상을 혜비가 어떻게 간호하지?
태후의 눈이 커졌다.
“혜비가? 왜?”
“진선전으로 들어가셨나이다….”
혜비는 언제나 지고지순하게 제 지아비와 자식만 바라보는 여인이었다. 그녀가 심씨가 아니라는 이유로 꽃잎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척했던 게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
“그래….”
태후는 이미 사라진 거울 조각들이 있던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일까. 그때는 왜 그렇게 교만했을까. 마치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것처럼, 가진 것을 영원히 놓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그런 선택을 했을까.
태후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러고는 우셨다고 하옵니다.”
보고를 받은 이연은 피식 웃었다. 그는 별 허튼소리를 다 듣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악어도 그보다는 성의 있게 울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