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목숨을 걸고.
혜비는 입술을 깨물었다. 도박이었다. 만약 전염병이면 나오지 못한다. 전염병이 아니라면 나와도 된다. 혜비의 머리가 복잡하게 움직였다. 정말 나올 수 있을까? 전염병이 아니라도 가두면 그만이 아닌가. 혜비의 얼굴에 쓰여 있는 것을 본 태자가 서늘하게 웃었다.
“문은 잠그지 않습니다.”
혜비의 눈이 커졌다. 당연히 문을 잠글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저 전염병인지 아닌지 스스로 판단하시어 행동하시면 됩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단지.”
단지.
그렇다, 저 뒷말이 핵심일 것이다. 혜비는 싸늘한 시선으로 태자를 바라보았다. 단지, 그다음은 도대체 무슨 말이 나올 것인가.
“전염병인데 나오시어 병을 확산시키시게 된다면 나름의 책임은 지셔야겠지요.”
“나름의 책임이라 하면….”
“완왕과 진왕에게 그 책임을 물게 하겠습니다.”
혜비의 눈이 커졌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완왕과 진왕? 그녀는 운왕을 죽인, 죽였을 것이 분명한, 심증만은 가득한,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인물인 태자를 노려보았다. 내 아들을 하나 죽이고도 모자라 너는 나머지 둘도 죽이겠다 말하는 것인가?! 감히, 내 앞에서?!
혜비의 살벌한 눈빛에 태자비의 어깨가 살짝 굳자 태자가 태자비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는 싱긋 웃더니 “수영이가 기다립니다.”라고 말하며 태자비를 슬쩍 뒤로 밀었다. 이만 가 보라는 의미에 태자비가 어쩔 줄 모르고 혜비를 돌아보았다. 태자가 하는 말의 의미는 태자비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터이니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겠지. 혜비는 입술을 깨물며 태자비가 하는 행태를 지켜보았다. 이제 저도 아들을 가진 어미다. 아들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는 것을 두고만 볼 셈인가?!
“전하….”
“비께서는 부디 제 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태자의 목소리가 나지막해졌다. 무슨 마음을 헤아리라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태자비는 희미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혜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나붓하게 절했다. 그러자 태자비의 일행이 일제히 법도에 따른 절을 올렸다.
“물러가옵니다, 혜비마마.”
물러간다고?
혜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여기에 태자와 자신, 둘을 남겨 두고 태자비는 물러갈 생각이다. 이 일의 끝이 어떻게 되든 개의치 않겠다는 공언이며 자신이 죽어 버리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어찌 네가 이럴 수가 있느냐? 혜비의 참담한 시선이 태자비에게 닿았다.
좋은 사람 따위 되지 말았어야 했다.
다시 한번 저 여인을 위해 종종 동정심을 베풀었던 것이 후회가 되었다. 혜비는 저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태자비는 혜비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물러났다. 그녀의 걸음걸이가 보였다. 우아하고 당당한 걸음걸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제대로 훈련받은 그녀의 모습은 어느 한 곳 빈틈없이 완벽하다. 그래서인가? 그래서 너는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는 건가? 이렇게 손쉽게?
“차라리 네가 죽어 버렸어야 했어.”
악의가 끓어올랐다. 마음속에 가두지 못할 정도로 흘러넘친 악의가 말로 화했다. 혜비의 말에 돌아서서 걷던 태자비의 걸음이 멈칫했다.
“너에게 약간의 마음이라도 주었던 그 시절의 나를 찢어 죽이고 싶다.”
“…….”
“그때 너를 갈가리 찢어 놨어야 했는데.”
추국장에서 바로 찢어 놓을 수도 있었다. 연약하디연약한 곱게 큰 태자비 하나 끝장내는 데 시간이 뭐에 그리 오래 걸릴까. 그래도 당황하고 염려하고 망설였던 내 자신이 원망스럽다. 혜비가 이를 갈며 하는 말에 태자비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하얀 피부다. 흠 하나 없는 피부에 연한 분홍빛 홍조가 노을처럼 뺨에 물들어 있는 절세의 미인이 별을 박아 넣은 듯 반짝이는 눈을 하고 혜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운왕은 이 여인을 언제나 갖고 싶어 했다. 다섯 꽃잎이라, 절세미인이라서, 그리고 본래 자신의 것이어야 했기 때문에. 혜비는 언제나 그 마음을 이해했다. 그래서 늘 마음이 쓰였다. 사실은 내 며늘아기였는데. 이런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딴 생각 하지도 말았어야 했는데.
삿된 년 같으니.
앵두로 물들인 것 같은 도톰한 입술이 움직이는 걸 혜비는 가만히 바라보며 먼저 간 아들을 떠올렸다. 이 아이는 자신의 것이 되리라고 늘 말하던 아들의 얼굴이 떠올라 더 분했다.
붉은 입술이 오밀조밀 움직이는 것을 보느라 그 청아한 목소리가 조금 뒤늦게 귀에 와닿았다.
“가르침을 받들어 신첩은 실수하지 않겠나이다.”
“저 막돼먹은!”
혜비의 입에서 상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태자비는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혜비가 따라가려는 것을 태자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금위병들이 혜비의 앞을 창으로 막아섰다. 혜비는 이를 악물었다. 어찌나 세게 악물었는지 턱에서 으스러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을 정도였다. 그 소리는 곁에 있는 상궁에게도 들려 상궁이 놀라 “마마… 고정하시옵소서.”라고 속삭였다.
상대는 태자이니 이리 틈을 보이시면 안 된다고, 상궁의 목소리에 애절한 당부가 숨어 있었다. 안다, 알아. 혜비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참고 태자를 노려보았다.
“하여.”
태자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상한 얼굴이었다. 그는 흘끗 태자비의 일행이 진선전 끄트머리까지 당도한 것을 확인하고는 시선을 돌려 혜비를 바라보았다. 무심한 얼굴은 언뜻 보면 지루해 보이기까지 했다.
“들어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돌아가시겠습니까?”
전염병이 아닐 것이다.
혜비는 확신했다. 황제는 지금 고립되어 있다. 자신의 아들에게 배신당해 고립되어 죽어 가는 중이다. 그를 구해 내야 한다. 그리고 이 조정을 바로 세워야 한다. 아는데…. 혜비의 고개가 저도 모르게 진선전의 가장 안쪽 침소가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만약에 진짜로….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겁박을 주는 것이다.
“증인이 있어야겠습니다.”
혜비의 말에 태자가 싱긋 웃었다. 누구든 불러 보라는 듯이.
“내가 들어갈 때 강 태사를 불러 주십시오.”
의외의 인물이었다. 강 태사는 운왕비의 할아버지로 운왕비를 몹시 아꼈던 인물이었다. 운왕비가 살해당하자 그 목숨값을 받아 내기 위해 무엇이든 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혜비에게는 원수지간과 마찬가지일 터인데 왜 강 태사를 불러 달라는 것인가. 혜비의 상궁과 궁녀들이 의아하고 불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연은 강 태사 이야기가 나왔을 때 알 만하다고 생각했다. 강 태사는 매우 강직한 인물로 나라 안에서 그 위명이 드높다. 황제의 전염병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을 터이고 이런 상황에서 혜비가 전염병이 아니라고 하는 경우 그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전염병이 아니라고 혜비가 증언했다는 걸 고수할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현 황제의 태사. 태자가 어떻게 해 볼 신분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는 황제의 스승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과연, 황궁 생활을 허투루 하지 않았군.
이연은 잠시 혜비를 바라보았다. 혜비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인물이긴 했다. 자신이 여유 있을 때는 그랬다. 여유가 없어지면 바로 바닥이 드러나긴 했지만 가끔은 정말 좋은 사람일 때가 있었다. 이연에게도 서모로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사실 친모인 모후보다 서모인 혜비가 더 나을 때도 많았다. 비록 다른 배를 탔다는 근본적인 문제는 변함이 없었지만.
이연이 열이 날 때 모후와는 달리 혜비는 바로 알아보았고 조치도 취해 주었다. 이연은 어린 시절 언젠가를 떠올렸다. 다정한 분이구나. 그렇게 생각했던 어느 순간. 전혀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서로의 관계가 잠시 교차하여 마주치던 그 순간을.
“아프신 겁니다. 쉬셔야 해요, 태자 전하.”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아서.
혜비는 좋은 사람이었던 자신을 후회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 그녀도 운왕도 다른 자식들도 꽤 많은 혜택을 보았다. 서혜가 걸리기 전까지 이연은 정말로 혜비를 꽤 많이 봐주었었다.
“강 태사를 불러들여라.”
그러나 여기까지다. 혜비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이곳까지 기어 들어온 것은 그녀의 선택이었다.
강 태사가 입궁한 것은 한 시진 뒤의 일이었다. 한 시진(두 시간) 동안 태자와 혜비는 대치 상태로 서로 가만히 서 있었다. 둘 다 무표정한 얼굴이었고 분위기는 아주 싸늘해서 아랫사람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두 사람은 꽤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과거지사와 미래. 선택에 대한 것들.
그리하여 강 태사가 도착했을 때는 둘 다 마음의 정리가 끝난 상태였다. 강 태사가 두 사람에게 절을 올리는 사이에도 둘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있다가 태사가 고개를 들자 서로를 바라보았다.
혜비가 먼저 강 태사에게 자신의 조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황제의 전염병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들어갈 것이고 전염병이면 나오지 않을 것이며 전염병이 아니면 나올 것이다. 이 증인으로서 강 태사를 불렀노라고 분명히 밝히자 태자가 피식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전염병인데도 나오셔서 전염병을 퍼뜨리시는 경우 완왕부와 진왕부 전체의 목을 자르겠다. 황궁에 역병을 퍼뜨리는 것은 구족을 멸할 만한 죄. 그 대가를 치르리라. 강 태사, 이의 있는가?”
완왕부와 진왕부 전체의 목을 자른다.
혜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강 태사는 그저 순종적으로 고개만 숙일 따름이었다.
“마땅하신 처사이옵니다.”
마땅한 처사라고?!
혜비가 입을 열려는 순간 태자가 쯧, 하고 혀를 찼다. 분위기가 일변한 태자에게 혜비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태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더는 봐주지 않겠다는 듯한 얼굴로 그가 말했다.
“들어가시죠.”
그 말은 힘이 있었다. 혜비는 마치 끌려가는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진선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이, 이러면 안 될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멈출 수가 없었다. 상궁도 궁녀도 그녀를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혜비는 돌아보려 했지만 그 순간 마치 재촉하듯 쯧, 하고 태자가 한 번 더 혀를 찼다. 혜비는 무서워졌다. 천인공노할.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태자를 그렇게 모욕하고 겨우 들어가는 자리인데 정말 역병이면.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럴 리가 없어. 어떻게 황상만 돌림병에 걸릴 수가 있는가. 그건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불안한 예감이 가시질 않았다. 혜비가 몸을 흔들흔들 가누지 못하며 진선전으로 들어가는 순간 태자는 볼일을 다 봤다는 듯이 등을 돌렸다.
“지겨운 짓거리였군.”
태자의 한마디에 강 태사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성정을 잘 알 텐데도 태자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이미 상황이 끝난 것처럼 굴었다. 그리고.
“아아아아아악!”
진선전 안에서 혜비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