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서혜가 진선전에 도착했을 때 혜비는 아직 실랑이 중이었다. 평소라면 그녀의 위엄 있는 행차 한번에 금위병들이 모두 자리를 비켰을 것이나 이번에는 만만치가 않았다. 일단 황제는 전염병에 시달리고 있었고 무엇보다 이미 황궁의 권력이 태자에게로 넘어간 뒤였다. 혜비와 태자의 관계가 어떤지 궁인이라면 다 알고 있는 터, 아무도 태자에게 미움을 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게다가, 황제의 병이 사실은 전염병이 아니라는 소문은 알음알음 퍼져 있었으나 만약 전염병이면 어찌하란 말인가? 그 전염병이 혜비에게 옮기라도 하면? 황제나 혜비 같은 사람들은 전염병에 걸려도 홀로 아파하지 않는다. 실제로 현재 황제에게는 네 명의 내관이 붙어 있다. 그들은 황제와 같이 숙식하며 그의 시중을 든다. 전염병자의 시중을 들고 있으니 그들도 침소 밖으로 나올 수가 없다. 순장인 셈이다. 혜비가 전염병에 걸리면 궁녀 네 명의 순장이 또 결정되는 셈이 된다. 그러니 금위병들이 물러나지 않을 수밖에.
“태자비 전하.”
누군가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서 안도감이 절절히 흘러나와 혜비의 심기를 거슬렸다. 마치 이제 끝났다는 듯한 그 목소리는 혜비보다 태자비가 위에 있음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심서혜.
세상 제일 고귀하다는 다섯 꽃잎으로 태어났는데도 이상하게 잡초 같은.
밟아도 밟아도 죽지 않는 여인.
그녀의 연약함은 황궁에 일찍이 잘 알려져 있었다. 심씨 가문은 아이를 마구잡이로 다루었고, 그 탓에 아이는 건강하게 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여울 때도 있었다. 혜비는 태자비에게 괜히 맛있는 것을 먹이거나 몸에 좋다는 걸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마음이 가는 아이였다. 중립을 지키려 노력하고 이 황궁에서 좋은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어린것이 안쓰럽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괜한 짓을 했다. 운왕이 탐낼 때, 그 가엾은 것은 건드리지 말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왜 그랬을까?
저리 잘 먹고 잘 살 것을.
차라리 처음부터 짓밟았어야 했는데. 더 철저하게 밟아 살아남지 못하게 했어야 했는데. 그랬더라면 운왕은 지금쯤 멀쩡했을 것이다.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왕이 멀쩡했더라면 자신이 이렇게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았을까. 운왕이 살아 있을 때는 완왕도 진왕도 자신을 이리 대하지는 못했었다.
“혜비마마를 뵈나이다.”
태자비가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혜비를 불렀다. 그건 고함이 아니라 부름이었다. 그만하고 자신을 돌아보라는.
혜비는 입술을 깨물었다. 스스로가 삐뚤어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서혜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는가, 라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혜비 자신도 대답할 자신은 없었다. 살아남으려고 하는 걸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혜비는 도리어 태자비가 잘못했다기보다는 자신이 잘못한 것 같았다. 그 애에게 정을 주는 게 아니었다. 동정을 하는 게 아니었다. 운왕이, 아들이 옳았다. 더 짓밟아야 했다. 노예까지 떨어뜨려 아들의 여자로 줘 버렸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 자신이 이 꼴이 되지는 않았다.
“마마.”
태자비가 나긋한 목소리로 혜비를 불렀다. 그 목소리는 얼음을 녹이는 봄 햇살처럼 따뜻해서 혜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렸다. 등을 돌리자 태자비가 법도에 정확히 맞춘 절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만난 이후로 그녀는 계속 저렇게 무릎을 숙이고 있었을 것이다. 혜비가 바라볼 때까지.
혜비는 일어나라고 말하기 전 주변을 살폈다. 주변은 태자비가 절을 하고 있는 것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실질적으로 가장 고귀한 여인이 벌을 자처하고 있는 것에 마음이 불편한 기색들이 역력했다. 태자비는 제가 한 일로 다른 이에게 성을 내지 않으나 태자비를 제 몸보다 끔찍이 여기는 태자는 다르다. 태자비가 벌을 섰다는 걸 알면 그는 아주 크게 노여워하리라.
지나간 기회는 날아간 화살과 같다. 화살의 뒷모습을 보며 계속 후회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저 화살을 활시위에 건 때로 돌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라면 더 집중하고, 더 숨을 참고, 더 정확하게 쏠 텐데.
“태자비. 오랜만입니다.”
“예, 마마. 강녕하셨는지요?”
태자비는 아름답다. 천지신명께서 태자비에게 무슨 총애를 내리셨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완벽한 미모를 가지고 태어났다. 저 코가 조금만 더 높았더라면, 저 얼굴이 조금만 더 작았더라면, 저 눈이 조금만 더 컸다라면, 차라리 지금보다 덜 아름다웠을 것 같은, 한계에 찬 아름다움. 그녀는 목소리조차 새가 노래하는 것처럼 듣기 좋아서 혜비는 순간 찢어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언제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 대가가 고작 이것인가?
운왕이 욕심을 부릴 때 그 아이를 그래도 말리려고 노력하고, 지아비가 동궁에 들 때 다른 여인을 정실로 세우고 자신을 측실로 내리겠다고 했을 때도 순종하고, 모든 것이 그저 순리대로 흘러가기만을 기다린 끝에 이런 더러운 파국이라니. 차라리 불타는 것이었다면, 한순간에 재로 화하는 것이었다면 덜 억울하였을 것이다.
…강녕하였냐고?
이런 기만을 잘도 떠는구나.
“태자비가 보기엔 어떠신가요?”
혜비는 혀에 날을 세웠다.
“그대가 보기엔 내가 강녕해 보이시는가?”
지아비의 침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금위병 같은 것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내가 네 눈에는 강녕해 보이는가? 손톱, 발톱이 다 빠진 늙은이로 보이진 않더냐? 그렇게 안 보인다면 너는 정녕 나를 거짓으로 대하고 있구나.
혜비의 날카로운 말에 서혜가 고개를 들었다. 일어나라는 말은 없었으나 서혜는 허리를 폈다. 자신을 보라고 하기도 했고 어차피 그녀도 혜비를 많이 대우할 생각은 없었다. 어쨌거나 여기서는 혜비를 끌어내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건강해 보이십니다.”
서혜는 적당히 대답했다. 약간의 비아냥이 섞인 대답이었다. 서혜는 굳이 강녕해 보인다는 말 따위는 해 주지 않았다. 날을 세운 건 저쪽이 먼저이며 무슨 대답을 해도 트집을 잡힐 거라면 굳이 거짓을 고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트집을 잡으려고 시작한 것이니까.
“건강해는 보이지만 강녕하진 않다?”
“마마, 지금 뵈었는데 마마께옵서 어떠신지 신첩이 어찌 알겠사옵니까? 신첩의 궁으로 모시겠사옵니다. 차라도 한잔하시어요.”
일단 좋게 물러날 수 있는 틈을 만들어 봤다. 혜비가 이성적이라면 이 틈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혜비는 진선전에 들어갈 수 없다. 금위병들이 들여보내 주지도 않을 터이고, 혜비의 권위는 서혜의 권위에 비하면 바닥을 굴러다니는 낙엽과 같다. 그것은 이미 떨어졌고 바짝 말라 버렸다. 그에 비하면 서혜의 권위는 얼마나 찬란한가. 끝이 없는 미래가 서혜를 보장한다.
“좋은 말이나 본궁은 황상을 뵈어야겠네.”
혜비가 단도직입적으로 대꾸했다.
이렇게 나오면 네가 어찌할 것이냐, 라는 얼굴이었다. 실질적인 권위가 어떻든 간에 현재 황궁에서는 혜비가 서혜보다 웃어른이었다. 그것만이 혜비가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기도 했다. 혜비는 어떻게든 그걸 빌미로 이 난국을 헤쳐 나가려 했다.
그러나 서혜가 순종적인 태도로 물었다.
“태자 전하께 윤허를 받으셨는지요?”
“윤허!”
혜비가 고함을 질렀다. 너, 잘 걸렸다는 듯이.
“태자 전하께서 언제 즉위를 하셨지? 감히 어디다 대고 윤허라는 말을 쓰는가?! 방만하기 그지없구나, 태자비!”
분노에 가득 찬 혜비의 얼굴을 보며 서혜도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걸려들었다. 평소의 혜비라면 이 정도에 걸려들지 않을 텐데 확실히 지금의 혜비는 이성이 좀 마비된 상태인 것 같았다. 그럼 서혜로서는 좋았다. 상대하기가 훨씬 수월해지니까.
“황상께옵서 직접 정하신 대리로 황상의 옥새를 지니신 분이옵니다. 법적으로 윤허라고 하지요. 황상의 마지막 성지를 지금 마마께옵서 가부를 논하시는 것이옵니까?”
태자비의 눈이 총명하게 빛났다. 조금 전까지의 순순한 태도는 어디에도 없이 턱을 치켜든 태자비는 이제 드디어 해 보자는 얼굴이 되었다. 그녀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그녀는 어디나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사랑받아서, 권위를 한껏 머금어서, 모든 것을 다 가져서.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혜비는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자신은 사랑을 받았으나 권위로는 뒤처졌다.
황후는 권위를 가졌으나 총애는 받지 못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를 가지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데 어떻게 저 아이는 모든 걸 가질 수가 있는가. 천지신명은 왜 저 아이에게 모든 것을 주었는가. 저 아이는 왜 다섯 꽃잎이고, 아름답고,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권위 또한 가졌는가. 왜 그래야만 하는가.
“가부를 논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태자 전하 아니신가? 애초에.”
혜비는 되는 대로 지껄이게 되었다. 상관없었다. 이미 파국은 눈앞이었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은 비참하게 죽었고 다른 아들들은 어미의 곤경보다 태자의 눈 밖에 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그녀는 갈 곳도 없이 그저 파국을 기다릴 뿐이었다. 절벽 끝에 서 있는 것은 너무나 힘들어서 차라리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을 선택하고 싶었다. 끝이 오면 편안하기라도 하지 않을까.
“황상께옵서 전염병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야! 천인공노할 것들!”
혜비가 고함을 지르는 순간.
“정녕 그리 생각하십니까, 서모.”
태자가 나타났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태자는 어느 한 곳 흐트러짐이 없었다. 태자비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태자가 나타나자 모두가 절을 했다. 다들 마치 그가 황제라도 되는 것처럼 엄숙하게 절하는 꼴이 보기 싫어 혜비는 턱을 들고 절을 해야 하는 압박감을 버텨 냈다. 그래서 그녀는 보게 되었다. 태자비가 절을 하려는 순간 태자가 양손을 내밀어 태자비를 자연스럽게 일으키는 것을.
자신을 평생 총애했던 황제도, 저렇게까지 해 주지는 않았다. 자신은 언제나 절을 했고 그는 절하는 자신을 지나쳐 자리에 앉았었다. 감정이 더 새카맣게 상해 가고 있었다.
“수영이와 계실 줄 알았더니 진선전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태자는 혜비가 태자의 충심을 의심하는 발언을 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태자비를 바라보며 진선전에는 웬일이냐고 물었다. 지극히 걱정으로 가득 찬 질문이었다. 태자의 손길이 바람이 흩트려 놓은 태자비의 머리카락을 단정히 해 주고 있었다.
“혜비마마께옵서 행차하셨다고 하시어 궁으로 뫼실까 하여 왔나이다.”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마마께옵서 비를 보고 싶으셨다면 비의 궁으로 행차하셨을 것을요.”
“…….”
“귀한 발을 이리 쓰실 필요가.”
태자가 혀를 찼다. 마치 혜비 따위에게 네가 귀한 행차를 해 줄 필요는 없다, 라고 말하는 듯했다. 듣는 혜비는 고함을 치고 싶었는데 할 말이 없었다.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천인공노할 것들이라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저 인간의 껍데기를 쓴 짐승을 어찌 상대해야 하는가.
“여하튼, 혜비마마.”
태자는 태자비를 어루만지는 손길을 거두고 혜비를 돌아보았다. 의뭉스러운 미소를 활짝 머금은 얼굴이 물었다.
“진선전에 들어가시겠사옵니까?”
“…….”
“전염병이라는 것을 확인하시면 나오시지는 못하십니다. 당연하지요, 전염이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하니까요. 마마, 들어가시겠사옵니까? 목숨을 거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