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80)화 (80/100)

80.

목을 조여 온다.

혜비는 내탕금이 끊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 목을 어루만졌다. 올 것이 왔다. 그녀는 자신이 추국장으로 끌고 왔던 태자비를 떠올렸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 검댕을 묻힌 태자비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해한 얼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 그 얼굴이 자신에게 얼마나 잘했는지 모르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혜비는 아들의 뜻에 따랐다.

“마마, 완왕부에서 마차가 돌아왔나이다.”

완왕을 불러들였을 때 아들의 얼굴을 혜비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용상의 주인이 바뀌면 네 왕부에 기거하려 한다, 그렇게 말했을 때 아들의 눈에 순식간에 타오르던 반발심을 잊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러는지 그녀는 알 수 있었다. 평생 운왕에게 집중하던 그녀가 정작 힘을 잃고 자신에게 몸을 의탁하겠다고 하니 완왕은 싫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완왕이 그러시라고 고개를 끄덕인 건 자신의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 규모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혜비는 가능하면 많은 부분을 완왕에게 넘겨주려 했다. 그동안의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갚고 싶었다. 그리고 완왕이 그것들을 받고 어미의 마음을 좀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도 있었다. 운왕에게 집중한 것은 그 아이의 태생적 가엾음 때문이지 완왕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걸 그 아이가 꼭 알았으면 했다.

아마 무리인가 보다.

“그래….”

완왕의 완곡한 거절이 누구의 입김에서 비롯된 것인지 혜비는 궁금하지 않았다. 누구의 입김에서 비롯된 것이든 혹은 완왕 혼자 생각하신 것이든 그는 거절했다. 어미의 곤경을 알면서도 완왕은 손을 뗐다. 효심보다 원망이 앞선 것이리라.

그럴 만한가? 혜비는 생각해 보려 했다. 그러나 이해할 수는 없었다. 운왕에게 조금 더 신경이 가 있었다고는 해도 다른 아이들도 애정을 가지고 키웠다. 이 험난한 궁에서 그 아이들이 살아남은 건 혜비가 그만큼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는 뜻이었다. 왜 그런 점을 알아주지 않는 걸까. 이미 다 컸고 아이도 가진 만큼 제 어미가 얼마나 힘겨웠을지 알 만한 나이인데.

“마마….”

궁녀들이 조심스럽게 자신을 부르는 게 들려 혜비는 고개를 저었다. 부르지 마. 어찌할 것이냐든 괜찮은 것이냐든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어찌할지도 모르고 괜찮지도 않다. 어찌 괜찮을 수가 있겠는가. 아들에게 버려졌는데.

“진왕 전하께….”

“닥쳐라.”

상궁이 조심스럽게 한 말에 혜비는 바로 말을 끊어 버렸다. 완왕이 그나마 나았다. 진왕은 완왕보다 더 냉정하고 제 어미에게 한이 많은 아이였다. 그 아이가 자신의 곤경을 봐줄 리가 있겠는가.

“황상께 가야겠다.”

전염병이라 했다. 태의원을 조심스럽게 닦달해 보아도 태의들은 다 같은 말을 했다. 전염병이라고. 그리하여 가까이 갈 수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래서 혜비는 황제에게 갈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결정해야 했다. 황제가 정말 전염병에 걸린 것인지, 아니면 사악한 태자의 농간에 놀아나 고립된 것인지.

만약 후자라면 그녀가 어떻게든 도와 다시 황상을 일으키고 황권을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라면. 정말 전염병이라면.

혜비는 마시고 있던 차를 훌쩍 마셔 버렸다. 아직 채 식지 않은 차에 식도가 뜨겁게 데었지만 상관없었다.

전염병이라서 죽게 되면 차라리 낫지 않은가? 어차피 미래는 캄캄하여 이대로는 죽는 것이 나을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

방긋방긋 웃는 수영이는 서혜의 품에서 편안해했다. 서혜는 아이를 안고 부드럽게 얼렀다. 아이는 어를 필요가 없었다. 아이는 울지도 않았고 다소 불편한 자세여도 서혜의 품에서는 아무런 불만도 내비치지 않았다.

“황태손 아기씨께서는 정녕 효자시옵니다.”

궁녀들은 늘 그렇게 칭송했다. 서혜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 신경이 쓰였다. 아이는 왜 제 품에서 울지 않는 것일까. 마치 아이가 마음을 쓰는 듯해서 불편했다.

어미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니? 갓난애가 왜 신경을 쓸까? 무엇이 너를 본능적으로 신경 쓰게 했을까?

그것이 뭔지 알면 좋으련만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서혜는 가능한 한 수영이를 안은 채 많은 시간을 보내려 했다. 아이가 제 어미의 품을 어색해하나, 하는 염려가 든 까닭이었다. 여러 이유로 수영이는 서혜의 품에서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다. 황실의 아이라면 다 겪어야 할 절차이나 서혜는 유독 수영이가 가엾었다. 그것은 애정이 있기 때문이리라.

유독 너만 가엾고.

너만 신경 쓰이고.

네가 아프면 세상 그 누구보다 아픈 것처럼 느껴지는 건.

어미라서일까.

서혜는 수영이를 안은 채 잠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어릴 때의 그녀는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아이에게 그리 대하는 줄 알았고 그게 아니다 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여겼다. 자신은 다섯 꽃잎이었고 부모는 자신을 통해 이루고 싶은 것이 많으니 어쩔 수 없다고.

그러나 부모가 되어 보니 어불성설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서혜는 부모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리 귀여운데, 이리 사랑스러운데, 어찌 그리 참혹히 대했을까. 아이에게 식사를 제한하고 광에 가두고 때리고 모진 말을 해 대고, 어찌 그랬을까.

서혜는 어린 시절의 자신이 가엾다기보단 같은 부모로서 자신의 부모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게 되었다. 부정도 모정도 없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 그들이 멀쩡하게 존재한다면 그녀는 연을 끊고 싶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조금 성장한 것일까, 아니면 조금 이기적이 된 것일까.

서혜가 수영이를 안은 채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을 무렵 월아가 빠른 속도로 다가와 서혜의 앞에 무릎을 꿇더니 손을 내밀었다. 손을 청하는 것이다. 서혜가 한 손을 내밀자 월아가 빠른 속도로 글을 썼다.

혜비가 진선전에 듭니다.

진선전?

서혜의 눈이 커졌다. 진선전은 황제의 침전으로 현재는 모두에게 출입이 금지된 장소가 되었다. 황제는 전염병에 걸렸으니까.

물론 모두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황제 혼자 전염병에 걸렸다는 사실이다. 누가 그에게 전염병을 옮겼는가. 옮긴 사람은 없는데 걸린 사람은 있다니, 그것이 심지어 만인지상의 황제라니 정녕 의아한 일이다. 황궁 안팎으로 황제가 진정 전염병에 걸린 게 맞느냐는 의심이 퍼져 나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염병이라는데 침전에 들겠다고? 서혜는 수영이를 서 상궁에게 안겼다. 그 와중에도 조심스러운 손길이라 월아는 그 손길을 유심히 살폈다. 태자비는 황태손을 정녕 어여뻐했는데 그가 아들이든 딸이든, 아마 손가락 두세 개쯤 없었다 해도 예뻐했을 것처럼 보였다.

그저 자신의 자식이라 귀애하는 것이 느껴져 월아는 늘 그 모습이 신기했다. 단지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애정을 줄 수 있다니, 그건 마치 여염집 아낙 같은 모습이 아니한가.

존귀한 모습이 아니며,

드높지도 않다.

그러나 월아는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태자비는 황태손에게 직접 수유를 했고 기저귀도 손수 갈았다. 목욕도 시키는 등 돌봄에 있어 매우 적극적이라 늘 그 모습은 눈길을 끌고는 했다. 정작 태자는 그런 태자비의 모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적당히 하시게 하라.”

어느 아침, 태자비가 눈을 뜨지 못했을 때 태자가 조회에 나가며 혀를 찼다. 황태손은 태자비의 손안에서는 늘 방긋방긋 웃었지만 기실은 까다로운 아기씨라 남의 손을 탈 때면 자지러지게 울기 일쑤였다.

그 모습을 본 태자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황태손을 들어 올렸다. 황태손을 달래며 태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황태손은 이상하게도 태자비의 품 안을 가장 좋아하였으나 가장 편안해하는 건 태자의 품이었다. 어느 때라도 금세 울음을 그쳤다.

“이런 자그마한 아이 하나를 못 다루느냐.”

백전노장인 유모 상궁들이 여럿 붙었으나 학을 떼게 만든 존재였다. 그러나 태자는 한 손으로 쉽게 다루면서 그녀들을 나무랐다. 억울한 그녀들은 그저 입술만 한 번 깨물며 고개를 숙였을 뿐이다. 상대는 태자이니 뭐라 하겠는가.

“내 비께서는 연약하시니 아이를 돌보는 데 마땅치 않으시다. 적당히 잘하란 말이다.”

“송구하옵니다….”

“쓸모가 있어야지, 황궁에서는. 아니 그러냐?”

쓸모가 없으면 다 없애 버리겠다는 뜻처럼 들려 유모 상궁들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자는 까다로운 황태손을 쉽사리 달래고 꾸벅꾸벅 조는 작은 몸을 유모 상궁에게 건넨 뒤 정전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상궁들은 몇 번이나 가슴을 쓸어내렸었다.

“서 상궁, 수영이를 돌보고 있거라. 월아, 따라와라.”

태자비의 명이 떨어졌다. 서 상궁과 그녀에게 배당된 궁녀들이 무릎을 꿇는 동안 월아와 그녀에게 소속되어 있는 궁녀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태자비가 어디로 갈지는 뻔했다. 월아는 손가락 몇 개만으로도 궁녀들을 부려 왔다. 월아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모양을 본 궁녀가 재빨리 가마를 부르러 내려갔다.

태자비의 옆모습은 완벽하다. 저 완벽한 이목구비. 다섯 꽃잎이라서 가지고 있는 미모인지 아니면 저 미모 자체가 타고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섬세하고도 수려한 그 아름다움은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사람을 사로잡는다.

태자비의 붉은 입술이 굳게 다물어진 것은 그녀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으며 결단을 지으려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월아는 눈을 가만히 내리깔았다. 냉궁에서 만난 이후부터 태자비는 자신의 주인이었다. 태자비가 결정하면 그녀는 따를 뿐이다.

태자비가 갑자기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태자비의 머리 장식이 달랑거리며 영롱한 소리를 냈다. 그녀의 고개를 확 꺾이며 하늘을 바라보자 모든 궁녀와 내관이 같이 고개를 들었다.

“저 매.”

연통을 옮기는 것으로 추측되는 매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잡아라, 당장.”

태자비의 명에 곁에 있던 내관 하나가 재빨리 활을 들었다. 활을 잡은 내관이 빠르게 활을 쐈다. 한 발, 두 발, 세 발. 세 발째에 매가 끔찍한 소리를 내더니 하늘을 빙빙 돌다 어딘가로 떨어졌다.

“매를 가져와라.”

“어찌 그러시옵니까?”

궁녀 하나가 놀라 물었다. 태자비는 평소 이렇게 극단적인 일을 잘 저지르지 않기 때문에 의아하기 짝이 없었던 듯했다. 사실 월아도 많이 놀란 상태였다. 전서구 따위를 잡으라고 할 분은 아니었는데. 다른 이의 연통을 낚아채더라도 이런 식으로 난폭한 방식을 쓰실 분은 절대 아닌데, 라고 생각하는 월아의 앞에서 태자비가 말했다.

“감히 누가 동궁을 가로질러 매를 쓴단 말이냐? 저 매는 동궁에서 날았다.”

“태자 전하나….”

“전하께옵서는 지금 정전도 편전도 사용하시는데 어찌하여 동궁에서 매가 날아? 가져와라. 누가 감히 동궁에서 연통을 날렸는지 봐야겠느니.”

태자비가 그렇게 말하며 가마에 올랐다. 그녀의 눈이 아주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월아는 속으로 다시 한번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냉궁에서 만났던 태자비가 떠올랐다. 그녀는 아주 어린 소녀처럼 여리고 말갛기만 했었다. 그러나 지금 태자비는 권력의 정점에 선 여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나의 주인.

월아는 가마의 한쪽을 가만히 잡았다. 제대로 된 주인의 밑에 있게 되었으니 다시는 파국 따위 없으리라. 그것이 월아를 기쁘게 했다. 태후의 입 안에 약을 처넣던 것을 떠올리며 월아는 진심으로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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