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77)화 (77/100)

77.

쾅, 소리와 함께 백자 항아리가 넘어졌다.

백자가 와장창 깨지며 산산조각이 나고 그 안에 있던 물이 흘러내려 웅덩이를 만들었다. 백자에 꽂혀 있던 꽃들이 마구잡이로 흩어져 바닥에 쏟아졌다. 궁녀들이 모두 바닥에 엎드린 채 고개를 들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저, 저 삿된 것을 잡아 죽여야 하느니!”

태후가 노여워 고성을 질렀다. 나이답지 않게 버들가지처럼 늘씬한 뒷모습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고정하시라는 말 같은 건 사치였다. 고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으니까. 태후가 등을 돌렸다.

그녀가 등을 돌리는 순간, 그녀의 정면 쪽에 자리하게 된 궁녀들이 더욱 고개를 숙였다.

태후의 얼굴 반쪽이 먹물에 물든 것처럼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 태후의 주먹 쥔 손이 학질에 걸린 것처럼 떨렸다. 그녀는 분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으나 아무리 화를 내고 물건을 부숴도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도리어 더 노여움만 가중될 뿐이었다.

저, 백자.

태후는 증오의 눈으로 깨어진 백자를 노려보았다. 벌써 저 백자를 몇 번째 깨뜨리는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다음 날이 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거의 똑같이 생긴 백자에 꽃이 꽂혀 올라온다. 그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기색에 숨이 막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아무도 이 상황을 모른다는 게, 아니 지엄한 황궁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 그저 한탄스러울 뿐이다. 신하들은 왜 들고 일어서지 않는가. 이런 막돼먹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문제가 일어난 것은 몇 주 전이었다.

황제가 몸져누웠다고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태후는 눈살을 찌푸렸을 뿐이었다. 전염성이 있다는 말에 찾아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도리어 별궁으로 떠나야 하나 고려를 하던 도중, 어느 저녁 태자가 찾아왔다. 실질적으로 용상에 앉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태자는 평소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선하고 아름다운 미안을 가진 태자가 싱긋 웃더니 탕약을 하나 내밀었다.

“드시옵소서.”

단 한마디였다. 무슨 탕약인지 가타부타 설명도 없었다. 태후는 탕약을 확 뿌리쳤다.

“이게 무슨 무엄한 짓이냐?!”

태후는 그때 소리를 질렀다고 기억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떨고 있었다. 실제로 소리를 지르긴 질렀는데 그녀의 기억에서처럼 용감하게 지른 건 아니었고 덜덜 떨면서 질렀다. 태자는 그때 그녀를 내려다보며 서늘하게 웃고 있었다. 태자는 황궁을 완전히 집어삼킬 작정이었고 모든 건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자신 하나뿐이라는 걸 태후도 알고 있었다.

이연이 눈짓하자 따라 들어온 여인이 싱긋 웃어 보였다. 월아. 태후는 그녀를 알아보았다. 아무렴. 월아는 태후가 혀를 자르라고 명한 상궁이었다. 혀를 잘라야만 했다. 월아는 현비의 상궁이었다. 현비는 태후의 수족이었다. 현비는 태후의 앞잡이로서 황후와 대적하였고 그 끝에 결국 파멸하였다. 그러자 태후는 월아의 혀를 자르게 했다. 월아의 입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냉궁으로 보내 버렸다. 실질적인 유폐였다.

그년을 태자비가 데려올 줄이야 상상이나 했을까. 태자비는 잠시간 냉궁에 유폐되어 있다가 금의환향 아닌 금의환향을 했다. 태자를 구해 낸 것이다. 그러면서 태자비는 월아를 동궁으로 불러들였고 월아는 태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 버렸다.

월아는 태후의 많은 비밀을 아는 계집이었다. 그 계집을 잡아야 하는데 도저히 잡을 길이 없었다. 월아는 태자비의 심복 중의 심복이 되어 버렸고 태자비는 툭하면 동궁에 갇혔기 때문에 월아도 같이 그 안에 틀어박히기 일쑤였다. 접촉이 매우 어려운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월아는 독해졌다. 태자비를 주인으로 둔 월아는 그 앞에서는 입 안의 혀처럼 굴어도 뒤에서는 독종 중의 독종이 되어 후궁을 헤쳐 나갔다. 자신의 주인을 위해서라면 월아는 살인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이든 해내고야 말 독종이 되었다. 태후가 겨우 월아와 접촉을 좀 해 보려고 했을 무렵에는 태자비의 권세가 만만치 않았는 데다 월아가 독이 오를 대로 올라 말이 통할 상태가 아니었다. 게다가 월아에게는 원한까지 있으니 도무지 손을 써 볼 수가 없었다.

그 월아였다. 혀를 자르게 한 뒤에도 몇 번 대면할 일은 있었으나 태자비의 뒤에 시립해 있는 모습만 보았을 뿐이다. 그때 월아는 매우 충직한 궁녀의 가면을 쓰고 있었으나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드디어 만났다는 듯이 눈을 빛내고 있는 월아의 안광에서 한이 넘쳐흘렀다.

그리고 그 월아의 손에는 탕약이 든 그릇이 들려 있었다.

“월아.”

태자가 월아를 불렀다. 태후는 몸을 움찔 떨었다. 월아는 무척 기쁜 얼굴로 태자를 바라보았다. 하명하시라는 듯이.

“체통을 지키지 않으시겠다면 어찌할 도리가 없지. 필요한 약이니 드시게 하여라.”

태자가 명했을 때 태후는 뒷걸음질 쳤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뭔가가 부서졌다. 뒤를 돌아보니 백자였다. 꽃이 한아름 꽂혀 있던 백자가 떨어져 깨졌는데도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치, 치워!”

태후가 명하였으나 아무도 치우지 않았다. 일어나지 못했다. 태후의 궁녀들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가만히, 마치 인형처럼 있었다. 외면이었다. 태후는 다시 뒷걸음질 쳤다. 신발 아래에서 백자 조각이 밟혀 와작, 부서지는 느낌이 났다. 그것이 마치 자신의 심장을 부서뜨리는 것 같아 태후는 고개를 저었다.

“다 나가라.”

그러나 월아는 웃을 뿐이었다.

웃는 얼굴의 월아가 다가오자 그 뒤로 내관 네 명이 같이 한 발씩 걸어오기 시작했다. “하지 마.” 하고 태후가 비명을 질렀다. 체통도 위신도 다 소용없었다. 저 탕약이 뭔지 말해 주지 않는 태자도 웃으며 다가오는 월아도 모두 귀신 같았다. 순간 태후는 자신이 죽이고 해쳤던 수많은 사람들이 떠올렸다. 남녀를 불문하고 이 자리를 올라오면서 그녀는 많은 이들을 제거했다. 그것은 숙명이었다. 태후의 자리에 오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잘못한 건 아니었잖아.

그저 너희가 힘이 없어서 당한 거였잖아.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할 건 아니잖아!

그녀의 종아리 뒤가 어딘가에 닿았다. 그것이 의자라는 걸, 그녀는 조금 늦게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내관 네 명이 달려들어 그녀를 의자에 앉히며 사지를 구속했다. 그녀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솜씨 좋게 그녀의 입을 벌린 내관이 낮게 한마디를 뇌까렸다.

“송구스럽습니다, 마마.”

그러고는 그녀가 혀를 깨물지 못하도록 엄지를 넣어 혀를 눌렀다. 천천히 다가온 월아가 달빛을 받은 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입 안에 탕약을 흘려 넣었다. 그녀는 먹지 않으려고 발악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내관이 코를 막았다. 결국 숨을 쉬기 위해 꿀꺽, 탕약을 삼켜야 했다. 그럼 상처럼 코가 놓였다. 어쩔 수 없이 끝까지 탕약을 먹게 되었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녀는 약을 먹으면서 울었다. 이 약이 뭔지 몰라서, 이 치욕을 참을 수가 없어서, 미래가 너무 두려워서.

그리고 다음 날 뺨에 반점 하나가 크게 생기더니 온 얼굴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녀는 황제의 병을 생각했다. 그것이 정말로 병이었을까? 아니면 아들인 태자의 혹독한 수단으로 인한 함정에 걸린 것이었을까?

어째서 아무도 강산의 주인을 지키지 못하였는가.

이 제국이 도대체 어찌 되려고 이러는가.

어째서 돌봐 주시지 않으시는가. 선조들의 무심함에 눈물이 났다. 태후는 결국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울고 말았다.

***

“비전하께옵서 문안을 가셨사온데.”

이연은 동궁으로 돌아가는 길, 내시감으로부터 서혜의 문안 이야기를 간단히 보고 받았다. 그는 픽 웃고 말았다. 그는 다시는 아무도 서혜에게 험한 짓을 못 하게 하겠다고 마음먹었고, 그 일을 실행했다. 서혜의 위에 있는 황궁 어른 따윈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권력 의지를 가지고 행하려 했고 서혜를 좌지우지하고 싶어 할 뿐이다. 그럴 바엔 다들 병들거나 갇히거나 하는 것이 낫다.

모후는 갇혀서 죽을 날짜만 기다리고 있고.

부황은 약을 먹고 죽어 가고 있고.

태후는 아마 다시는 그 얼굴로는 궁 밖 출입을 못 할 것이다.

이연이 즉위를 한다면 태후는 태황태후가 된다. 전각 밖으로 출입도 못 하는 태황태후야 아무런 힘도 못 쓰는 존재이나 태후나 상황이 될 모후와 부황은 이야기가 다르다. 그들은 언제든 권력을 모을 수 있는 발판을 지니고 있다. 완전히 무너뜨려야 했다.

마음이 조금도 아프질 않아.

정말 죽어 버렸나 보다, 서혜야.

이연은 걸으며 생각했다. 부모를 죽였는데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다. 마음의 모든 곳이 거의 죽어 버려서 이제 살아 있는 곳은 서혜에 대한 곳뿐이다. 그것들만이 이연에게 삶이라는 걸 느끼게 해 주었다.

서혜는 종종 수영이를 보면서 먼 세계의 수영이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그럴 때 서혜는 우울하고 죄책감 가득한 눈을 하고 있었다. 이연은 그 수영이가 진짜 어떤 아이인지 알고 있었기에 아무런 감정도 느끼고 있지 않았으나 서혜에게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

그 먼 세계의 수영은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완전한 황궁의 태자였다.

서혜가 아는 수영은 이연이 뒤집어쓴 수영이일 뿐이다. 실제의 수영을 보면 서혜는 마음이 무척 아팠으리라.

이연은 말하지 않았다. 아는 척도 하지 않은 체 그저 서혜가 우울한 얼굴을 할 때면 그녀를 끌어당기기만 했다.

“전하.”

태자비전에서 만난 서혜는 오늘도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연은 다시 서혜를 끌어당겼다. 너의 죄책감은 덧없고 근본도 없음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은 서혜가 차라리 그 수영이 다정하고 아름다웠다고 생각하는 것이 낫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석반은 좀 이따 들도록 하지요.”

이연의 말에 서혜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작은 몸이 그의 품에 답삭 안겼다. 이연은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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