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76)화 (76/100)

76.

태자가 조회에 나타났다.

용상에 앉은 태자는 서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타나기 전보다 훨씬 야위었지만 안색은 좋은 상태였다. 그는 용상에 앉은 상태로 수많은 정사에 결단을 내렸다. 그의 결단은 평소와 같이 합리적이었으나 평소 그의 일 처리에 비해서는 조금 더 단호한 측면이 있었다. 대신들은 흘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눈으로 나누었으나 어떤 이야기들은 눈으로 나누는 데 한계가 있었다.

오랜만의 조회였는데 모두가 딴생각이었다. 모든 것이 유려하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아마 잘못 진행되는 건이 한두 건 있었다 하더라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였을 것이다. 평소라면 이연이 엄중하게 문책하였을 것이나 그도 지금은 다른 생각에 빠져 신하들이 하는 말을 간신히 듣고 판단하는 정도밖에는 머리를 쓸 수가 없었다.

서혜를 원하는 놈들이 너무 많다.

저놈의 가지는 얼마나 있는 것인가. 신궁에 따르면 인간이 선택을 할 때마다 세계수의 가지는 갈라진다. 그러면 수천, 수만의 ‘정이연’이 심서혜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심서혜를 잃은 정이연은 수천, 수만인데 살아남은 심서혜는 몇이나 될까. 그중 하나가 바로 지금 이연의 서혜이다. 서혜는 벌써 한 번 끌려갔었고 다시 안 그런다는 보장도 없었다.

세계를 단절해야 한다.

무슨 수로?

이연은 톡, 톡, 용상의 팔걸이를 두드렸다. 수단이라는 게 존재할까. 세계는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다. 그것들을 단절하려면 도대체 무엇을.

…애초에 그것들은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명을 내린다.”

이연의 낮은 목소리가 정전을 울렸다.

***

“신궁 폐쇄?”

소식은 삽시간에 온 황궁에 퍼져 나갔고 태자비전에도 들어갔다. 서혜는 수영이를 안은 채 어화둥둥 달래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전하. 신궁을 폐쇄하고 신녀들은 속세로 돌아가거나 혹은 입궁한다 하옵니다.”

“입궁이라니, 무엇으로 말이냐?”

“사당이나 혹은 흠천관 등에서 일하게 된다고….”

신궁을 왜 폐쇄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궁인들의 얼굴이 어두웠다. 천지신명이 이 나라를 버리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다. 서혜는 지아비의 결정이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것 같아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신목을 없애시려는 것이다.

신목을 통해 누군가가 자신을 불러들이기 전에 아예 그 통로를 막아 버리고자 하심이라. 온 세상 사람들이 겁먹고 걱정한다 하여도 그분은 그리하실 것이다. 그리고 서혜는 그 일에 진심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이제 더는 아무도 자신을 부를 수 없다.

사람은 경험을 통해 발전하고 변화한다. 사람은 달라진다. 작년의 나와 올해의 내가 다르듯이, 나라는 존재는 같은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다르다. 어떤 선택들은 나를 유기적으로 변화시키지만, 어떤 선택들은 나라는 존재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갑작스러운 재난에 사람이 바뀌고 벼락같은 행운에 사람이 바뀌듯이, 그렇게 사람은 바뀌어 버린다.

서혜는 바뀌었던 이연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연이 천천히 그리 변하였다면, 서혜도 그에 발맞추어 변하여 그를 연모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꺼번에 변한 이연은 서혜에게 어마어마한 반발심을 일으켰다. 내 지아비는 저렇지 않아. 서혜는 그 누구보다 크게 거부감을 느꼈다.

변하실지도 몰라.

그러나 서혜 자신 또한 변할 수도 있다.

첫 번째의 꿈에서 지아비는 변한 듯하였으나 결국 자신의 지아비였다. 크게 반발심이 들지 않았던 것은 그가 고유한 자신을 유지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 꿈과는 달리. 그러니 이연이 어느 쪽으로 변할지는 알 수 없다.

꿈으로 미래를 본다고 하여도, 결국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수영아.”

아명은 수영.

서혜는 이연이 어떻게 돌아왔을지 떠올렸다. 아마 그 호수에 빠졌으리라. 차가운 겨울 호수에 빠진 수영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명이 수영인데, 그 이름을 부모가 지켜 주지 못하였다.

“어미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아이가 어찌 자신의 아이라 할 수 있겠는가.

결국 그 아이는 그 세계의 심서혜가 낳은 아이다. 파생된 세계는 또 파생된 세계대로 계속 움직인다. 어쩔 수 없이 세계는 계속 갈라지고 갈라져, 결국 모든 세계는 같은 듯 따로 흘러간다. 그렇다 하더라도 마음이 아픈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그러나 서혜는 미안하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겠노라고 마음먹었다. 그런 비겁한 소리는 결코 하지 않겠다고.

“그러니 너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으려무나.”

성은 정.

아명은 수영.

이름은 연서.

자는 원영.

통칭 화안 태자라고 불리울 정도로 아름다운 이 태자, 현재는 황태손인 수영이 얼마나 제멋대로의 삶을 살게 될지 전혀 모르는 어머니의 바람이었다.

다음 날, 서혜는 황태손 수영을 안고 태후전으로 문안을 갔다. 태자비가 사경을 헤매고 있기도 했지만 태후가 추문이 두려워 출입을 거부하는 터라 그녀는 그리 원하던 황태손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서혜가 더운 날 아기를 안고 행차하자 궁녀들은 귀한 황태손이 더위라도 먹을까 애가 닳아 연신 부채질을 해 댔다.

“비전하, 아직은 백일도 아니 되셨사옵니다.”

지금이라도 가마를 돌리자며 궁녀들이 애걸복걸하였으나 서혜는 꿋꿋했다. 태후가 지금은 두문불출하고 있더라도 언제 다시 바깥출입을 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지금 할 일을 해 두지 않으면 그때 반드시 꼬투리를 잡히게 될 터이니 그런 일은 사전에 차단하는 게 좋다.

그리고 태후의 상태도 좀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서혜에게는 이제 유일한 어른이며, 그녀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태후의 정치적 손발이 다 잘렸다고는 해도 그녀는 이빨과 발톱이 빠졌을 뿐 아직도 덩치가 산만 한 호랑이임에는 분명하니까.

태후전에 도착하자 스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분명 빈틈없이 관리되고 있는 궁인데도 어딘가 싸늘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은 이미 이 궁이 황궁의 주요 세력에서 벗어났음을 알려 주는 지표 같은 것이다. 서혜는 가만히 눈살을 찌푸렸다. 알고 있었는데도 이런 노골적인 작태를 볼 때마다 불쾌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비, 비전하!”

도리어 태후전의 궁녀들이 서혜를 보자마자 뛰쳐나왔다. 당금 황궁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이며 강력한 힘을 가진 여인이기도 한 태자비의 당도에 다들 안색이 환했다. 황태손까지 데리고 문안을 오자 안도한 기색들이 역력했다. 주인이 열외가 되면 제일 불안한 건 아랫사람들이다.

“태후마마께옵서는 어디가 편찮으시기라도 하신 거냐?”

반가워하며 당장 자신의 당도를 고하려는 궁녀를 슬쩍 제지하며 서혜가 물었다. 아무리 열외가 되었다 하더라도 이 궁의 침잠된 분위기는 정도를 넘어섰다.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어 묻자 궁녀들이 서로 눈치만 보며 대답을 떠넘겼다.

“그것이, 그것이….”

그러자 서 상궁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 안전이라고 이따위인가?!”

그러자 깜짝 놀란 궁녀 하나가 사실대로 고해 왔다.

“요즘 마마께옵서 신경증에 힘들어하고 계시옵니다….”

신경증이라는 병은 물론 있겠지만 황궁에서 신경증에 힘들어하고 있다는 표현은 매우 완곡한 표현이다. 이 표현은 한마디로 짜증이 극에 달해 미쳐 날뛰고 있는 상태를 점잖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궁녀들은 태자비가 태후전을 찾은 것이 반가우면서도 태후와 만나는 게 정말 좋은 일인지는 판단을 내리기 어려워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짜증에 눈에 돌아간 태후가 태자비를 때리기라도 하면? 그러다가 태자비가 황태손을 놓치기라도 하면? 그때는 정말 일이 돌이킬 수 없어진다. 다 같이 목이 날아가는 형국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도 태후만은 무사할 것이니 아랫사람들은 그저 머리를 굴리고 또 굴릴 수밖에 없다.

“증손주를 보시면 마음이 좀 풀리실지도 모르지. 고하여라.”

서혜의 명에 궁녀가 눈을 질끈 감고 고했다. 고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동안 서혜는 수영이를 둥개둥개 얼렀다. 수영이는 이상하게도 서혜의 품에만 안기면 울지도 않고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아이였다. 유모상궁의 품에서는 울기도 잘 울고 떼도 잘 쓴다는데 수영이는 서혜에게는 일절 그런 떼를 부리지 않았다. 그저 생글거렸고 가끔 입을 달싹거릴 뿐이었다. 서혜는 수영이의 눈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증조할머니를 뵈러 온 거야, 수영아. 아주 아름답고 기품 있는….”

“당장 꺼지라고 해라! 다 필요 없느니!”

악을 쓰는 소리가 안에서부터 바깥까지 공기를 찢어 놓았다. 아름답고 기품…. 서혜는 자신이 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튀어나온 목소리에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평소에는 생글거리던 수영이 서혜를 아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새까만 눈이 반들거리는 것에 당황한 서혜가 가만히 속삭였다.

“원래는, 원래는 그러시단다.”

“마마, 그래도 황태손이….”

“꺼지라고 해! 필요 없어! 다 필요 없다고!”

안에서는 고함 소리와 함께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수영이의 눈길이 왠지 더 빤하게 쳐다보는 것만 같이 느껴져 서혜는 서둘러 태후전을 나왔다. 나중에 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최소한 애는 데리고 오지 않는 게 낫겠다. 애 교육에 별로 좋아 보이는 환경이 아닌 듯했다.

“수영아, 그냥 모후와 부황을 모시며 살자.”

다복하지 못하네.

서혜는 수영이를 안고 돌아오며 혀를 찼다. 황궁에서부터 다복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다복은 고사하고 박복인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곧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는데 어찌 국모로서 다복한 모습을 보여야 할까. 벌써부터 고민이 될 지경이었다. 물론, 심각한 고민은 아니었다. 여름 낮이니 국수를 먹을까, 하는 정도의 고민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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