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헉.
몸이 벌떡 일으켜졌다.
“마마께옵서 눈을 뜨셨다! 어서, 탕약을!”
눈앞에서 뭔가 휙휙 움직였다.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서혜는 하얀 손을 들어 누군가를 붙잡았다. 누군지도 몰랐고 확인할 수도 없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손을 뻗은 것에 불과했다. 누군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눈물이 차올랐다. 지아비는 자신을 찾으러 와 주었다. 그는 끝이 오기 전까지 자신임을 내색하지 않았었다. 어마마마, 그렇게 부르던 수영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계속 곁에 있었다. 위험하지 않게 지켜봐 주었다. 알고 있었는데. 오로지 한 사람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서혜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쳤다. 알고 있었는데, 왜 알아보지 못했어. 왜…!
“전하, 태자 전하께옵서는?”
서혜의 질문에 주변의 공기가 곤혹으로 물들었다. 서혜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녀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흔들려 섬세한 미모를 가리고 드러내길 반복하는 동안 모두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곤란한 질문을 받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얼굴들이라 서혜의 표정이 더 다급해졌다. 그녀는 서 상궁을 보자마자 그녀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태자 전하께옵서는?!”
“비전하….”
서 상궁이 곤란한 얼굴로 눈썹을 내렸다. 그 얼굴에 서혜는 몸을 일으켰다. 몸이 휘청,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다시 움직였다. 안 된다며 궁녀들이 막아서는 순간 서혜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앞을 막아선 궁녀를 밀쳐 냈다. 그래 봐야 궁녀는 그저 조금, 아주 조금 뒤로 물러났을 뿐이지만.
“비키거라!”
“비전하….”
“어디 계시느냐? 어디 계시느냐고!”
서혜가 소리 질렀다. 그녀의 목소리를 평소와는 달리 쉬고 갈라져 터져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핏줄이 섰다. 그녀는 울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었다. 울면 안 돼. 서혜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억지로 눌렀다. 울면 안 돼. 여기서 울면 안 돼. 아직 뵙지도 못했잖아. 아직 무사하신지 뵙지도 못했는데 울면 안 돼.
“침전에….”
광기 어린 태자비의 하문에 위협을 느낀 기가 약한 궁녀 하나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서 상궁이 그녀를 급히 노려보았으나 단속에는 실패했다. 서혜는 이미 그 말을 들었고 그녀는 휘청거리면서도 침소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궁녀들이 서둘러 그녀를 붙잡았다.
“의복이라도 정제하셔야지요!”
침의 차림으로 나가려는 태자비를 붙잡는 서 상궁의 얼굴이 참혹했다. 본래 자신의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태자비가 오랜만에 일어나 미친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정말 미친 것인가? 광증인가? 산고가 대단했었다고 들었다. 게다가 산실에는 계속 벼락이 떨어졌었다. 그 불을 끄고 또 끄면서 태자비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
기묘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가장 괴이한 것은 태자의 행보였다.
태자는 피의 숙청을 감행했다. 황제의 사지가 모두 굳어 그가 입도 제대로 벙긋하지 못하는 시점이었다. 그는 완전히 조정을 뒤바꿔 놓았다. 태후의 사람들은 모두 귀양을 가거나 사약을 받아야 했다. 태후는 홀로 무사했으나 그녀의 명예는 무사하지 못했다. 한 내관이 그녀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 나간 것이다. 그녀가 워낙 퍼 준 것이 많았기에 그 소문은 진위 여부와는 상관없이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본디 아랫것들이란 상전의 추문을 즐기는 법이다. 이야기는 순식간에 날개를 달았다.
태후는 그 이야기에 결코 대응하지 않았다. 모두가 수군거리는데도 마치 그걸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하루 이틀, 날이 지날수록 그녀는 고립되었고 결국 그녀는 자신의 궁에서 나오지 않게 되었다. 태후에게 감히 금족령을 내린 사람은 아무도 없으나 그녀 자신이 스스로에게 금족령을 내린 것처럼 되어 버렸다.
모두가 태자의 즉위를 점치고 있을 때 태자는 이상한 일을 시작했다. 그는 태자비를 깨우지 못하게 되자 신궁으로 달려갔다. 신궁에서 무엇을 어찌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이후 다시 돌아온 그는 툭하면 수면 향을 피우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는 태자비의 곁에서 잠들었다.
태자비를 끌어안고 그녀가 일어났는지 일어나지 않는지를 확인하며 다시 잠들기를 반복하는 동안 황궁 사람들은 속을 새까맣게 졸였다. 동궁은 실질적인 편전이 되었는데 태자가 조회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정사도 등한시한 채 태자비를 끌어안고 잠만 청하니 그 속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자의 사람들로 채워진 조정은 빈틈없이 돌아가고 있었으나 사람들은 모두 동궁만 흘끔거렸다.
태자비가 잠시 깨어나자 태자는 수면 향의 사용을 멈췄다. 그러나 그녀가 다시 혼수상태에 빠지자 수면 향을 피웠다.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으나 그는 계속 잠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수면 향을 꺼도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비전하….”
의복을 정제했다기보다는 대충 껴입은 태자비가 침전을 급히 빠져나갔다. 궁녀들이 입술을 깨물며 그 뒤를 따랐다. 저 모습은 안 되는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태자비는 태자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몸. 태자는 현재 황궁의 주인이 되었다. 이 제국의 주인이니 태자비를 막을 수 있는 자는 당금 황궁에 아무도 없었다.
태자비가 자꾸 휘청거렸다. 몸이 회복되었을 리가 없는데도 그녀는 술에 취한 이처럼 비틀거리면서도 계속 걸어나갔다. 걷지 못하면 기어서라도 가겠다는 의지가 그녀의 모습에서 활활 타올랐다. 내관들이 흔들거리는 그녀의 몸에 놀라 손을 뻗었다가 존귀한 여인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어 거두기를 수십 차례, 궁녀들이 몇 번이나 태자비를 부축하려 했으나 뿌리쳐졌다. 태자비는 조금이라도 빨리 걷고 싶어 했다. 자신을 느리게 걷게 하는 모든 걸 거부했다. 가마조차 거부했다.
태자의 침전에 당도하자마자 모두가 태자비에게 절했다. 그 절은 태자비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황후에게 드리는 무척 높은 격식의 것이었으나 서혜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지아비만을 찾아 헤맸다. 침상 위에 있는 이연을 보았을 때 그녀는 달려가려다 그대로 고꾸라졌다. 누군가가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서혜는 자신을 부축한 사람의 양팔을 붙잡고 물었다.
“왜, 왜 누워 계시느냐?”
그녀는 꿈속에서 자신이 수영을, 아니 수영의 몸을 한 이연을 두고 왔었던 것을 떠올렸다. 자신이 두고 왔다면 그는 곧 황제를 만났을 것이다. 어찌 되었을까? 등골이 오싹했다. 분명히 사달이 났을 터인데 설마 꿈속에서 해라도 당했으면, 그게 현실에 반영이 되었으면 어쩌지?
질문에 대답이 없어 서혜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서혜의 눈에 보인 사람은 다름이 아닌 월아였다. 그녀는 당연히 대답할 수 없다. 서혜는 다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대답해 줄 누군가를 찾아 헤맨 끝에 다시 서 상궁을 붙잡았다. 서 상궁이 얼굴이 일그러뜨렸다. 그녀는 이런 질문에 붙잡히는 게 정말 내키지가 않았다.
“서 상궁!”
“…수면 향을 사용하고 계시어 그렇사옵니다.”
왜 사용하냐고는 물어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르니까.
서 상궁이 태자비의 눈치를 보았다. 왜 수면 향을 사용하냐고 질책이라도 할까 봐 그녀는 겁먹은 상태였다. 그러나 사실 그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서혜는 그 이유를 서 상궁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때문이겠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꿈에 빠져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영이가 되어 자신을 지켜보고, 상황을 만들고, 자신을 빼내어 신궁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서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서 상궁을 놓고 비틀거리며 걸어 이연에게 다가갔다.
침대에 잠들어 있는 이연은 늘 봤던 것보다 힘이 없어 보였다. 그는 침의를 입고 있었는데 평소의 거추장스러운 옷들에 비해 얇은 침의가 더 그의 체격을 잘 드러내고 있었고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그의 머리카락은 수초처럼 어두웠다. 마치 시신처럼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이연을 본 서혜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코 밑에 대었다.
희미한 숨결이 느껴졌다. 살아 있었다. 그것이 서혜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서혜는 이연의 얼굴에 바짝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고 그의 안색을 살폈다.
새하얀 얼굴이다. 아무 이상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혜는 가만히 그 얼굴을 계속 들여다보았다. 분명, 이상이 없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어딘가가.
“태의.”
태자비의 한마디에 서 상궁이 흘끗 궁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궁녀가 황급히 침전을 빠져나갔다. 태자비는 계속 태자의 코에 자신의 코를 대고서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무엇을 확인하는지 알 수 없으나 분명 그녀는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태의가 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는 동안 태자비는 계속 태자의 뺨을 쓸어내렸다. 무엄하다면 무엄한 일이었으나 아무도 감히 그러지 말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태자의 태자비에 대한 총애를 모르는 궁인은 없었기 때문이다.
태자는 태자비를 구하기 위해 반역자가 되었고 결국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 태자가 황궁의 주인이라면 태자비는 태자의 주인이었다. 아무도 감히 태자비에게 침상에서 내려오라든가 법도를 지키라는 말 같은 건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존재 자체로 무치인, 황후보다 더 높은 무언가가 되어 버렸으니까.
“전하.”
태자비가 속삭였다.
“전하, 서혜이옵니다.”
태자비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서혜가 왔어요, 전하….”
그 목소리에 섞인 울음을 느끼며 궁인들은 모두 무릎을 꿇었다. 모르는 척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태의가 올 때까지 그들은 모두 그렇게 이마를 바닥에 대고 있을 참이었다. 황궁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 눈물을 흘리는 걸 보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모두가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눈을 돌리는 게 느껴졌다. 서혜는 이연의 양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이마를 맞대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세 치 혀로 무슨 말을 해야 그가 눈을 뜰까. 그런 말 따위는 세상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서혜는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그런 말을 찾아 헤맸다. 어딘가에는 그런 말이 있을 것만 같았다. 마치 열쇠 같은 말이 있어서,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이연이 눈을 뜰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말을 찾을 수가 없어서.
고작 그것마저 할 수 없어서.
서혜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흘러내리는 순간.
툭, 하는 눈물과 함께 이연이 눈을 떴다.
“왜, 우십니까?”
그 낮은 목소리에 이마를 바닥에 대고 있던 궁인들이 놀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태자가 일어났다. 사흘째 잠에서 깨지 못하던 태자가 눈을 뜨고 말을 했다. 태의들이 ‘그저 잠들어 계시는 것일 뿐이라 손쓸 도리가 없다’고 했던 태자가 갑자기 눈을 떴다. 그저 태자비의 부름에.
서혜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눈물이 더 후드득 떨어졌다. 이연은 그 모습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몸이 찌뿌드드한 것은 아마 며칠 동안 계속 누워 있었기 때문이리라.
“왜? 제가 일어나지 못하는 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이연은 서혜를 한 팔로 안아 품으로 끌어들이며 주변을 흘끗 노려보았다.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서혜가 펑펑 우는지 알 수가 없음이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너는 주인 모시는 거 하나를 제대로 못하느냐?
이연의 눈이 서 상궁을 잡아먹을 듯했고 졸지에 질책을 받은 서 상궁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납작 엎드려 자신의 무고함을 온몸으로 알렸다. 태자비가 울고 있는 것은 이 중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지금 노려보고 계시는 높은 분의 탓인데….
“쉬이, 괜찮습니다. 다, 괜찮을 겁니다.”
이연은 서혜를 달래면서 주변을 짜증스럽게 한 번 휙 노려보았고 모두가 벌벌 떨며 고개를 다시 바닥에 처박았다. 안심이 된 서혜가 어깨를 떨며 더 서럽게 울기 시작하자 궁인들은 이제 죽고 싶은 심정이 되기 시작했다.
마침 노을이 지고 있었다. 궁인 중 누군가가 지나가며 옆 사람에게 말했다. 오늘의 노을은 꼭 해가 뜨는 것만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