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74)화 (74/100)

74.

이연은 호수 속에서 멀어지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서혜가 아니었다. 서혜하고는 닮은 점이 조금도 없었다. 자신이 정이연이 아니듯이 그녀 또한 서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서혜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의 표정, 그녀의 습관, 불안할 때 시선을 움직이는 방식. 그 모든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알아챘다.

내 서혜구나.

의심은 필요 없었다. 지금도 얼어붙고 있는 호수에서 서혜의 표정만이 눈에 들어왔다. 모르는 여인의 얼굴인데도 그 얼굴 위로 서혜의 얼굴이 덧씌워졌다. 넘쳐흐르는 눈물. 자신이라는 걸 알아서, 어쩔 수 없이 미안해하는 그 얼굴. 이연은 그 얼굴 위로 손을 뻗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너는 뭐가 그리 미안할까.

그녀의 모든 고난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려고 해도 그게 맞았다. 다섯 꽃잎으로 태어나서 그녀가 이런 일을 겪는 거라고? 다른 다섯 꽃잎 둘은 이런 일을 겪지 않았다. 그녀들은 신성시되었고 존중받았다.

이연은 서혜가 혀를 깨물려고 마음먹었던 순간을 지켜보았다. 그는 그 순간 서혜의 어깨를 잡고 정신 차리라고 소리칠 뻔했다. 그따위 정조가 뭐라고 목숨을 끊는 짓을 하는가. 설사 여기가 꿈이라 할지라도, 꿈에서의 죽음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는데 그런 짓을 왜 하는가. 살아 있는 게 중요하다. 몇 남자의 것이 되든 그딴 것이 서혜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다. 그저, 그저 살아 있으면. 살아 있기만 하면.

쿠르릉, 신목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서혜의 몸을 신목이 얼음 아래에서 휘어잡는다. 그대로 서혜가 끌려갔다. 이연은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서혜가 잘 가고 있는 걸까?

이연이 신목의 존재와 이 방법론에 대해 인지하게 된 것은 처음 서혜를 불러들이고자 했을 때였다. 자신을 불구덩이에서 구한 서혜가 쓰러졌고, 그녀를 살리기 위해 백방을 알아보다 이 방법을 깨닫게 된 그는 직접 신궁에 가서 호수를 확인했었다.

수많은 고서를 뒤진 끝에 그는 이 방법을 확인했지만 사실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확인해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므로 걱정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 다섯 꽃잎과 부부의 연을 맺고 있는 자신을 신목에 노출시켜서, 부부의 연으로 끌려가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는 신궁의 호수에 몸을 던졌다. 수영을 하고 싶은 욕구를 참고 익사를 선택했다. 천천히 익사하는 와중에, 갑자기 무언가가 몸을 휘어잡았다. 어딘가로 끌려간다고 생각했고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자 누군가가 자신을 ‘태자 전하’라고 불렀다. 그때는 모든 게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전혀 눈에 익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 그는 면경을 먼저 찾았고 자신이 누군지 확인했다.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린애였으니까.

서혜가 누군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냉궁에서 선택된 단 한 명의 공녀. 성은도 받지 않았는데 비의 첩지를 받은 여인. 모든 황궁을 들썩이게 한 존재. 그녀가 누구일지 너무나 뻔했다.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황제의 생각은 쉽게 읽혔다.

이연은 어마마마를 뵌다는 명목하에 서혜를 확인하러 갔다. 무척 당황하고 있는 그녀는 아닌 척하려 애썼지만 겁에 질린 상태였다. 그리고 곧 그녀의 상태는 분노로 바뀌어 갔다. 그녀는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걸 모르는데도 마치 자신이 여기에 있는 걸 아는 것처럼 자신에게는 믿음을 주면서 황제를 미워했다. 그렇게까지 사람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서혜는 본 적이 없었다. 서혜의 적의는 새파랗게 타오르고 쉽사리 재가 되지도 않았다.

말발굽 소리가 완전히 가까워졌다. 태자부의 무사들이 검을 스르릉 빼는 소리가 들렸다. 이연은 피식 웃었다. 서혜는 공녀들의 목숨을,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안타까워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도 망설였다. 애꿎은 목숨들이 자신으로 인해 사라질 것에 대해 걱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죄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연은 그런 이가 아니었다. 그는 황궁에서 자랐고 황궁에서는 늘 강자와 현자만이 살아남는 법이었다. 이런 일을 겪지 않으려면 애초에 줄을 잘 서든 더 높이 올라가든 했어야 했다. 자신 또한 낮은 곳에 있었기에 부황이 내린 독을 몇 번이고 먹지 않았던가. 그것을 억울해할 거라면 귀향이나 했어야 한다.

완전히 가까워진 말의 선두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이연은 그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말을 탄 황제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분노로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 얼굴 속에 깊게 드리워진 공포를 이연은 쉽사리 알아보았다.

아아, 무섭겠지.

이연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서혜가 없는 삶은 무섭다. 그건 지옥이니까. 인간은 지옥에서 살 수 없다.

“짐의 비는?”

자신을 거역한 아들에게 왜 거역했냐든가, 무릎을 꿇으라든가, 그런 말 한마디 제대로 뱉지 못할 정도로 그는 다급했다. 그저 서혜만 찾고 있었다. 실제로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으리라. 이연은 그에게 희미한 연민을 느꼈다.

알지, 그 공포를.

알고 있지, 네가 그동안 겪었을 지옥을.

심서혜가 없다는 건 망망대해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았을 테지. 아무리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려 눈을 돌려 봐도 불가능하다는 것만 계속 알게 되는 현실 속에서 너는 미쳐 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 다, 알지. 그래서.

이연은 천천히 자신의 검을 꺼내 들었다. 스르릉하는 소리가 위협적이라기보다는 그저 익숙했다. 전장에서 적을 베기 위해 꺼내 들었던 것처럼, 그 소리는 그에게 무감각했다.

다 알아서 너를 용서할 수가 없다.

“꺼내라.”

이연의 말에 황제가 눈을 크게 떴다. 별 미친놈을 다 본다는 얼굴이었고 그의 뒤에 서 있던 이들이 일제히 검이며 활을 꺼내 들었다. 순식간에 수많은 이들이 이연을 무기로 겨누었으나 그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황제는 그와 검을 겨누게 될 게 분명했으니까.

“뭐라 했느냐?”

“검을 빼라고 했다.”

“…네놈이 제정신이 아니구나.”

“너야말로 서혜를 잃은 공포에 머리가 돌아가질 않는군.”

평소라면 이쯤에서 내가 누군지 알아챘을 법도 한데.

이연의 말에 황제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그리고 훌쩍 말에서 뛰어내렸다.

믿을 수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이 남자가 누군지. 아들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이 남자의 실체를. 거울을 보는 것처럼 선명한 표정. 서로 말이 필요 없다는 시선. 결코 한 하늘 아래 둘이 있을 수 없다는 단호함. 그래, 이 남자는.

“너로구나.”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서.

백방, 천방으로 알아봐서, 겨우 데려온 서혜인데.

그녀의 마음속에는 님이 있었다. 그녀는 둘이 같은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그녀가 오래도록 기다린 정인인데 그녀는 마치 자신을 강탈한 도적을 보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봤다. 그 눈에 황제는 여러 번 찢겼다. 마음이 찢기고 찢겨서 도륙이 났다.

그것이 어찌 서혜의 잘못이겠는가.

그것은, 모두 다.

이 작자의 존재가 잘못이다.

황제의 눈이 싸늘해졌다. 그는 검을 빼어 들기 전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짐의 서비는 어디에 있는가?”

이연은 이 남자가 정말 자신이라는 것을 이렇게 또 한 번 실감했다. 자신을 죽이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으로도 그는 서혜를 찾고 있다. 살의보다 그녀가 먼저. 그것은 정말 자기 자신이 할 법한 일이다.

이연은 싱긋 웃어 주었다. 곧 절망할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매우 즐거웠다.

정이연은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돌아갔다.”

이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남자는 서혜를 부르고 나서 저쪽에서 다시 데려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궁주를 죽여 버렸다는 사실을. 서혜를 이쪽으로 부를 수 있는 방법은 이제 없다. 신목이 서혜를 데려간 건 서혜가 원래 있을 자리로 데려다 놓기 위해서이다. 원래 있을 자리가 여기가 아닌 이상 신목으로 서혜를 끌어올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 너였어.”

황제가 이를 빠득 갈았다. 그는 절망을 분노로 대체하기로 한 것 같았다. 그의 눈이 타오르는 걸 보며 이연은 즐겁게 웃었다.

이 세계에 왔을 때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

저 작자를 죽이고 싶어서, 저 얼굴에 검을 그어 주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이라는 것도 싫었지만 가장 싫은 것은 그의 변절이다. 서혜는 그를 변절자라고 했다 한다. 이연은 그 말이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변절했다. 자기 자신이 저렇게 변했다고 생각하면 역겹기 그지없을 정도로.

“그래, 내가 바로 그녀의 사내지.”

“그럼 죽어야겠구나.”

황제가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쾅 소리와 함께 검이 맞부딪쳤다. 몸이 뒤로 밀리는 걸 느끼며 이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열두 살 정수영의 몸은 아직 다 자라지 못했고 훈련도 덜 받았다. 아무래도 힘에서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뿐이 아닐 것이다. 황제는 애초에 이연보다 더 살았고, 더 오래 검을 잡았으며, 그는 더 성장한 무인이다. 사실 이 싸움은 이미 승패가 정해져 있었다.

뭇사람들은 이연이 패한 적이 없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연은 숱하게 패해 왔다. 검의 스승들에게, 가끔은 적들에게. 그는 패하면서도 이겨 냈고, 패하면서도 생존하는 법을 배웠다. 결국 더 성장하고 더 버티고 살아남는 것이야말로 승리하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연은 지금 이기고자 함이 아니다. 그저 이 남자에게 검으로 타격을 주는 것이 목표일 뿐이다.

그러나 어려웠다. 황제의 검은 날카롭고 묵직했다. 몇 합을 주고받았으나 검은 계속 밀릴 뿐이다. 손목은 징, 울렸고 다리를 계속 꺾였다. 황제의 검은 변화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코 빈틈을 내어 주지 않았다. 이연은 패배를 예감했다. 자기 자신에게의 패배. 그건 아주 짜증 나고 불쾌한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너를 데려왔으니, 그것으로 만족해야겠지.

“돌아갈 생각이냐?”

황제의 눈이 번들거린다고 느꼈을 때, 이연의 목에 서늘한 것이 스쳤다. 검날은 차가웠다. 몇 번이나 불꽃이 튈 정도로 맞부딪쳤었는데도 정작 목에 닿은 검날은 싸늘했다. 그 싸늘함이 목 안쪽 어딘가까지 파고들었다.

죽음.

그것이 이토록 가깝고 갑작스러운 것이라는 걸 이연은 이전에는 알지 못했었다. 손에서 검이 툭 떨어졌다.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 걸 느끼며 그는 손으로 목을 눌렀다. 피로 손이 순식간에 젖었다. 비틀, 비틀. 그는 뒤로 물러났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등골이 오싹해졌다. 서혜가 저쪽 세계에 혼자 남는다? 그녀는 순식간에 모두에게 물어뜯길 것이다. 뼈 한 조각, 살 한 점 남지 않겠지. 모두가 아귀처럼 순결한 그녀를 먹어 버릴 것이다. 이번엔 냉궁이 아니라 추국장에서 고신을 받은 끝에 갈기갈기 찢겨 죽을 수도 있겠다.

안 돼.

그것만은 안 돼.

너는 나의 꽃인데.

언제까지나 내가….

“안 돼.”

그 목소리가 자신의 입에서 나온 건 줄 알았는데 조금 멀리 들렸다. 고개를 들자 황제가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돼. 그는 다시 한번 말했다. 절망적인 얼굴로. 왜? 그렇게 생각하고 이연은 자신의 얼굴에서 대답을 찾아냈다. 아아.

아아, 그렇구나.

이연은 몸을 뒤로 늘어뜨렸다.

“안 돼!”

황제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와 함께 풍덩, 몸이 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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