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73)화 (73/100)

73.

신방으로 꾸며진, 온통 붉은 제 처소에는 태자부의 무사들로 가득했습니다.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건 바로 알 수 있었어요. 제 궁녀들은 죄인처럼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모두 경련하고 있었어요.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라는 게 한눈에 보였습니다. 태자부의 무사들이 검을 빼어 든 채 궁녀들을 죽이려고 해서 저도 모르게 수영이를 잡았습니다. 그 애는 제 얼굴을 보자 곤란한 표정으로 혀를 찼어요.

“죽이지는 말고.”

수영이가 손을 조금 들고 말하자 태자부의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검집째로 혹은 수도로 궁녀들을 내리쳤어요.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궁녀들이 일제히 쓰러지는 모습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저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만 봤습니다. 그때 손목이 잡혔어요.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수영이가 저를 끌고 나가기 시작했어요. 저는 그 애에게 이끌려 붉은 방을 나갔습니다. 제 얼굴 위로 씌워져 있던 붉은 천이 팔랑거리며 공중을 날았어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습니다. 그 팔랑거리는 천이 불길했습니다.

저는 그대로 끌려 나와 궁 밖에 대기하고 있는 수많은 말들을 보고 눈을 크게 떴습니다. 그 말들은 그냥 보기에도 숫자가 너무 많았어요. 궁에서 이렇게 많은 말이 움직인다는 건 결코 좋은 뜻이 아닙니다. 반역. 그 한마디가 핏빛으로 뜨겁게 머리에서 타올랐습니다.

“태자 전하!”

제가 소리를 지르자 수영이가 저를 똑바로 올려다봤어요.

“돌아가실 겁니까, 아니면 여기서 혀나 깨무실 겁니까?”

알고 있었어.

말문을 잃고 아무 대답도 못 한 채 눈만 크게 뜨고 있는 저를 보며 수영이는 눈살을 찌푸렸어요. 아, 저는 저 표정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혀를 깨물면 된다.’라고 처음 생각했을 때 수영이는 저렇게 미간을 좁히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저는 착각을 한 게 아니었습니다. 이 애는 제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꿰뚫어 보았던 겁니다.

“돌아가다니요, 어디로 말입니까?”

수영이가 저를 말에 태우려고 들어서 저는 몸에 힘을 줘 멈춰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수영이가 다시 혀를 찼어요. 급하다는 듯이 그 애는 빠르게 대꾸했습니다.

“저는 태자로서 신궁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부황께옵서 궁주에게 무슨 짓을 시키신 건지 정도는 압니다. 당신은 돌아가고 싶은 거 아닙니까?”

제 눈은 마구 흔들리고 있었을 게 틀림없습니다. 저는 어미면서 어떻게 아들에게, 고작 열두 살 난 아들에게 구명 받을 생각을 할까요. 아니, 그럴 수는 없어요. 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말을 탄다고 해서 제가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제가 가야 하는 곳은 이 말로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차라리 나무에 목이라도 매는 게 더 빠를 텐데.

제 얼굴을 본 수영이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신궁에 나무가 있습니다. 신목이라고 불리는 그것은 삼라만상을 이어 주는 것입니다. 당신은 돌아갈 수 있습니다. 신목을 통해서라면요. 어차피 궁주도 신목을 통해 당신을 불러낸 겁니다.”

어차피, 라고 수영이가 말을 이었어요.

“꽃잎이든 불꽃이든 결국 근원은 같은 겁니다. 신목과 직접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거죠. 궁주가 할 수 있다면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궁주가 무슨 짓을 해서 저를 불러낸 건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수영이의 얼굴을 보건대 신목을 이용한 건 거의 확실해 보였습니다. 수영은 그걸 확신하고 있었어요. 저는 말에 타려다 말고 다시 망설였습니다. 만약에 실패하면? 아니, 차라리 실패하면 제가 여기에 있으니 나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성공하면 수영이는, 다른 공녀는 다 어떻게 되는 걸까요? 저기 기절해 있는 궁녀들은?

제 망설임을 본 듯 수영이의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결정이 안 된 겁니까?”

“…….”

“이쪽이든 저쪽이든 당신이 지키고 싶은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가장 소중한 건 누구입니까?”

그건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습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

저울의 무게는 공고합니다. 한쪽에는 한 사람뿐이고 건너편에는 수백의 사람이 올라가 있는데도 저울은 한 사람에게 기울어져 있습니다. 이 기울기는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맞아요. 뭘 망설이고 있는 건가요. 어차피 결론은 아주 오래전에 냈었으면서.

저는 말에 올라탔어요. 그러자 제 뒤로 수영이가 올라탔어요. 저보다 작은 몸인데도 그 애는 제 앞으로 팔을 뻗어 고삐를 잡는 걸 어렵지 않게 해냈습니다.

“간다.”

짧은 한마디와 함께 그 애가 말의 옆구리를 박찼습니다. 순식간에 말이 튀어 나가기 시작했어요. 저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뒤로한 채 바람을 맞으며 달려 나갔습니다.

***

잠시 말의 목을 축이는 동안 새가 공중을 빙빙 날았습니다. 새를 흘끗 본 태자부의 누군가가 휘익, 휘파람을 불어 새를 내려오게 했어요. 새의 발목에는 연통이 달려 있었습니다. 서신을 확인한 남자가 수영이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었어요.

“추적자가 붙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는데 수영이는 태연했어요.

“예상한 바다. 슬슬 가지. 신궁에 도착할 때까지 휴식은 없다.”

수영이는 그렇게 말하고 저에게 눈짓했어요. 말에 오르라는 시선에 저는 지체 없이 말에 올랐습니다. 이제 망설일 수 있는 때는 지났으니 그저 빠르게 움직이는 수밖에 없어요. 수영이가 훌쩍 말 위로 뛰어올랐어요. 제 몸을 감싸고 말을 바로 움직였습니다.

바람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어요. 위협적인 소리가 들렸습니다. 겨울바람이라는 건 어찌 이리 매서울까요. 제가 옆을 바라보자 수영이가 고삐를 쥐지 않은 손으로 제 피풍의를 더 깊게 씌워 주었습니다.

“춥습니다.”

저는 수영이에게 물어보고 싶었어요.

내가 누군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니?

아마 그랬겠죠. 그러니 처음부터 그렇게 정을 주었겠죠. 이제 이해가 됩니다. 서모라는 사람에게 갑작스럽게 정을 주는 이상함이, 사실은 제가 누군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제가 자신의 모친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태어나자마자 잃은 모친을 만나서 다시 돌려보내는 겁니다. 목숨을 걸고. 그건,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행하는 일일까요? 저는 도저히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이 아이는 모정이 그리웠을 터인데. 분명 그러했을 터인데. 황궁에 모정 따위는 없는 것이라 하여도 어미가 없는 것과 있는 건 천지 차이인 것을요. 심지어 태자라는 자리는 더욱 그렇습니다.

남아 달라고도 지켜 달라고도 하지 않는 제 아이가 너무 슬퍼서, 그리고 결국 떠나는 걸 선택하는 제가 너무 비정해서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은데, 만약 운다면 그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몇 시진을 달렸는지 모릅니다.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달렸어요.

“신궁입니다!”

누군가가 소리쳤어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그 고함에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어요. 어둠 속에서 나타난 새하얀 궁. 짙은 회색의 나무와 한데 뒤엉켜 있는 그 하얀 궁은 신성하다기 보다는 어딘가… 정복당하여 체념하고 있는 듯한 기색이 더 느껴졌습니다. 모든 것을 완전히 놓아 버린 듯한 인상이라 당황했어요. 이게, 신궁이라고? 이건 폐궁에 가까운 거 같은데.

수영이와 저를 태운 말을 위시한 수많은 말이 순식간에 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말들의 발소리에 놀란 신녀들이 뛰쳐나오는 게 보였어요. 그녀들은 예지력을 지녔다면서 정작 우리가 올 건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습니다.

“태, 태자 전하….”

신궁의 신녀들은 이 밤중에 무슨 일이냐는 듯한 얼굴이었어요. 그러나 그녀들은 일단 신궁의 법도에 따른 절을 했습니다. 상대는 태자니까요. 수영이는 본 체도 하지 않고 제 손을 잡았어요. 아직 어린 남자의 손이 저에게 용기를 주는 것처럼 꽉 붙잡았습니다.

“가시죠.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우리는 숲으로 들어갔어요. 그러자 신녀들이 “그쪽은 금림(금지된 숲)입니다!”라고 소리쳤어요. 수영이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어요. 수영이를 뒤따르는 무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들 빠르게 움직였어요. 혼례복을 입은 저는 헐떡거리며 따라가야 했지만 아무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저도 이를 악물고 걸음을 빨리했습니다. 시간이 없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요. 추적자들이 오고 있다는 이야기겠죠.

수영이가 여기까지 도와줬습니다. 여기서 붙잡히면 모든 게 무용지물이 되겠죠. 이 은혜를 수포로 돌릴 수는 없어요. 숨이 머리끝까지 차도, 다리가 나무처럼 뻣뻣해져도, 저는 계속 움직였어요. 숲은 걷기가 무척 힘들었어요. 더 이상은 못 걸을 거 같다고, 네 번쯤 생각했을 때. 아, 이젠 진짜 쓰러질 것 같다, 고 생각한 순간 풀 더미를 지나지자마자 보인 광경에 넋을 놓았습니다.

“이게….”

제가 눈을 깜빡거리자 수영이가 저를 똑바로 보며 소개했습니다.

“신목입니다. 이게, 바로 신궁의 숙주죠.”

숙주.

수영이의 그 말은 아주 차가웠어요. 하지만 저는 그 말이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거대한 호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호수 안으로 아주 거대한 나무뿌리가 들어가 있었어요. 신궁을 뒤덮은 나무의 근원은 호수 안에 있었습니다. 호수를 거의 메울 것처럼 거대한 나무였어요. 나무라기보다는 괴물처럼 보일 지경이었습니다.

“이쪽의 ‘가지’입니다.”

“…….”

“통로인 셈입니다.”

한겨울의 호수는 지엄할 정도로 차가워 보였습니다. 손끝이 닿는 것만으로도 심장까지 얼릴 것 같았어요. 그 차디찬, 냉엄한, 투명한 호수에 저는 저를 비춰 보았습니다. 어떻게 가야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했을 때 수영이가 물었습니다.

“익사할지도 모릅니다.”

역시 이 물에 빠지는 것이 정답이었나 봅니다.

“날이 춥습니다. 온몸이 얼어붙을 겁니다.”

수영이가 잡고 있던 제 손을 마지막으로 꽉 잡으며 물었습니다.

“그래도 가실 겁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이미 돌아갈 곳은 없는데도, 수영이는 원하면 머무르라고 합니다. 제 어미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일까요? 그 마음을 마지막으로 보여 주고 있는 걸까요? 참았던 욕심 한 조각을 삼키지 못하고 내보이는 것일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님이 있어서.

세상 만물과 바꿀 수 없는 님이 있어서.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미인 척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너무 비열하니까요.

“그러시군요.”

그때 갑자기 먼 곳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기는 금림인데도 말발굽 소리가 들렸어요. 금림을 말로 짓밟을 사람은 천지간에 오직 한 사람뿐이죠. 저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마자 등을 돌렸어요. 호수로 뛰었습니다. 붙잡히기 전에 가야 했어요.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릅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될지 사실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황상에게 안기고 싶진 않습니다. 내 님은 한 분뿐이니까요. 그가 수천수만으로 갈라져도 내 님은 한 분뿐이라는 걸 압니다.

제가 호수로 달려들려는 찰나 팔 하나가 제 허리를 낚아챘습니다. 설마 붙잡혔나 싶어 온몸이 움츠러드는 순간 누군가가 속삭였어요.

“호수에 들어가면 신목이 너를 인도할 테니 겁먹지 마. 그저 돌아가면 된다.”

그 목소리는 수영이의 것이었지만.

“아픈 건 잠시뿐이고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해. 그러니까 조심히, 응?”

그 웃음기 섞인 어조는 분명 제가 아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돌아보려는 찰나 허리를 안았던 손이 사라졌어요. 저는 허공에서 몸이 한 바퀴 돌면서 호수로 빠졌습니다. 그 느릿한 순간에 저는 수영이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물 때문일까. 아니면 눈물 때문일까. 전혀 다른 얼굴이, 누군가로 보여서.

아아, 그렇지.

나를 구할 사람은 오직 당신뿐인데. 나는 그걸 알고 있었는데. 알고 있었는데.

수영이가 아니었어.

당신은 처음부터, 나를 구하기 위해 온 거였어.

당신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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