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72)화 (72/100)

72.

수영이는 매일 문안을 오기 시작했습니다.

“늘 마음을 강건하게 드셔야 하옵니다.”

그리고 저에게 언제나 같은 말을 했어요. 제 손을 한 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손등을 도닥거리면서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주문을 외우듯 말했어요. 마음을 굳게 가져야 한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움찔거렸어요.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마치 아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황귀비 책봉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부가 반대를 크게 했어요.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예부는 정말 목을 걸고 반대했고 예부가 반대를 하자 상서성 등에서도 난처한 입장을 표명하며 황상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때쯤 황상이 오가는 게 뜸해졌습니다. 다행이었어요. 저는 그가 올 때마다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기에 황상께선 늘 분노하셨습니다. 그분은 늘 자신이 제 지아비와 같은 사람이라고 주장했어요. 하지만 저는 도저히 그 주장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서로 같은 말만 하니 당연히 우리는 창을 겨눈 적군처럼 팽팽히 맞설 뿐이었어요.

그러다 어느 밤.

황상이 든다는 내관의 목소리에 서둘러 침상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 밤중에 오는 건 별로 좋은 신호가 아니었어요. 창밖의 달의 위치를 보며 시간을 가늠해 보려 했습니다. 글쎄요. 축시쯤 되었을까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실까요.

“폐하!”

궁녀들이 놀라 소리치며 비틀거리는 황상의 몸을 서둘러 부축했습니다. 그는 귀찮은 듯 그녀들을 밀쳐 내고 있었으나 한 발 움직일 때마다 다시 비틀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다 못한 궁녀들은 다시 그를 부축하길 반복했어요.

“부축도, 하기 싫은 거냐?”

그가 물었어요. 저는 대답하지 않고 무릎을 꿇은 채 대기했습니다. 제 지아비는 저런 모습을 보이는 분이 아니셨어요. 애초에 술을 잘 드시지도 못해서 음주에 대해서는 경계가 심한 분이셨습니다. 술을 많이 마시면 사람은 해서는 안 되는 말이나 약조를 한다. 그분은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살얼음판 같은 황궁에서 그분은 늘 모든 걸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분이었습니다.

“심서혜!”

그가 고함을 지르자 궁녀들이 화들짝 놀라 황상을 바라봤습니다. 황상이 저를 심서혜로 대하는 걸 은연중에 알고는 있었지만 이토록 대놓고 심서혜, 라고 부른 건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저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어요. 부축하면서도 경멸을 숨기기가 어려웠습니다. 침상까지 부축해서 데려왔을 때 그가 갑자기 저를 침상으로 밀었어요. 부지불식간이라 저는 그대로 밀려 눕고 말았습니다. 제 위를 차지한 황상이 저를 내려다봤어요.

“변절자는 너야.”

그가 쉰 목소리로 저를 비난했어요.

“내 마음은 변한 적이 없는데. 너에 대한 지조 한 번 잃어 본 적이 없거늘.”

“…….”

“변심은 네가 했다.”

그의 손이 아프게 제 양어깨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 손에는 힘이 꽉 들어가 있었어요. 동시에 그 손은 형편없이 떨렸습니다. 바들바들 떨리는 그 손은 무서워하는 것 같기도 했고 저의 돌아선 마음에 상처 입은 것 같기도 했어요.

아, 그렇구나.

저는 이해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황상이 낯선 사람이었지만 그의 입장에서 저는 변심한 것입니다. 그는 한결같이 저에게 연심을 주었는데 돌아온 저는 그를 싫어하고 있으니 그것에 많이 상처받고 놀란 것입니다. 그럴 수 있지요. 그의 연심은 지속되고 있으니까요. 그 감정을 연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분명 연심입니다.

아아, 그렇구나.

황상에게 미안한 감정이 든 게 아니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같이 걸어야 했습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이든 이겨 낼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저는 저 과거에 있는 사람인데 황상은 이 미래에 있는 사람. 우리는 서로 걸어 온 길이 다르고, 따라서 사실 우리는 서로 같은 얼굴을 한 허깨비를 보는 겁니다. 걸어 온 길이 다르고 겪은 것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연정이었을 심서혜는.

죽었구나.

그 심서혜 또한 나와는 다른 여인.

그녀는 당신을….

“그런 눈으로 좀 보지 마!”

그가 고함을 질렀어요. 지긋지긋하고 미칠 것 같은 목소리로요. 저는 그의 뜻대로 눈을 내리깔며 생각했어요.

그녀는 당신을 이런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을 텐데.

그가 저를 위에서 끌어안았어요. 제 품에 얼굴을 묻고 제발, 하고 빌었어요. 목소리가 연약했습니다. 어느새 모두가 사라져 방에는 우리 둘뿐이었어요. 저는 누운 채 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달이 유독 창백해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제발, 서혜야.”

저 창백한 달은 우리가 우스울까요, 가여울까요.

“나를 다시 사랑해 봐. 제발.”

저는 이 남자가 가여운가요, 싫은 건가요.

“네가…. 네가 나한테 이럴 수는 없어. 네가 이럴 수는 없잖아. 세상이 다 잘못되어도 너만은….”

이 남자의 감정은 연정인가요, 미련인가요.

차라리 그냥 미워할 때가 나았습니다. 미움만으로 모든 걸 생각하고 죽어 버리겠다고 가볍게 여기던 때가 훨씬 편했습니다. 이 오만한 남자가 제 가슴팍을 다 적시도록 울고 술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는 이 새벽보다는.

마음이 돌덩이가 된 줄 알았는데 겉만 그랬나 봐요. 귀퉁이 어딘가가 부서져 마음이라는 게 조금씩 흘러나옵니다. 똑, 똑. 마음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동정인지 뭔지 모를 감정이 제 마음을 축축하게 만들었어요. 이러고 싶지 않은데, 정말 이러고 싶지 않은데.

저는 황상의 등에 팔을 둘렀습니다. 그리고 망설이다가 천천히 도닥거렸어요.

***

그런 일이 있은 후, 갑자기 황상은 살아났습니다.

제가 도닥거려서? 끌어안아서? 무엇이 그에게 생기를 되돌려 줬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는 다시 오만한 황제 폐하가 되었어요. 그는 예부를 몰아붙이고 상서성을 찍어 눌렀습니다. 결국 저의 책봉식 날짜가 정해졌습니다. 저는 완전히 후회했어요. 도닥거리는 거든 끌어안는 거든 뭐든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딴 짓은 하는 게 아니었어요.

책봉식 당일.

날씨라도 엄청 나빠서 하늘이 노여워하고 있다는 징조라도 보여 줬으면 했는데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습니다. 아랫사람들은 후궁의 주인이 생긴 걸 하늘도 기뻐하고 있다는 입방정을 떨었고요. 향유 냄새가 진동하는 꽃 목욕을 하며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입도 벙긋하기 싫었어요.

제 동서남북에서 궁녀들이 시끄럽게 움직입니다. 저의 책봉식을 위한 모든 준비를 위해서였죠. 화장이며 의복이며 모든 것은 이날 하루를 위해 만들어지고 구입된 것들입니다. 현실에서도 올라가 본 적이 없는 자리에 올라가는 기분이 매우 불편하고 싫었습니다. 제 표정이 너무 나쁘자 궁녀들이 발을 동동 굴렀어요. 그러면서도 차마 웃어 보라는 이야기는 못 하고 자기들끼리 눈치만 봤습니다.

제가 어쩔 수 없이 한 번 웃어 보이자 그녀들이 환하게 웃었습니다.

“마마, 이리 아름다운 걸요.”

다들 찬사를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한 명이 말했습니다.

“홍연 황후가 아무리 미인이었다고 해도 마마의 미모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옵니다.”

그러자마자 양옆의 궁녀들이 그녀의 옆구리를 깊게 찔렀습니다. 너는 뭐 그딴 소리를 해? 이런 얼굴들이었어요. 경사의 날에 말실수를 한 그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어요. 제 기분이 상해 경이라도 칠까 단단히 겁먹은 얼굴이라 의아해져 물었습니다.

“홍연 황후?”

“태, 태자 전하의 친모… 말이옵니다.”

“아아, 홍연 황후시던가.”

“예, 추존되시어.”

저는 산고 끝에 죽었기에 태자비로 죽었으나 황상은 자신이 즉위한 뒤 저를 황후로 올려 준 모양입니다. 그의 연모지정이 크다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그 심서혜는 죽었습니다. 그녀는 제가 아니에요. 그의 심서혜는 제가 아닙니다.

이제 알 거 같아요. 수만 번, 수억 번의 선택을 하면서 결국 우리는 어떤 길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누군가와 그 길을 함께 걷게 되겠지요. 수만 번, 수억 번, 나와 같은 길을 선택한 사람과요. 그 사람이 내 세계의 사람입니다.

다른 세계의 사람이 내 사람이 될 수는 없어요. 얼굴이 같다고 해서, 기억의 일부가 같다고 해서, 그래서 우리가 같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닙니다. 사람을 그 사람으로 규정짓는 건 기억이나 얼굴 외에도 선택이라는 문제가 있어요. 경험이라는 게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도저히 황상을 제 지아비로 인정할 수 없어요.

그러니 안길 수 없습니다.

책봉식 내내 사람이니 경험이니 선택이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든 책봉식은 진행되었어요. 그리고 밤이 되었습니다. 간신히 붉은 휘장 안에 홀로 남은 시간, 저는 혀를 깨물까 말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송곳니로 혀를 살짝살짝 깨물어 보았어요. 확 깨물 수 있을까. 혀가 완전히 잘릴 정도로? 월아의 혀는 혀를 자르는 단두가 있어 그것으로 잘랐다던데, 단두도 아닌 이로 혀를 자르려면 도대체 어떤 고통을 참으며 모질게 끊어야 할까요?

그래도 해야 합니다. 저는 도저히 안길 수 없어요. 저는 이제까지 지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여인들에 대해서 조금 오해하고 있었어요. 저는 그녀들이 죽기 싫지만 지아비에 대한 정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선나라에서는 열녀라며 무척 높이 사지만 저에게 그 일은 조금 목숨에 대한 경시처럼 생각되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분들 중에 누군가는 정말로 참을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몸을 내가 허락한 사람이 아닌 누군가가 건드리는 걸요. 저는 참을 수가 없어요. 같은 얼굴에 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이 건드리는 건데도 저는 도저히 그게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알게 된 아침이 온다는 걸 도저히 허락할 수가 없어요.

혀를 이 사이에 끼워 넣었습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어요. 그리고 힘을 주려는 찰나에.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습니다. 당황했어요. 휘장 너머로 보이는 그림자는 딱 보기에도 황상처럼 보이지는 않았거든요. 그보다는 도리어….

K22

“어마마마.”

수영이가 왔습니다.

“가시죠. 모시겠습니다.”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울면 안 되는데, 눈물이 넘쳐서 삼킬 수가 없었어요. 수영이가 저를 구하러 왔습니다. 제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수영이가, 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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