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71)화 (71/100)

71.

눈을 떠서 황상을 보았을 때, 저는 그냥 눈을 질끈 감아 버렸습니다. 보고 싶지도 않았어요. 다시 현실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잠을 자서 그럴 수 있다면, 열이 나서 그럴 수 있다면, 죽을 만큼 아파서라도 그럴 수만 있다면!

“서비? 눈을 떠 봐라. 여봐라, 태의를 어서!”

황상의 고함에 내관들이 달려 나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 저는 수영이를 안아 보지도 못했어요. 황궁의 법도에 의해 태아는 삼칠일, 즉 21일간은 신녀들의 품에 머물며 신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아직 수영이를 보지도 못했는데 여기로 끌려왔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누군가가 억센 손으로 저를 안아 일으켰습니다. 눈을 뜨라고 종용했어요. 그 손이 누구의 것인지 압니다. 억지로 흔들려 눈을 떴더니 상궁이 활짝 웃으며 저에게 백자 그릇을 내밀었어요.

“마마, 여기 탕약이….”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습니다. 저는 그 탕약을 뿌리쳤어요. 사기그릇이 허공을 날았습니다. 갈색 탕약이 흩뿌려졌어요. 사기그릇이 벽에 부딪혀 와장창 깨졌습니다.

황상의 손이 아프게 제 턱을 붙잡았지만 그 아픔이 남의 것처럼 느껴졌어요. 저는 화가 났고 그 화를 숨길 생각이 손톱만치도 없었습니다. 제가 왜 화를 숨겨야 하죠? 저는 이 꿈에서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죽든 살든, 어차피 이 몸뚱이는 제 것도 아닙니다. 차라리 이 꿈속에서 죽어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다시는 이 꿈을 꾸지 않게 될 터이니.

제 눈을 마주한 황상께옵서 노여운 얼굴을 누그러뜨리셨어요.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심상치 않다고 여기신 듯했습니다.

“서비,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

“주야장천 당신의 곁에 붙어 있었습니다. 조회도 모두 미뤘어요. 그런데 눈을 뜨자마자 이토록 화를 내면….”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제 지아비는 저에게 어떤 생색도 내지 않으시는 분이셨어요. 그분은 자신이 한 모든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하셨습니다. 전장에서 달려와 반역자가 되셨을 때조차 그것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셨죠. 그분은 도리어 왜 연통을 넣지 않았냐고 물으셨어요. 그것만이 가슴 아프신 것처럼 보였었습니다. 그런 분이 이렇게 되었다고요?

제가 웃자 저를 달래고 계시던 황상의 얼굴이 노여움으로 굳어졌습니다. 무섭지 않았어요. 마음이 돌처럼 굳어져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아요. 냉궁으로 가도 좋고 추국장으로 끌려가도 좋습니다. 그 끝에 뭐가 있든 이 남자에게 안겨 황귀비가 되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폐하, 한통속이고 동일인이라 하셨사옵니까?”

저는 한껏 비웃었습니다.

“그렇다면 폐하께옵서는 변절자시군요.”

쾅!

황상께옵서 주먹으로 제 침대 기둥을 후려갈기셨어요. 그러자 모두가 일제히 바닥에 엎드려 벌벌 떨었습니다. 황상의 노여움이 하늘의 벼락처럼 느껴지던 때가 저에게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 감정도 안 듭니다. 저는 그저 분할 뿐입니다. 이 변질자에게서 제가 연모하는 님의 모습을 뜯어낼 수 없다는 것이 아주 분합니다.

“짐은 이 제국의 주인이다.”

황상이 으르렁거리셨어요.

“또한 이 공녀의 주인이시지요.”

이 공녀의 주인이나 나의 주인은 아니라고 저는 못 박았습니다. 내 주군도 지아비도 아닙니다. 나에게서 네가 가져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노라고. 황상의 눈에 생채기가 보였습니다. 저에게 받은 상처로 인한 고통이죠. 그러나 그 고통은 저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습니다.

제 지아비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곳으로 끌려왔노라고. 이 남자는 저를 여기로 끌어다 놓고 매개체인 궁주를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돌아갈 수도 없게 된 것이 분명했습니다. 어쩌다 정신을 잃어야만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저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해야 합니까. 차라리 고신 끝에 정신을 잃는 게 반가운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자신이 겁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태자 전하께서 계시다는 걸 알면서도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망설이던 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겁도 나지 않아요. 그냥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것 같습니다. 원하는 건 그저, 그저….

눈물이 뚝 떨어졌어요.

“서비?”

잘 울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눈물이 많아졌습니다. 화도 많아졌고요. 불나방처럼 겁이 없어졌어요. 법도니 예법이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들을 열심히 지켜 온 저에게 무슨 상이 있었습니까?

황상은 저를 끌어안았어요. 손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제가 몸을 비틀자 그는 저를 힘주어 못 나가게 막았습니다. 힘이 없어서 그냥 늘어졌어요. 어차피 빠져나가지 못하리라는 걸 압니다. 그것이 분하고 비참합니다. 저는 왜 무력한가요. 제 지아비라면 여기서 어떻게 하셨을까요? 아프고 혼란스러운 머리로 생각해 봐도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아요.

그때 내관 하나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으로 말했습니다.

“폐, 폐하. 태, 태자가 들었사온데….”

황상은 당장 사라지라고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문득 끌어안은 저를 조심스럽게 놓고 제 얼굴을 살폈어요. 저는 제 속내를 감추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수영이가 보고 싶었어요. 그 아이가 큰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고 손이 다친 것도 나았는지 궁금했습니다. 저를 걱정해서 찾아온 것이겠지요? 제가 언제 일어날 줄 알고 저를 찾아왔을까요?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건 아닐 테고, 설마 제가 쓰러진 이후 매일 찾아왔을까요? 고작 서모에게, 그것도 공녀 출신의, 낯선 이국 사람에게, 그렇게 금세 정을 주려면 이 아이는 정에 얼마나 굶주린 것일까요? 애가 닳습니다.

제 눈이 흔들렸다는 걸 스스로도 알 수 있었습니다.

“들어오라고 하라.”

황명이 떨어지자 저도 모르게 입구 쪽을 바라봤던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었어요. 너무 보고 싶었으니까요. 그러자 황상이 제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습니다.

“짐의 씨다.”

그 목소리는 마치 저에게 절망을 주려는 듯.

“짐의 씨를 받아 네가 낳은 것이다.”

아주 낮고 차가웠습니다. 약간 비웃는 듯도 했어요. 저는 나무를 상상했습니다. 나무가 가지를 뻗어 갑니다. 훌륭한 가지들이 계속 성장하고 가지를 치고 또 작은 가지들이 생겨나죠. 그리고 그 가지 중에는 가지치기를 해야 할 가지들도 있습니다. 나무의 기둥에 가까운 가지들은 가지치기를 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 끝에 있는 가지들은 가지치기를 당하기 마련입니다. 쓸모없이, 자라서는 안 되는 방향으로 자라는 그런 가지들.

“부황을 뵈옵니다.”

그 가지에 붙어 있기에 저 아이는 너무나 고결한 혼이 아닌가 싶어서 마음이 아픕니다. 다 같은 사람이라고, 그저 선택에 따라 인생이 변화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인생이 변하면 사람도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디서부터 변하였는지는 몰라도 이미 변한 건 돌이킬 수 없어요. 차로 우린 물을 다시 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처럼요.

“태자가 여기는 웬일이냐?”

“서모의 문안을….”

“효자로다.”

비아냥거리는 게 역력한 어조였습니다.

제 눈이 황상을 향하는데 그의 눈도 저를 향하고 있었어요. 저는 그 눈을 보고 순간적으로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는 저를 확인하고 있었어요. 제가 어떤 얼굴을 하는지, 제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수영이게 빈정거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그건….

등골이 싸늘해졌어요.

공녀들을 다 죽이겠다고 말할 때처럼 그는 또 희생양을 찾아 번들거리는 눈을 희번덕하게 뜨고 있어요. 무언가를 인질로 삼을 생각이겠지요. 머리가 복잡하게 움직였습니다. 수영이에게 정을 줘서는 안 돼요. 그 애가 이용당하게 둬서는 안 됩니다.

너는 어미잖아.

저는 저를 꾸짖었어요. 어미잖아. 아직 삼칠일도 안 된 아기라지만, 그 아이를 지켜 줘야 하잖아. 너는 어미니까.

아이를 지키는 어미를 본 건 딱 한 번. 꿈에서였죠. 사실 그녀도 아이를 완전히 지키진 않았지만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간주하던 시점까지는 그녀는 참으로 충실한 어머니였습니다.

네, 첫 꿈에서 만났던 유음 황녀의 어머니 말입니다. 저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어요. 황후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그토록 부화뇌동하고 희로애락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걸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는데 지금 보니 그녀는 정말 훌륭한 어머니였습니다.

그녀는 황궁에서, 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아무리 그때 유음 황녀의 자리가 특수했다고는 하나 딸을 위해 그렇게까지 할 어미가 세상에 별로 없다는 걸 저는 잘 압니다. 사실 아들을 위해서도 그 정도로 하진 않아요. 태자 전하의 모친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다들 자식마저 자신을 위한 도구로만 삼을 뿐이에요.

그러나 저는 진정한 모친을 본 적이 있으니 참으로 행운입니다. 저는 입 안에서 혀를 깨물었어요. 말을 조심해야지, 행동도 주의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다 문득 깨닫고 말았습니다.

혀.

저에게는 자진할 도구가 하나 있었어요. 혀를 깨물면 사람은 죽으니까요.

이로 혀를 가만가만 깨물어 봅니다. 혀는 말랑말랑했어요. 세게 깨물면 아프겠지만 그래도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 제가 미쳐 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에 못 돌아가면 어쩔 셈일까요. 벙어리로 산다는 건 아주 고된 일입니다. 비통한 삶이에요. 월아를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러나 돌아가지 못하는 삶은 비통한 삶이 아닙니다. 그건 삶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자는 시간에, 자는 척하고 혀를 깨물면….

그러면 수영이도 휘말리지 않게 하고 차라리 이걸 끝낼 수 있어. 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였어요. 황상과 눈이 마주칠 줄 알았는데 태자, 수영이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수영이는 제 얼굴을 보자마자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어요.

제가 의아해져 눈을 크게 뜨자 그의 미간은 고운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찌푸린 적이 없는 것처럼요. 하지만 저는 분명 그가 미간을 찌푸리는 걸 봤어요. 눈을 깜빡이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수영이가 황상에게 고개를 돌렸어요.

“부황. 예부에서 뵙기를 청하옵니다.”

적절한 이야기였는지 황상이 얼굴을 구겼습니다.

“예부 것들은 간이 배 밖에 나왔구나.”

“…….”

“비를 누구로 어떻게 봉하든 짐의 소관이거늘.”

“역사에 남을 일이니만큼 절차상의 문제가 없도록 부황을 보필하는 것이 그들의 소임이오니 부디 부황께옵서는 고정하시옵소서.”

제 이야기인 것 같네요.

고개를 들자 황상은 저를 보고 있지 않았어요. 태자에게 눈살을 찌푸린 채 그는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비를 누구로 하든 자신의 소관이다. 예부 것들이 알 바 아니다. 자신은 황제이고 이 강산의 주인이니 사관들은 그저 있는 대로 받아쓰면 그만이다. 등등, 그는 제가 아는 지아비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제가 아는 시아버지의 모습에 더 가까운 말만 골라서 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한심하고 속상하고 혹여나 제 지아비가 세월이 흘러 이렇게 변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도 되었다가 유음 황녀의 아버지였던 그분을 또 떠올리면 그렇지는 않을 거 같기도 해서,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왼쪽 길도 오른쪽 길도 있는 것이라면 제 지아비께서는 결국 어느 쪽으로 흘러가시게 될까요. 그건 흘러가는 걸까요, 자신이 선택하여 걸어가는 걸까요? 그렇게 생각하는데 수영이와 눈이 마주쳤어요. 수영이가 황상 몰래 싱긋 웃었습니다.

괜찮아요, 라고 말하는 듯한 그 미소가.

제 지아비를 너무 닮아서.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습니다.

여기가 지옥인 줄 알았는데, 지옥에도 꽃 한 송이는 피는지.

냉궁에도 꽃이 있었듯이 여기에도 꽃이 있어서.

제 마음이 조금 덜 외롭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