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70)화 (70/100)

70.

열이 계속 났어요.

정신을 차리는 게 어려워졌습니다. 눈앞이 가물가물했어요. 세상이 모두 흐릿하게 보이다가 결국 까무룩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황상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희미하지만 분명 그는 황상이었고 저를 끌어안고 있었어요.

싫어야 하는데, 거절해야 하는데, 싫지 않은 건 제가 많이 아파서인 것 같습니다. 아마 그래서 마음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서….

“비? 정신이 드십니까?”

목소리도 얼굴도 열이 오른 눈으로 보면 꼭 내 님 같아서.

“내려간다. 태의, 따라와라.”

황상께옵서 저를 안아 올리셨어요. 흔들림에 머리가 심하게 아파 읏, 하고 신음하자 그분은 마치 그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여러 번 사과하셨어요.

“죄송합니다. 조금만, 조금만 참으세요. 이 산실에서 나가면 곧….”

산실?

…산실!

저는 눈을 번쩍 떴습니다. 사실 잘 떠지지 않았어요. 머리가 무척 아팠습니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고 몸이 추웠어요. 오한이 나서 계속 몸이 덜덜 떨렸습니다. 분명 몸이 잘못되었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상관없었어요. 여기가 산실이라면 저는 분명히, 돌아온 거니까요.

“전하?”

제 지아비는 제가 부르는 목소리에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내주었습니다. 저는 양손을 힘겹게 들어 그분의 얼굴을 확인했어요. 황상이었던 그분보다 젊고 연륜이 아직 덜 새겨져 있는 얼굴. 이 얼굴은 분명 저의 지아비인 태자 전하였습니다. 여기는 꿈속이 아니라 현실이에요. 저는 현실로 돌아온 것입니다.

“정신이 드셨을 때 산실을 나서야 합니다.”

태자 전하께옵서 다급히 말씀하시며 산실을 나서셨어요. 산실을 나서는 순간 어두컴컴한 밖이 보였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한 치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어요. 우산을 쓴다 하여도 젖을 것이 분명한지라 내관들이 태자 전하께 우의를 건넸습니다. 전하께옵서 저를 안은 채 요령껏 우의를 입으시더니 저를 큰 우의로 여러 번 돌돌 싸매셨어요.

분위기가 심상찮았습니다. 분명히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모두가 너무나 비장했습니다.

“전하,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우르릉, 하늘이 울었습니다. 그건 마치 짐승이 으르렁거리며 경고를 하는 것처럼 사나웠어요.

“궁주가 그러더군요. 당신의 혼이 어딘가로 끌려갔노라고.”

“…….”

“우리 쪽에서 부를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저쪽에서 매개체인 궁주가 없어졌기 때문에.”

저쪽에 매개체인 궁주가 없어졌다?

그러고 보니 황귀비 책봉인데 궁주의 점괘를 보지도 않았습니다. 황귀비는 후궁이라기보다는 황후에 가까운 자리입니다. 아주 고귀한 자리죠. 선나라 역대에서도 황귀비 자리에 오른 후궁은 한 손에 꼽힐 정도이고 대부분 그 자리는 채워지지도 않습니다. 그런 자리에, 심지어 황후가 없는 상황에서 황귀비로 오르는 이 막중한 상황에서 궁주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고단하여 생각지 못했는데 궁주가 아예 없는 것이었을까요?

“당신이 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기서 기다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쪽에서 부르지 않는 한, 혼이 돌아오는 경우 제자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 육신이 없는 경우 영원히 육신을 잃어버리게 되니 당신을 옮길 수가 없었어요.”

비처럼 태자 전하의 말도 빠르게 쏟아졌습니다. 저는 반은 알아듣고 반은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머리도 아프고 몸도 아파서 사실 말이 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하나는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황자는? 황자는요, 전하?”

배가 회임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어요. 제 몸속에 태아가 없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어디에 갔지? 제가 묻자 태자 전하가 제 머리 위로 우의를 깊게 씌우셨습니다.

“아이는 무사합니다.”

제가 정신을 잃었는데 아이가 어떻게 무사하죠? 제 몸속에 아이가 없는데?

태자 전하는 비를 맞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라는 듯 제 머리를 누르셨지만 저는 고개를 들었습니다. 아이의 안위에 대한 확언을 듣지 않고는 도저히 한시도 가만있을 수 없을 것 같았어요. 제 눈을 본 태자 전하께서 한숨을 쉬셨습니다.

“아이는 스스로 나왔어, 서혜야.”

“스스로, 말이옵니까?”

“너만 빼면 모두가 무사하….”

태자 전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르르릉 쾅, 소리와 함께 하늘이 번쩍했습니다. 그러더니 벼락이 곧바로 산실에 내리꽂혔어요. 불이 나기 시작하는 걸 보면서 저는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습니다. 낮인지 밤인지도 모를 정도로 어두운 사위, 엄청나게 오는 비, 산실에 치는 벼락, 그리고 이 폭우에도 타오르기 시작하는 불꽃. 모든 게 너무 기이하게 느껴졌어요.

“됐다. 이제 타게 내버려 둬라.”

태자 전하께옵서 그리 말씀하시더니 빠른 속도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하셨습니다. 뛰어내리는 듯이 움직임이 가벼웠어요. 저는 그분에게 안긴 채 멀어지는 산실을 바라보았습니다. 산실은 불타오르기 시작했어요. 순식간에 재가 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됐다, 이제 타게 내버려 둬라.

그 말은 꼭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들렸습니다. 이전에도 산실에 벼락이 친 적이 있을까요? 왜… 어째서? 저는 다섯 꽃잎이고 저의 아이는 신이 내려 주신 황제이지 않습니까? 그를 낳기 위한 산실에 왜 벼락을 내리고 계시는 거죠?

아연해진 속내를 감추지 못한 채 우의에 가려진 시야 너머로 산실을 바라봤습니다. 제가 가마에 오를 때 산실 한쪽이 와르르 무너지는 게 보였어요.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

아이에게 아명으로 ‘수영’이라는 이름이 내려졌습니다.

목숨 수, 길 영. 좋은 이름이지요. 아명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이름입니다. 어릴 때 죽는 아이가 워낙 많으니 일단은 튼튼하게 잘 크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요. 물론 잘 클 것 같기는 합니다. 제가 열두 살이 된 태자를 이미 보았고 그는 아주 잘 컸었으니까요.

제가 아픈 동안 현실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일단 신궁의 궁주, 즉 제 고모님이 돌아가셨어요. 심장 마비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신궁은 불꽃이 아닌 일반 신녀가 궁주로 오르게 되었습니다. 대리 궁주였던 이가 궁주에 올랐는데 그녀가 태자의 이름을 점괘로 뽑아냈습니다.

그리고 황상께옵서 와병 중이시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온몸에 고름이 생기셨는데 전염성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황상께는 아무도 문안을 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태후마마께옵서 황상의 병을 고치라며 태의원에 매일같이 노성을 지르고 계신다고는 하는데, 천하의 모든 명약을 다 쏟아부어도 병이 고쳐지지 않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며 태의들이 난처해한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후궁의 주인은 황후마마가 사라지시면서 당연히 혜비마마가 되셨는데 문제는 황상께옵서 와병 중이시라 천하의 대권이 태자 전하께 넘어가다 보니 혜비마마께옵서 심히 눈치를 보시게 된 것입니다. 한동안은 태자 전하와 대립각을 많이 세우셨던 듯하지만 혜비마마의 자식은 운왕 전하 한 분만이 아니시니까요. 결국 그분은 다른 자식들의 미래를 위하여 태자 전하께 협조를 하게 된 듯합니다.

문제는 태후마마신데 태후마마께옵서는 태자 전하 대신 수렴청정을 하시겠다고 주장하시면서 몇몇 조정 신료들을 실제로 포섭하시는 데 성공하신 듯했습니다.

“월아야.”

제가 손짓하여 부르자 월아가 바로 제 곁에 다가왔습니다.

“후궁 분위기는 어떠하냐?”

월아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최악이라는 뜻입니다. 당연합니다. 황상은 전염병에 걸리셨고 태자 전하의 세상이 될 것 같으니 후궁마마들은 좌불안석이실 게 틀림없습니다. 태자 전하께옵서 황위에 오르시면 후궁은 재편성될 것이고 지금의 후궁들은 모두 쫓겨나야 합니다. 과부로 살거나 혹은 비구니로 살아야겠지요. 어느 쪽이든 호사스러운 삶을 살았던 마마들에게 결코 반가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월아가 제 손을 잡더니 ‘많은 후궁들이 비전하를 배알코자 하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그 이유도 알 듯합니다. 후궁에 남으려면 두 명 중 한 명의 호의가 필요합니다. 황후가 될 여인의 호의, 혹은 태후가 될 여인의 호의입니다. 황태후가 되실 현재의 태후마마께옵서는 이미 호의를 한 번 쓰셨으니 불가능하시고 태후가 될 여인이셨던 분은 냉궁에 가 계시니 그 후궁들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저 하나밖에 없는 셈입니다. 거기에는 혜비마마도 예외이지 않습니다. 물론 친왕 등 황손을 생산하신 분들께는 그만한 대우가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분들이 바라는 대우와는 천지 차이인 것을요.

“이 밤중에 무슨 생각이 그리 깊으십니까?”

갑자기 나타나신 태자 전하의 존재에 놀라 들고 있던 잔을 떨어뜨릴 뻔했습니다. 제가 떨어뜨릴 뻔한 잔을 월아가 솜씨 있게 잡아채더니 눈치 빠르게 뒤로 물러났습니다. 모두가 물러나 우리는 단둘이 되었어요. 제가 그분을 바라보자 그분이 손을 뻗어 제 머리를 짚으셨어요.

“열이 아직도 높습니다.”

“신첩은 이제 괜찮사옵니다.”

“왜 아니 주무십니까. 벌써 나흘째 주무시지 않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러자 태자 전하께옵서 저를 안아 자신의 무릎 위로 올리셨어요. 그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으면 그분의 가슴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두근, 두근, 하고 뛰는 소리가요.

저는 도저히 이분과 그 남자가 같은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겉가죽만 같을 뿐이에요. 심장 뛰는 소리도 다를 것 같습니다. 어떻게 같겠어요? 둘은 너무나 다른데.

“자야 합니다.”

자면 못 돌아올지도 몰라요.

어떻게 돌아왔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는 게 너무나 무섭습니다. 잤다가 돌아오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 잘 수가 없습니다. 당신에게 못 돌아오게 될까 봐, 그 남자에게 정말 안겨야 할까 봐. 그 몸은 저의 몸이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그 감각을 고스란히 느끼게 될 텐데, 저는 그걸 참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말할 수 없어요. 다른 사내가 꿈속에서 저를 탐하고 있어 자지 않으려 한다는 말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사내는 심지어 같은 사람인데요.

제가 태자 전하를 바라보자 태자 전하가 제 이마에 입을 맞추셨어요. 그분이 제 머리를 도닥거리셨습니다.

“네 몸이 나아지면.”

그분이 저에게 속삭이셨어요.

“너를 안을 거야.”

그 목소리는 낮고 뜨거웠어요.

“세상 따위 어찌 되든 상관없이 주야를 막론하고 너를 계속 안을 거다.”

그분의 손이 제 등을 쓰다듬었어요.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야릇했습니다. 저를 어루만지고 계셨어요. 그분이 진심으로 저를 안고 싶어 하신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저도 안기고 싶어졌어요. 꿈속의 그 남자에게 안기는 건 죽기보다 싫은데 같은 얼굴을 한 이분에게는 안기고 싶어서 미지근한 불이 발끝에서부터 감도는 기분이었습니다. 발끝을 뱀처럼 타고 올라온 불은 기어코 제 다리 사이에 머무르며 불을 지펴요.

“그러니 자, 서혜야.”

내가 반드시 지켜 줄 테니.

태자 전하의 다정한 목소리. 그 목소리를 끝으로 저는 눈을 감았습니다. 이상하게 잠이 왔어요. 희미한 어떤 향. 그 향이 수면 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건, 이미 꿈속에 발끝을 담근 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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