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69)화 (69/100)

69.

제가 식사도 하지 못하자 태자 전하는 안절부절못하시며 저를 달래셨어요. 열두 살, 그 어린 분께 저는 위로받았습니다. 사실은 힘들었어요.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단둘이 식사를 하겠다는 것도 완전히 가능하지는 않았어요. 궁녀들은 몇 발짝 떨어져 없는 사람처럼 굴 뿐이지, 방을 나가 주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날카로운 걸 집으려 들라치면 그들은 깜짝깜짝 놀랐어요. 태자 전하께서 제 시중을 들어 주시게 된 것도 아마 그들의 분위기를 태자 전하께서 기민하게 읽으셨기 때문일 겁니다.

이 몸뚱이가 저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 몸인 것처럼 느껴지는 상태에서 황상께 안긴다는 건 참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그는 외모도 저의 지아비와 같고 기억도 어느 시점까지는 제 지아비와 다를 바 없지만 지금 그는 제 지아비와는 다른 사람이 되었어요. 시간의 힘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걸까요? 사람은 대체 어디까지 변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변할 수가 있죠?

처음 꿈에서 만났던 분도 황상이셨고 그분은 외모도 좀 변하셨었지요. 하지만 그분은 이렇게 완전히 다른 분이라고는 느끼지 못했었어요. 어색한 부분이 있었지만 나중 일을 떠올려 보면 그분은 완전히 저의 지아비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이 황상 폐하는….

어디서부터 변한 것일까.

제가 도저히 이분과 제 지아비를 같은 분이라고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일까.

저는 제 지아비가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보다 그분이 걱정하실 거라는 염려보다 그저 보고 싶은 마음만이 컸어요. 이 꿈을 꾸게 된 이래 가능한 한 보고 싶다는 마음 쪽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어요.

왜냐하면 그 마음을 한 번 들여다보면 저는 계속 그 마음을 곱씹으며 고통스러워질 테니까요. 제가 돌아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돌아가고 싶다고 곱씹기만 해서야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제 마음속이 온통 그분 생각뿐이라 더 이상 보지 않는 게 불가능합니다. 어디를 보아도 온통 제 지아비밖에 없는 제 마음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서모, 슬퍼하지 마세요.”

태자 전하께옵서 궁녀에게 손수건을 받아 제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그분은 저를 도닥거리며 달래셨어요. 고작 열두 살. 어찌 이리 어른스러우실까. 이렇게 어른스러우시려면 얼마나 자신을 갈고닦으셔야 했을까. 제가 없는 동안 이분이 얼마나 고된 길을 걸으셨을지 생각해 봅니다.

저는 제가 어릴 때 겪었던 일들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모두 부모가 준 짐을 등에 얹고 크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생각했는데 제 아이가 그렇게 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집니다. 저도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 것인지 모릅니다. 키워 본 적도 없고 생각해 본 적도 솔직히 없습니다. 하지만 많이 웃었으면 해요. 행복했으면 해요. 그게 어떤 건지 저도 잘 모르지만 그래도.

제가 그렇게 해 주고 싶었는데.

속상함으로 가득하여 식사는 고사하고 수저를 들 힘조차 없습니다. 온몸이 아픈 것 같아요. 그런 것 같아, 라고 생각하는 순간 손이 툭 떨어졌습니다.

“서모?”

태자 전하의 작고 어른스러운 손이 제 머리를 황급히 짚었습니다. 예법에 어긋나는 일인데. 머릿속으로 생각했어요. 법도는 조금 더 배우셔야겠다고, 열두 살이면 법도를 잘 아셔야 할 나이인데 못 배우셨나 보다 생각하니 또 가슴이 지끈 아파 왔습니다. 그때 태자 전하가 날카롭게 소리쳤어요.

“태의를 다시 불러와!”

그제야 저는 제가 열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태자 전하는 저를 일으켜 세워 침소로 데려갔습니다. 그분은 궁녀를 불러 제 옷을 갈아입히게 한 다음 저를 눕히셨어요. 침의로 갈아입고 누운 제 곁에 앉아 몇 번이고 머리를 짚어 보셨어요.

“어마마마, 울지 마세요.”

울지 말라는 말이 귓가를 스쳐 무의미하게 지나갔습니다. 이 모든 게 그냥 힘겨웠어요. 몇백 명의 목숨을 담보로 위협받는 이 상황이 고통스럽기만 했습니다. 이걸 헤쳐 나가야 한다는 걸 알지만 지금 당장은 숨이 막혔어요.

황상께옵서는 공녀들에 대한 처형을 미루셨습니다. 전형적인 황궁의 방식이에요. 공적으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물밑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일이 일어나는 것. 결코 역사에 적히지 않도록만 움직이는 것.

제게 협박하는 것 또한 아주 우아하셨지요. 그분이 저에게 무엇을 요구하셨나요? 신첩이라고 스스로를 말할 것? 황귀비 책봉식에 안기는 것? 아니요, 그분이 요구한 건 그런 게 아닙니다. 철저한 굴복. 그것을 요구하신 겁니다. 이번에 만약 도망치면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는 선언이시죠.

이 꿈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저 자신에게 고통을 가할 만한 기회를 엿보는 일도 쉽지 않지만 문제는 제가 그 일에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성공을 한다고 해도 공녀들의 목숨이 어찌 될지 보장받지 못하지만 최소한 성공한다면 차라리 공녀들은 살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황상이 분풀이를 한다 하여도 그것을 볼 제가 없다면 그 분풀이는 무용지물이니까요. 그러나 만약 제가 이 꿈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그저 제 몸에 위해만 가하게 된 거라면, 그 분풀이는 분명 시작될 것입니다.

수백 명을 팽형으로 죽인다고요? 그 빌미가 된다고요? 그 죄를 도대체 무슨 수로 갚겠습니까.

무섭고 힘들고 무엇보다 제 지아비의 육신을 가진 황상이 지독하게 싫어서 미칠 것 같습니다. 저는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싫어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것이 증오라면 사람들은 어찌 타인을 증오하며 태연히 살아가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마치 뱃속에서 지옥 불을 지피고 있는 기분인데요.

“황상께서 드시….”

“집어치워라. 제정신이냐?”

오라는 태의보다 오지 말라는 황상이 먼저 오셨습니다. 그분은 황상이 왔음을 고하는 궁녀들을 한마디로 나무라며 제 침소에 들어와서는 태자 전하를 보고 눈살을 확 찌푸리셨어요.

“태자 네가 여기 웬일이냐?”

“부황을 뵈옵니다.”

“웬일이냐고 물었다.”

신경질적인 하문에 비해 태자 전하는 무척 담담한 목소리를 내셨습니다.

“어마마마를 문안하는데 갑자기 쓰러지시어….”

“네가 무슨 짓을 해서 멀쩡한 사람이 쓰러져?!”

황상의 목소리가 무척 냉담했어요. 놀라서 저는 일어났습니다. ‘내 아이에게 그런 목소리로 말하지 마.’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걸 압니다. 알지만 그래도 반발심이 치솟았어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말할 뻔한 걸 간신히 참았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내비쳐서는 안 됩니다. 제가 무엇을 아끼는지, 무엇을 포기할 수 없는지, 그런 것들을 들키지 않을수록 저는 유리해집니다. 유리? 제가 생각한 단어가 우스워 견딜 수가 없네요. 유리라니요. 저는 불리합니다. 거인 앞에 선 개미처럼 불리하죠.

“왜 우십니까.”

궁인들이 황상의 경어에 불편하고 의아한 기색들을 내비쳤다가 재빨리 안색을 되돌립니다. 말간 무표정. 순종적인 시선 처리. 그 모든 것들이 불편했어요. 황상께서 저에게 경어를 쓰신다는 걸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궁인들이 알게 될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서비라고 해도 고작 공녀 출신. 서비로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여인에게는 정녕 파격적인 대우가 분명합니다. 황귀비 책봉보다 아마 이 경어가 더 놀라울 수도 있었을 거예요.

마음이 이토록 힘든데, 보고 싶은 님을 볼 수 없다는 게 너무 괴로운데, 이 와중에 이런 것들을 살펴야 하는 게 더욱 불편했습니다. 저는 저를 잡아 얼굴을 마주 보려고 하는 황상의 손짓을 이리저리 피했어요. 하지만 제힘은 미약했고 결국 턱을 붙잡혀 황상과 마주 보게 되었습니다.

“왜?”

황상은 애가 닳는 눈을 하고 물으셨어요. 그분은 제가 우는 것이 퍽 괴로우신지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계셨습니다.

“열이….”

대답할 수 없는 것만 잔뜩 있어서 저는 거짓을 입에 올렸습니다. 거짓을 올리지 않을 수가 없어요. 황상은 강산의 주인. 알고는 있었지만 정녕 생사여탈권을 쥔 분이시라는 걸 지금만큼 실감한 때가 또 있었을까요.

“열이 올라서 아플 뿐이옵니다.”

제가 그렇게 고한 순간 마침 때에 맞춰 태의가 들어섰습니다. 제 궁녀를 따라 들어온 태의는 폐하와 태자 전하의 존체에 놀라 납작 엎드렸어요. 아마 저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꽤 느긋하게 왔다가 경을 친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어서 진맥을 보지 않고 뭐 하는 거냐?!”

황상의 고함에 태의가 혼이 빠진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무릎걸음으로 달려와 제 손목을 잡았습니다. 그는 신중하게 진맥을 보려고 애썼지만 부담감 때문에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한쪽에는 황상이, 다른 한쪽에는 태자 전하가 계셨으니까요. 두 분 다 장승처럼 서서 태의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태의는 여러 번 제 손목을 짚었고 급기야 황상께서 으르렁거리셨습니다.

“황귀비가 될 존귀한 여인의 손목을 몇 번이고 주무르다니, 손목이 잘리고 싶구나.”

태의가 깜짝 놀라 제 앞에서 물러났어요.

“폐, 폐하께 아뢰옵니다. 심화의 기운이 자못 강하오니 이는 아마 급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따른 것일 터. 안정탕을 올리겠사옵니다.”

심화의 기운이 자못 강하다는 말은 결국 제가 속상함을 이기지 못하여 몸져누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틀린 말 하나 없는 걸 보니 과연 명의는 명의라,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눈만 내리깔았습니다. 그러자 황상께옵서 다시 제 턱을 들어 올려 자신을 바라보게 하시며 물으셨습니다.

“안정탕으로 되겠느냐?”

태의에게 하문하셨는데 시선은 저에게 닿아 있었습니다. 제 얼굴을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계셨어요. 저에게서 이상 징후를 찾아보려고 하는 황상의 시선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그때 태자 전하께옵서 물으셨습니다.

“많이 여위신 듯한데 체력을 보존하실 수 있도록 탕에 조금 신경을 쓰는 게 좋겠다, 어의.”

제가 여위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깃들기 전 이 공녀의 모습도 모르겠고 요즘 계속 변해 가는 제 모습도 눈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내내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어찌해야 이 꿈에서 벗어날까 하는 것뿐이에요. 그렇지만 태자 전하의 마음 씀씀이에는 무척 감사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분께 조금 웃음을 보냈을 때, 갑자기 황상께옵서 소리치셨습니다.

“모두 나가라!”

갑작스러운 하명에 모두가 황급히 물러났습니다. 태자 전하께옵서도 예외가 아니라 그분도 빠르게 절하고는 물러났어요. 우리는 순식간에 단둘이 되었습니다. 불려온 태의도 다른 궁인들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단둘이 남은 것이 불편해서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린 것 같습니다. 턱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왔어요. 턱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에 읏, 하는 신음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그만둬 달라든가 아프다든가 하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그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을 하라고 시간을 주시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결국 저는 그 말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한계까지 조여졌던 턱이 어느 순간 편안해졌습니다. 욱신거림 때문에 얼굴을 굳히고 있는데 황상께서 말씀하셨어요.

“짐을, 아니 저를.”

그분은 저, 라고 자신을 지칭하는 게 약간 불편해 보이셨습니다.

“싫어하진 않으셨잖습니까.”

“…….”

“저에게 연정을 주신 적은 없어도 외면하신 적도 없었는데.”

황상의 목소리가 쓸쓸했습니다. 조금은 분한 것 같기도 했습니다. 어느 쪽이든 사실 그 감정을 알고 싶지도 않았어요. 이 사람은 제 지아비가 아닙니다. 그럴 수 없어요.

그때 황상이 저를 꿰뚫어 보신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변한 것 같습니까?”

“…….”

“비가 아시는 그 남자와 제가 많이 다른 것 같습니까? 그래서 이런 얼굴로 저를 보시고 제 곁에 있어야 한다는 것에 이토록 심열이 오르시는 겁니까?”

그런데, 라고 그분이 말을 잇는 게 싫었습니다. 듣기 언짢은 말이 나오리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습니다. 방어적인 태도였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정말 듣고 싶지 않았어요. 그건 본능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몸짓에 황상은 불쾌하신 듯 보였습니다. 그분은 화를 내시는 대신 이를 드러내며 웃으시더니 제 허리를 잡아 바짝 당신께 붙이셨습니다.

“제가 장담하지요.”

그분의 숨결이 제 귓가에 닿았습니다.

“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비께서 모르셨을 뿐 이게 바로 저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입술 안쪽의 살을 지그시 깨물며 반발심을 겨우 참는데 황상이 말을 이으셨어요.

“네가 어릴 때도, 네가 내게 막 시집온 때에도.”

“…….”

“짐은 언제나 이러했었다. 네가 아는 짐이 누구든 간에 그는 모두 짐이며, 결국 짐은 그들과 한통속이고 한 사람이야. 그러니 너는 내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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