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68)화 (68/100)

68.

공녀들을 살리는 대가로 황상은 저에게 뭘 요구할 생각일까요?

우리가 잘못 만났다고 말하자 황상의 얼굴은 차갑게 굳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어요. 먼 곳에 계실 제 지아비의 안위를. 그분은 분명히 저를 살리기 위해 또 백방 천방 노력하고 계시겠지요. 저는 돌아가야 합니다.

이 죄의 대가를 어찌 갚든 그것은 차후의 일로 미뤄 둬야 한다는 것이 제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혹시 제 자식에게 죄의 올가미가 드리워질까 생각하면 가슴이 조여듭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물러날 수 없어요. 이런 비열한 덫에 걸릴 수는 없습니다.

한 번 걸리면 계속 걸릴 덫입니다. 저 수많은 공녀의 목숨을 빌미로 황상께옵서는 저를 허수아비처럼 휘두르시겠지요. 그건 아니 될 말입니다. 지킬 수 없는 약조를 남발하느니 차라리 죄를 짓는 것이 낫습니다.

“잘못 만났다니.”

황상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눈은 웃고 계시지 않으셨어요. 늘 입만 웃는 사람. 저는 이런 이를 지아비로 둔 적이 없습니다.

“제 마음을 서럽게 하시는군요.”

“…….”

“황제의 마음이 서러워지면 그 서러움을 어디에 풀겠습니까?”

공녀들을 죽인다고 해도 눈 한 번 깜빡여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눈을 내리깐 채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그러자 황상께서 높은 자리에서 손수 내려오셨어요. 한 걸음, 또 한 걸음.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소름이 돋았습니다.

싫어서.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저는 정이연이라는 사람을 이렇게 싫어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늘 저의 다정한 부군이셨고, 제가 죄송하여 마음에 걸리기만 한 분이었고, 저의 연모하는 님이셨는데.

이상한 일입니다. 같은 얼굴인데, 같은 근원인데, 싫어서 소름이 돋았어요.

“공녀를 하나씩 죽여 볼까요?”

저는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제 지아비는 인명은 재천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이렇게 사람의 목숨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장난감처럼 굴리는 이가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대답하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죽는지, 내시감이 이야기해 주더이까?”

“……?”

어떻게 죽는지?

사약을 먹거나 자진하라 명하지 않을까, 라고 당연히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죽는지, 라고 말할 때 떠오른 그 잔인한 웃음이 마음에 걸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황상을 바라봤어요. 그러자 황상이 입술을 비열하게 올리며 말씀하셨습니다.

“쪄 죽일 겁니다.”

“……!”

“솥에, 쪄 죽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팽형을 하겠다고?

그렇게 많은 공녀를 모두? 제 눈이 아마 그렇게 물었나 봅니다. 황상은 아주 자비로운 척 웃으며 제 턱을 들어 올리셨어요. 그 손이 닿는 순간 몸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손이 닿은 턱에서부터 온몸으로 오한이 달렸어요.

“아니요. 공녀뿐만 아니라 그 밑에 있었던 궁녀들까지 모두 죽일 겁니다.”

그 순간 저에게 제 여동생을 살려 달라 빌던 궁녀의 얼굴이 왜 떠올랐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모르는 척해야 합니다. 결코 이 덫에 걸려서는 아니 됩니다. 그걸 아는데도 저는 이 덫에 손을 뻗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팽형이라고요? 그 많은 공녀를 모두 팽형으로, 가마솥에 쪄 죽이겠다고요? 천지신명이시어, 제가 어떻게 이 이야기에 고개를 돌릴 수가 있습니까. 제가 사람이라면, 제가 한때 차기 국모의 자리에 논의되었던 이라면 어떻게 그리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황상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습니다. 그분의 눈은 제가 아는 그 눈이었어요. 새까만 눈. 그런데 언제나 밤하늘 같다고 생각한 그 눈이 어두운 심연 같다고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진정이십니까?”

제가 묻자 황상이 가볍게 웃음소리를 내셨어요.

“비, 당신은 아실 겁니다. 제가 진정인지, 아닌지.”

네, 압니다.

황상은 진정이세요. 저는 눈을 감았습니다. 모르는 척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어요. 팽형으로 죽어 갈 수많은 이들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법도에 목숨을 거는 분께서 어찌 이렇게 법도를 하찮이 여기실까? 예법을 지키세요.”

예법이라.

제가 절을 하기 위해 물러나자 황상은 저를 놓아주셨습니다. 하지만 정작 절을 하려 들자 만류하셨어요. 양손으로 저를 잡은 황상이 픽 웃으셨습니다.

“그따위 절이나 받자고 지금 제가 예법을 운운하는 줄 아십니까?”

마른 타박이 이어졌습니다. 웃음기가 섞여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웃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어찌하라는 것이냐고 그분을 바라보자 그분이 말씀하셨어요.

“저가 아니고 신첩.”

말을 해야 하는데 혀가 굳은 듯 나오지가 않습니다. 신첩? 저는 이 남자의 여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도저히 그 말이 나오질 않아 입만 달싹거리고 있자니 황상이 바짝 다가와 제 귓가에 대고 말씀하셨어요.

“다, 죽일까? 서혜야.”

“…….”

“쪄 죽여도 좋고, 끊는 물에 처넣어도 좋고, 기름을 칠한 가마솥에 넣어도 좋지. 어느 게 좋으냐.”

소름이 돋았습니다. 몇백 명이 팽형으로 죽으면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아무리 치세를 잘하여도 그 악행은 덮을 수 없을 터인데 황상은 아주 태연했습니다. 저 하나를 괴롭히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처럼.

“신… 첩, 폐하께 인사 올리옵니다.”

결국 제가 그렇게 말하자 황상이 웃음을 터뜨리셨습니다. 만족하신 것처럼요.

***

황귀비 책봉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황귀비로 책봉하는 날, 비를 안을 겁니다.”

황상의 말에 식은땀이 났어요.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자니 황상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전에도 짐에게 연모지정이 있어 안긴 건 아니지 않느냐.”

그건 맞습니다.

제가 이분께 안긴 건 시집을 왔기 때문이었어요. 우리는 혼인했고 그러니 저는 이분이 하시는 대로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초야는 시작되었었죠.

“그때도 이런 얼굴은 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 새삼스럽게 이런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지. 아니 그러냐?”

그때는 연모지정이 뭔지 몰랐습니다. 연모하는 님이 계시지도 않았고요. 그리고 저는 그때 제 지아비를 싫어하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때와는 모든 게 달라졌어요. 지금 저에게는 연모하는 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제 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저는 이분이 싫습니다. 소름 끼치고 끔찍합니다.

황상에게서 제일 싫은 건 얼굴입니다. 이 반듯하고 서늘한 얼굴. 이 아름다운 얼굴. 이 얼굴을 볼 때마다 뜯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어찌하여 이 얼굴이 이분에게 있지요? 있어서는 안 되는 얼굴이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혀 다른 사람인데, 정말로 다른 사람인데.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요.

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고개만 숙일 뿐입니다. 제 귓가에 입술이 닿았어요. 촉, 하는 소리에 귀를 잡아 뜯고 싶었습니다.

그날 오후, 의외의 손님이 제 궁을 방문했습니다.

“태자 전하!”

저는 달려가 그분을 맞았어요. 그분은 한 손을 다쳐 피를 철철 흘리는 채로 저에게 오셔서 웃고 계셨습니다. 고작 열두 살. 피가 너무 많이 나는데 그분은 아프지도 않은지 웃으면서 말씀하셨어요.

“치료를 받으러 왔습니다, 어마마마.”

보자마자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습니다. 조그만 손이 피투성이라 상처가 잘 보이지도 않았어요. 제가 태의를 부를 틈도 없이 궁녀들이 뛰쳐나갔습니다. 태의를 부르러 간 틈을 타서 궁녀들과 제가 조심스럽게 흙과 땀, 그리고 피투성이의 손을 씻겼습니다. 한편으로는 입고 있는 무구를 벗겼어요. 아마 진검으로 검술을 연마하다 잘못된 것 같았습니다.

“아프지는? 아프지는 않으십니까?”

“괜찮사옵니다.”

의젓한 태자 전하는 제가 울 것 같자 제 어깨를 조심스럽게 도닥거렸어요. 저는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피가… 너무 많이 났거든요.

“보기보다 별것 아니니 부디 심상하지 마시옵소서.”

“전하, 이게 어떻게 별일이 아니옵니까.”

제가 역정을 내려 들자 태자 전하가 웃음을 터뜨리셨어요.

“아니, 검이 스쳤을 뿐, 흔한 일이옵니다. 이리 우시려 하시면 소자가 어찌 다칠 때마다 서모의 궁을 찾는단 말입니까.”

저는 눈을 깜빡여 겨우 울음을 참아 냈습니다. 그러는 사이 당도한 태의가 조심스럽게 태자 전하의 상처를 보기 시작했어요.

태자 전하의 말씀대로 상처는 별게 아니었어요. 길게 찢어져 피가 많이 났을 뿐 실제로는 피부 가죽만 얇게 찢어져 금세 나을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금창약을 받으신 태자 전하는 약을 내관에게 던져 주고는 제 옆에 앉아 식사는 했냐며 다정하게 물었습니다.

우리는 같이 석반을 들었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단둘이 식사를 하고 싶어 하여 우리는 둘이서만 식사를 하게 되었어요. 다소 법도에 어긋난 모양새였지만 모자지간이기도 하거니와 태자 전하는 아직 연치가 열둘밖에 되지 않았으니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단지 조금 죄송했던 부분은.

“전하, 이런 건 서모가….”

“효심으로 모시겠다 하지 않았사옵니까. 소자가 해 드릴 겁니다.”

“그래도 다치셨는데.”

제가 아무리 만류해도 식사 시중을 태자 전하께서 들어 주셨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분은 저의 모든 식사 시중을 들어 주셨습니다. 문득 아주 어린 날이 떠올랐어요. 저의 식사 시중을 들어 주셨던 분은 태자 전하보다 덜 능숙하셨었어요. 그리고 더 어리셨지요. 하지만 저는….

“서모? 우시는 겁니까?”

보고 싶어.

한 번 터져 나온 마음을 멈출 길이 없습니다.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어요. 저는 밥도 먹지 못하고 태자 전하를 안은 채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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