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67)화 (67/100)

67.

탁탁탁탁.

내시성에서 내관들이 달려 나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내관들이 달려와 순식간에 양쪽으로 늘어섰습니다. 단 한 명의 후궁인 저를 맞기 위해서였죠. 제가 가마에서 내릴 때쯤에는 내시감이 그들의 가장 앞에 서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위엄 있어 보였습니다.

내시감 이록. 내시감으로서는 이례 없는 출세를 이룩한 사람이라고 전해지는 이인데 제가 태자비였던 현실에서는 아직 입궁하지 않았던 사람이라 저로서는 이 사람을 지금 처음 보는 셈이 됩니다.

“서비마마를 뵈옵니다.”

서비, 화연.

제 이름은 드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저의 일거수일투족은 삼엄한 감시를 받고 있지요. 지금만 해도 양쪽에서 상궁 두 명이 저를 붙잡고 있습니다. 타인의 눈에는 격조 높은 시중을 드는 것처럼 보이겠으나 저에게는 구속처럼 느껴집니다.

“서비마마께옵서 이런 누추한 곳에 들러 주시다니 큰 광영이옵니다.”

“이런 누추한 곳?”

저는 바로 눈을 치켜떴습니다.

“이곳은 황상을 모시는 이들이 일하는 관청이다. 네가 누추함을 논할 바는 아니지.”

“…….”

“아니면 네가 이곳의 주인이라도 된다는 것인가?”

이런 일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황궁에서는 종종 기 싸움을 해야 할 때가 있으니까요. 아랫사람들과 기 싸움을 할 거라면 선공을 해야 합니다. 당하여 방어하는 것은 선공하는 것보다 무엇이든 그 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마, 소인이 어찌 그런 천부당만부당한 말을 올렸겠사옵니까.”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라는 걸 안다면 자중하도록 하라.”

내시감이 뭐라고 변명을 읊기 전 말을 잘라 버리고 저는 그를 지나쳐 내시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제 등 뒤를 찌르는 시선이 아주 따끔따끔하네요. 하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그보다 윗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앞으로의 이야기가 수월해질 테니까요.

내시성의 내시감 집무실에서 우리는 차를 한 잔씩 앞에 두고 서로를 마주하고 앉았습니다. 차를 마신 저는 조금 놀랐습니다. 차 맛이 좋았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내시감이 즐기기엔 지나치게 좋은 차. 좋은 차를 즐긴다는 건 좋은 장신구를, 좋은 음식을, 좋은 비단을, 좋은 집을, 좋은 정원을 즐긴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그 모든 좋은 것들을 즐기려면 돈이 필요한 법. 그 돈을 어디서 조달하였을까요?

파 볼 필요가 있을 만한 일, 이라고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파 보다니요. 어서 빨리 돌아가야 하는 사람이 누구를 파 보고 무슨 일을 해결하겠다는 것인지.

“그래, 공녀들이 모두 처형당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제 말에 내시감의 눈썹이 꿈틀거렸습니다.

저는 내시감이 뭐라고 말을 하기 전에 바로 말을 이어 나갔습니다.

“무슨 죄목이지?”

“고귀한 여인께옵서 개입하실 문제가 아닌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쾅!

저는 힘껏 탁상을 내리쳤습니다. 찻잔이 흔들리고 찻물이 넘쳐흘러 제 손을 적셨어요. 상궁이 서둘러 달려와 제 손을 손수건으로 닦아 냈습니다. 그 손수건에는 붉은 꽃이 자수로 새겨져 있었어요. 저는 그 꽃이 뭔지 압니다. 그 꽃은 제 지아비께서 저에게 주시곤 했던 꽃이어요.

잠시 눈길을 빼앗겼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내시감을 바라봤습니다.

“후궁의 주인은 본궁이다.”

“…….”

“너 따위가 개입의 가부를 따질 자리가 아니거늘.”

제 차가운 목소리에 내시감이 고개를 숙였어요. 내시감은 내명부에 속합니다. 현재 내명부의 최고 어른은 저이니 내시감은 즉 저의 아랫사람, 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사람은 저인 것입니다. 제가 공녀 출신이기 때문에 내시감은 내심 저를 얕잡아 본 듯하지만 저는 이런 상하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평생 거기에 얽매여 살아야 했으니까요.

“명한다. 고하라.”

제 명에 내시감이 내리깐 눈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여기서 제 명을 거부하려면 황상께서 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직접 명을 내리셨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명은 없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나름대로 있었습니다.

저는 평소 지아비의 일에 잘 끼어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가 아는 그분은 저의 개입을 거부하신 적도 없으시니까요. 저를 속인 적은 있으시지만 대놓고 저에게서 내용을 감추려고 하신 적은 없으셨던 분이었습니다.

“공녀들의 죄목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간음이옵니다.”

의외의 죄목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아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간음?! 그 많은 공녀가 다 말이냐?”

제가 따져 물으려는 찰나, 내시감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했습니다.

“…공녀들이 저들끼리 혹은 금위병들과 놀아나는 것은 더 이상 숨길 일도 아닌 것.”

그 담담한 목소리는 분명 사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돌려 상궁을 보자 상궁이 당혹스러운 눈으로 제 시선을 피했습니다. 그녀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어요. 알고 있었다고? 제가 눈을 깜빡이는데 내시감이 느릿하게 한마디 했습니다.

“마마께서도 잘 아시고 계셨던 일이 아니옵니까.”

그 목소리는 말하고 있었어요. ‘너도 그랬으면서, 뭘.’이라고.

제가 내시성을 무슨 정신으로 빠져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가마에 올라 한참을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습니다. “상궁들도 어디로 모실까요.” 하고 한 번 묻더니 그 이상은 묻지 않았습니다.

공녀들 사이에서 간음이 유행했다….

그건 죽을죄가 맞습니다. 어찌 그걸 살려 낼 수 있습니까. 그걸 묵과한 아랫사람들도 같이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건 어떻게도 할 수가 없어요. 도리어 제가 신경 쓰이는 건 저 자신입니다. 이 몸은 과연 결백한가.

아니라면 저 많은 사람들이 다 죽어 가는 판국에 홀로 살아남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그러나 죽고 싶지 않아요. 당연히 살고 싶습니다. 살아서 돌아가야….

저는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당연히 남이야 죽든 말든 저 하나는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사지로 가는 걸 바라만 보고 있으면서 홀로 살아남는다면, 그 죄를 나중에 어찌 갚습니까? 못 갚은 죄는 자손에게 내려간다는데 제 아이가 그 죄를 짊어지게 된다면….

그걸 어찌 바라만 보고 있겠습니까?

내시성 앞에 서 있는 가마를 지나가는 궁인들이 힐끔거립니다. 그걸 못 견디겠는지 상궁이 조심스럽게 다시 한번 물었습니다.

“마마, 가마를 눈이 없는 곳으로 옮겨 드리오리까?”

“그래…. 아, 아니다.”

제 아이에게, 제 죄가 심어진다고 생각하면 등골에 소름이 돋습니다. 저 많은 사람의 죽음을 간과하고 스스로는 호화로운 삶을 산 죄는 얼마나 클까요. 저는 도저히 그 죗값을 다 치를 자신도 없고 그 죗값을 자식에게 떠넘길 배포도 없습니다. 그럴 수 없어요, 절대로.

“편전. 편전으로 가자.”

제 말에 상궁이 걱정되는 눈으로 저를 바라봤습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을 달싹거렸지만 아주 잠깐뿐이었어요. 저는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무슨 말이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저에게 소중했어요. 그러나 그녀는 저에게 아무 말도 해 주지 않고 그저 “예, 마마.”라고 대꾸만 했을 뿐입니다.

가마가 편전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습니다. 공녀들은 죽을죄를 지었지요. 그러나 공녀들의 지아비이신 황상 또한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십니다.

부인을 들이면 총애해야 한다. 부인이 둘이면 그 둘이 하나인 것처럼 느끼도록 총애해야 한다. 부인이 셋이어도 그 셋이 자신 하나만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총애해야 한다. 신궁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황상은 공녀들을 완전히 외면했어요. 그녀들은 외면당한 상태에서 외로움을 어떻게든 추스르려 애썼습니다.

저는 공녀의 삶을 살아 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공녀들이 무척 힘들다는 건 압니다. 그녀들은 나라를 위해 팔려 왔고 평생 대부분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살다 죽어야 합니다.

그건 아주 외로운 일일 거예요. 황상의 총애라도 받으면 좋겠지만 대부분은 시선 한 번 못 받는 것이 공녀들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역대 황상들께서도 황후마마나 후궁마마들께서도 공녀들은 굳이 건들지 않으셨습니다. 권력의 근처에도 못 올 가엾은 신세들을 굳이 핍박하실 이유는 없으셨기 때문이지요.

그런 불문율을 굳이 깨고 황상께서는 공녀들을 모두 죽이신다고 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게 왜일지 너무 뻔합니다. 저 때문이겠지요. 제가 여기에 있으니 공녀는 필요 없다고 하시는 겁니다.

단순히 그런 이유로 사람을 저렇게 많이 죽이다니요.

저분은 제 지아비가 아닙니다. 제 지아비는 저런 분이 아니어요.

무거운 마음으로 편전에 도착하자 내관들이 제가 뵙고자 함을 황상깨 고했습니다.

“들라 이르라.”

지체 없는 명이 내려와 안으로 들려는데 열린 문 안에서 대리시의 책임자인 대리시경이 나오는 게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공녀들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온 듯했는데 그는 저를 보자마자 묵례를 하긴 했지만 싫은 티가 역력했어요. 어쩔 수 없지요. 저는 홀로 살아남고 홀로 출세한 공녀니까요.

그를 스쳐지나 들어가자 용상에 앉아 계시는 황상이 보였습니다. 높은 자리와 그는 아주 어울렸어요. 고고하고 위엄 있고, 그리고 정말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오셨습니까.”

그분이 활짝 웃으셨어요.

다정한 미소는 제 지아비와 같지만 저는 그 미소에서 교활한 덫을 봤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공녀를 죽이겠다고 하신 건 저를 부르기 위한 책략이셨다는 것을. 저는 불려 온 것입니다. 왜 저를 부르셨는지 이제 듣게 되겠지만 저에게 결코 이로운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사람을 쥐 잡듯 몰아붙이는 이 습성.

도대체 이런 습성이 제 지아비의 어디에 있었단 말입니까.

제가 돌아서려는 찰나 그분이 제 등에 대고 말씀하셨습니다.

“짐은 협박하지 않아요.”

“…….”

“이리 오세요. 들으신 것들은 사실이 될 일들입니다. 저에게 하시고 싶은 말이 있으실 텐데 하셔야지요.”

언제나 사랑스럽던 제 지아비를 떠올립니다.

다정한, 상냥한, 올곧은, 강한, 그런 말들로만 가득 차 있는 그분을 떠올리고 눈앞의 남자를 바라봅니다. 어떻게 같은 사람일 수가 있죠?

저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결코 ‘짐’이라고 스스로를 말씀하지 않으실 겁니다.”

이제는 근본도 같은지 모르겠는 사람.

그저 같은 것이라고는 얼굴뿐인 사람에게 저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잘못 만났습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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