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66)화 (66/100)

66.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거울 속의 그분을 빤히 바라보았어요. 등골이 싸늘한데, 그래서 더욱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외나무다리에서 사자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피하면 더 위험해질 듯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폐하.”

일단 저는 제가 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생각했어요. 저는 심서혜지만 그 사람은 아닙니다. 제가 여기에 왔을 때는 유음 황녀가 있었죠. 하지만 제가 과거를 바꿈으로써 그녀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거기까지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신궁에서 받은 교육에 따르면 세계는 나무와 같습니다. 각 기본이 되는 가지가 있고 또 가지는 가지를 뻗죠. 선택에 의해 세계는 계속 나누어집니다.

저는 냉궁에 갔고 거기서 꿈을 꾸는 동안 유음 황녀로 빙의해 사건을 바꾸었습니다. 유음 황녀가 태어난 가지도 존재할 겁니다. 어느 가지에서 저는 유음 황녀로서 시간을 바꾼 적도 있을 것이고 바꾸지 못한 적도 있을 것입니다. 세계는 각각의 선택과 그 성공, 그리고 실패를 모두 포용하니까요. 그것이 천지신명의 안에 있는 세계입니다.

“듣고 있습니다.”

황상께서 다정하게 대꾸하셨어요. 하지만 그분의 눈은 여전히 무서웠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저는 공녀의 몸에서 깨어나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세계라는 나무의 또 다른 가지의 제가 꿈속에서 과거를 바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유음 황녀의 몸에서 눈을 떴지만 그녀는 공녀의 몸에서 눈을 떴지요. 우리는 근원이 같은 사람이니 비슷한 결정을 내리고 행동했을 겁니다. 그러나 상황은 분명 조금씩 달라지고 있지요.

제가 공녀의 몸에서 눈을 떴을 상황을 생각해 봅니다. 잘 상상은 가지 않지만 그래도 생각해 보았어요. 첩지를 거절한 이유는 뭐였을까요. 분명한 건 처음부터 미래를 생각한 처신이라는 겁니다. 정확히는 미래에 얽히지 않겠다는 처신이죠. 첩지를 받지 않는 건 그런 뜻입니다. 그건 알 것 같아요.

저는 왜 그랬을까요.

그것도 알 수 있습니다. 돌아가야 하니까요.

“제가 도망을 갔다는 말씀은….”

완곡하게 상황을 짚어 보려고 했지만 황상께옵서는 바로 제 말을 자르셨어요.

“사라졌잖습니까.”

그리고 한마디 더하셨어요.

“여기에 계속 있겠다 해 놓으시고선.”

제가 그런 약속을 했을까요?

왜? 저는 제가 처음에 꿈을 꿨을 때를 떠올려 봅니다. 저는 매우 적극적이었어요. 당연했습니다. 현실에서 저는 냉궁에 갇혀 있었습니다. 죽은 몸과 다를 바가 없었지요. 저는 꿈에 집착했었습니다. 어차피 죽을 몸이었고 살아 있다고 느낄 만한 게 꿈속의 사건들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그 순간에도 어떤 약속은 할 엄두를 낼 수 없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다른 사람의 몸을 갈취했으니까요. 언제 이 몸의 주인이 돌아올지 알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데 어떻게 약조라는 걸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약조를 지키지 못하면 남겨진 사람은 어쩌라고요.

꼭 무사히 전하 곁으로 돌아가겠사옵니다.

그때는 둘이 되어 문안드릴게요, 전하.

지켜야 하는 약조가 생각나 목이 말라붙었습니다. 물을 마셔도 소용이 없겠지요. 이 초조함은 제가 여기에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니까요.

“폐하, 신첩은 그 심서혜가 아니옵니다.”

“…뭐?”

“신첩 또한 미래의 지아비를, 다른 몸을 통해 만난 것은 사실이옵니다. 가지들은 다 비슷한 생을 겪는다고들 하지요. 이 가지의 저와 저 가지의 저는 결국 같은 뿌리에서 나온 한 사람이고 그들은 모든 선택 속에서 각기 다른 생을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폐하. 폐하께 자수를 올린 그 심서혜는….”

수많은 선택과 그로 인해 갈라지는 생. 수많은 생들은 나무 위의 가지처럼 뻗어 갑니다. 그것들은 다른 듯 하면서도 같아서, 수많은 저는 결국 비슷비슷한 생을 살 수밖에 없다고 하지요. 그것이 천성과 운명의 한계, 결국 나무의 한 가지가 맺을 수 있는 종착점이라고 합니다.

아마 폐하와 저는 연리지처럼 가지가 무척 얽혀 있겠지요. 촘촘히 얽혀 있는 그 가지들 중에서 폐하와 얽혀 꽃을 피웠던 가지는 제가 아닙니다. 그 가느다란 가지는 어딘가에 있겠지만 절대로 저는 아니에요.

우리는 같은 사람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입니다. 저는 이분이 찾는 이를 모릅니다. 그리고 제 현실의 지아비와 꿈속의 황상을 저울질한다면 볼 것도 없이 현실의 지아비를 택하겠지요. 같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시선이 다르고 얼굴이 다르고 손짓이 다르고 체온이 다른데.

세월이 다르고 기억이 다른데.

우리가 겪은 시간이 다른데.

어찌 같은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제가 아닙니다. 제 생의 기억에서 공녀의 몸에서 눈을 떠 폐하께 그런 물건을 바친 적은 한 번도 없사옵니다.”

“그럼 네가 서혜가 아니란 말이냐?”

“저는 서혜이옵니다.”

“그런데?!”

“가지를, 잘못 잡으셨나이다.”

제 말에 황상께옵서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신 것 같았습니다. 아마, ‘심서혜를 데려오면 된다’고만 생각하셨겠지요. 설마 수많은 가지의 심서혜까지는 생각하시지 못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분은 눈을 크게 뜨고 저를 바라보셨어요. 거울 속의 그분 눈이 너무 커져 있어서 송구했습니다. 가만히 그 눈을 바라보다 결국 먼저 피했어요. 어쩔 수가 없었어요. 마음이 너무 무거웠습니다.

그분이 잠시 하, 하고 한숨을 쉬셨어요. 한동안 말이 없던 그분은 홀로 감정을 감내하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이윽고 한참 만에 그분이 입을 여셨어요. 감당하기 힘든 침묵이 겨우 조금 옅어졌습니다.

“비께서 어릴 때 후궁의 일에 휘말려 곤경에 처하셨던 일.”

“…….”

“비께서 아프시던 날 문병을 갔던 일.”

“…….”

“우리의 부부 생활.”

“…….”

“저는 모두 기억합니다. 이것들 중에는 그대가 있으시겠지요. 신궁의 교육대로 세계는 나무이고 생은 그 나무의 가지라면, 그 근원에는 우리가 같이 있었을 터. 결국은 어디서 갈라졌느냐의 차이일 뿐, 근본에서 우리는 같은 사람이고 함께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대답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황상의 표정이 너무 괴로워 보여서 굳이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았어요. 황상께옵서는 제 대답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굳이 제 대답을 기다리시지 않고 말씀을 이었습니다.

“저를 버리신 게 비가 아니라 하시니 책망할 수 없겠군요. 이 서러움은 마음속에 묻도록 하지요.”

황상께서 웃으셨습니다. 부드러운 웃음이지만 제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웃음이었어요. 싸늘하게 눈은 웃고 있지 않은 채 입만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눈은 저를 들여다보고 계셨어요. 제가 거짓을 고하는 건 아닌지 가늠하시려는 듯이.

아아, 이분은 저를 믿고 계시는 게 아닙니다. 제가 그 심서혜가 아니라 고한 것도 믿는 게 아니라 일단 믿는 척을 해 주고 계시는 거예요. 저는 아연해져 황상의 시선을 가만히 받아 냈어요. 거울을 사이에 두고 우리의 시선은 마주쳤습니다. 아까와는 달리 거울에서 우리의 시선은 부딪혔고 깨지는 것 같았어요. 서로의 시선이 그토록 차고 서로에게 냉담했습니다.

***

근원은 같은 분.

저는 요즘 매일 그 말을 되새깁니다. 황상과 제 지아비가 같은 분이라는 걸 믿기 어려울 정도예요. 제 지아비께옵서는 이런 분이 아니신데 꿈속의 황상은 완전히…, 조금 완곡하게 말씀드리자면 제가 존경하기 어려운 분이 되었습니다.

폭군이라고 하기에는 선정을 많이 베풀고 계시지만… 성군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억압이 심하신 분. 아무도 믿지 않고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는 분. 매우 오만하고 사나운, 그런 분이 되셨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아니에요. 저는 이런 지아비를 한 번도 뵌 적이 없으니까요.

제 지아비는 많은 이의 추앙을 받는 만큼 그 사람들에게 골고루 신임을 나눠주시는 분이셨습니다. 태자부의 사람들은 그분을 위해 목숨을 거는 걸 마다하지 않았어요. 그건 진심에서 우러나온 충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황궁에서는 아무도 황상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싶어 하지 않아요.

황궁은 화려한 금빛과 어두운 그림자가 교묘하게 엇갈려 감도는 곳이고 사람들은 모두 겉으로 웃지만 속내 따위는 내비치지 않습니다. 태자부에서 그분을 모셨던 사람들은 바른말을 하다 죽거나 귀양을 가거나 혹은 스스로 관직을 버리고 귀향해 버렸습니다.

이제 그분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뿐입니다. 지금은 그분이 이치를 잘 따지고 계셔서 모두가 두려워하는 검이 되어 있으시지만 어느 순간 달콤한 말에 놀아나기 시작하시면 모두의 금화 주머니가 되어 이리저리 탐해지시기만 할 겁니다.

“마, 마마, 서비 마마!”

갑자기 궁녀 하나가 뛰어 들어왔습니다. 얼굴색이 몹시 하얗게 질려 있었어요.

“마마. 고, 공녀들을 모두 처형한다고 하옵니다.”

“…처형?”

공녀들을, 모두?

그녀들이 무슨 죄를 지었을까요? 설사 무슨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녀들이 자기변호를 할 시간은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애초에 말도 안 통하고 서로 입장 차이도 많이 나는 공녀들이 무슨 작당 모의를 했다고 떼로 죽인단 말입니까?

“왜, 왜 그런 황명이 내려지신 것이냐?”

저는 뛰어 들어온 궁녀를 붙잡고 물었으나 그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고개만 저을 뿐이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겠다는 얼굴에 당장에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습니다.

고개를 들자 모두들 안색이 완전히 파랗게 질려 있었어요.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궁이라 할지라도 다들 친한 이 한둘은 있기 마련입니다. 피붙이와 입궁한 경우도 있어요. 그들은 모두 흩어져 제 소임을 다하고 있는데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공녀의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녀들이 모두 처형을 당하면 그 밑의 궁녀들이라고 무사하겠습니까?

도대체 이 많은 사람을 왜 죽이시겠다는 건지.

죽이신다는 황명은 알려졌는데 어찌하여 그 연유는 알려지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아연하게 소식을 알려 준 궁녀를 내려다보는데 다른 궁녀가 제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습니다.

“마마.”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습니다.

“제 여동생을 구해 주시옵소서.”

쾅! 마치 뭔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났습니다. 그건 너무 큰 소리여서 궁녀가 제 머리를 바닥에 찧어 낸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였어요. 그녀는 정말 다급하고 간절하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다시 머리를 찧으려 해서 저는 황급히 소리쳤어요.

“지금 네가 감히 나를 겁박하는 것이냐?!”

머리가 빨갛게 부어오른 궁녀가 저를 멍하니 올려다봤어요. 저는 고개를 홱 돌리면서 “그, 그런 게 아니라면 그런 짓은 하지 말지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궁녀가 송구하다고 말하는데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습니다. 여동생이 잘못될까 봐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는 목소리였어요.

당연한 일입니다. 황궁에서는 하루아침에 목숨이 날아가니까요. 저 또한 하룻밤 사이에 지아비께서 돌아가실 뻔하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그분은 태자 전하셨는데도요. 그러니 궁녀의 목숨은 정말 참새 목숨입니다.

“채비하라. 내시성으로 갈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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