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꿈에서 저를 놀라게 한 존재는 태자 전하, 즉 황상의 아드님이셨습니다.
그분은, 그러니까 태자는 제가 낳은 아이였어요. 산고 끝에 저는 죽었지만 아이는 살아남았고 태자의 위에 올랐습니다. 아이는 열두 살이었어요. 그러니까 저는 제가 낳은 아이가 열두 살인 모습을 볼 수 있는 겁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저는 튕겨지듯 일어났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제가 서비, 공녀의 몸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낳은 아이가 건강한지 괜찮은지 확인해야 했어요. 무사한지, 손가락과 발가락은 잘 달렸는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누가 무엄한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물론 황상께옵서 잘 거두어 주셨을 것이나….
저는 최근에 그분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게 되었죠. 그분은 좋은 분이지만 우리의 아이에 대해 어떤 태도를 견지하셨을지 알 수가 없어요. 그분은 저를 아끼시지만… 저만 아끼시니까요.
저는 초조해졌습니다. 처소를 계속 맴돌았어요. 어떻게 해야 태자 전하를, 그 아이를 볼 수 있을까요?
아무리 방 안을 거닐어도 서비로 방금 책봉된 제가 태자 전하를 뵐 수 있는 좋은 핑곗거리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황상께 청을 올려 볼까요.
…황상께 말 한마디 건네는 것조차 내키지 않는 것은 제가 이곳을 매우 낯설게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에 이 꿈에 왔을 때는 냉궁에 있을 때였죠.
저는 사회적으로 사형 선고를 당했었습니다. 죽음만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꿈에 몰입하는 게 즐거웠어요. 제겐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번에는 전혀 아니에요. 현실에는 제 지아비와 그의 꿈과 그리고 제 아이가 있습니다. 돌아가야 해요. 그러니 황상께 청을 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청을 올리면 그에 어울리는 감사를 해야 하니까요. 그러나 저는 보은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당장 만날 수가 없다면 가장 빨리 만날 수 있는 때는 언제일까.
아마 정월 연회에서겠지요. 그때까지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낳은 아이가 멀쩡한지, 제대로 된 대우를 받고 있는지, 잘 크고 있는지 소문을 수집하면서요.
숨이 막혔습니다. 아이는 괜찮은 것 같았습니다. 일단 장애는 없는 것 같았어요. 아이는 강하고 밝고 우아하고 큰 기대를 받고 있는 것에 비해 많이 억눌려 있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문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아이는 부황의 애정을 받진 못했어요. 황상은 유일한 소생에게조차 애정을 주지 않았습니다. 공식 석상이 아니면 만나고자 하지도 않았다고 하니 아이는 스스로 컸을 것입니다.
황궁에서 스스로 큰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황궁은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어린아이에게도 소임과 권리가 있지요. 자신의 자리에 대해서 아는 건 아주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치된 아이는 위험에 빠져요. 죽거나 혹은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아이의 안전과 행복이 너무 궁금한데 지금 보러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마음이 초조하게 타들어 갔습니다. 황후마마도 아니 계신 이 상황에서 황상께옵서 태자를 외면하시면 태자에게는 배경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는 너무나 외롭고 고독하고….
“…마, 마마?”
누군가가 저를 불러 저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습니다. 상궁이었어요. 상궁이 저를 의아하다는 듯, 조금은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등을 의식적으로 세우면서 그녀의 시선을 받았습니다.
“왜, 무슨 일이냐?”
“그, 늦은 시간인데….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태자 전하께옵서 뵙기를 청하옵니다.”
가슴이 쿵 떨어졌어요. 마치 그 아이가 제 마음을 읽은 것 같았습니다. 반가움에 몸에 열이 확 올랐다가 혹시 저에게 경고라도 하려고 온 건가 싶어 그 열이 싸하게 가라앉았습니다. 마음에 들 리가 없지요.
저는 태자에겐 공녀에서 갑자기 서모의 자리를 꿰찬 여인이 될 테니까요. 저도 모르게 마른세수를 하려다 화장을 생각하고 간신히 참았습니다. 마른세수를 하는 버릇은 산실에서 생겼어요. 거기서는 화장을 못 하게 합니다. 정화, 정화. 신녀들은 그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모셔야지.”
제 말에 상궁이 허리를 숙이고 뒷걸음질하는 게 보였습니다. 그녀의 뒤로 연하늘색, 거의 흰색에 가까운 휘장이 보였어요. 이제 흰색 휘장이라면 아주 진저리가 납니다. 정화라는 말도 싫습니다. 불길함만 가득한 그것들 너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리고 점차 한 존재가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제가 낳은 아이.
그리고 제가 기르지는 못한 아이.
그 아이가 저를 향해 자박자박 걸어오는 게 느껴졌습니다. 올해 열두 살의 태자 전하.
“서모께 인사 올리나이다.”
“태자 전하를 뵙사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법도에 맞는 절을 했습니다. 황귀비인 저는 실제로 후궁의 주인이 되었고 태자 전하는 저를 황후의 격에 맞춰 대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진짜 황후는 아니니 저 또한 태자 전하를 아들처럼 대할 수는 없지요. 우리는 서로가 윗사람인 기묘한 관계였습니다.
고개를 드는 순간 저는 태자 전하의 얼굴에서 적대감을 찾으려 애썼습니다. 그분이 조금이라도 저를 경계하고 있다면, 사실 경계하시는 게 당연하지만 그렇다면 저는 아주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열두 살이면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닙니다. 이미 태자 전하로서는 입지를 세우셨을 나이시지요. 제 아이라는 건 제 마음일 뿐 태자 전하의 마음은 아닙니다.
그런데 태자 전하의 얼굴에는 적대감이 아주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열두 살의 태자 전하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말간 얼굴을 하고 계셨어요. 그분은 그저 저를 부드러운 눈으로 보고 계셨어요. 호기심 어린 눈도 아니고 경계하는 눈도 아니고… 도리어 호감에 가득 찬 눈이었습니다.
어째서? 이해할 수 없어 내려다보았을 때였습니다.
“어마마마.”
저를 그렇게 부르는 목소리가 수줍게 울렸습니다. 아, 그제야 저는 이해했어요. 이분은 너무 외로워서 어마마마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인 저를 보러 온 것 같았습니다.
열두 살인데? 태자로서 열두 살이면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울 나이입니다. 한데… 어찌 이렇게 맑고 깨끗할 수 있습니까. 저는 압도되어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이어도 이리했을까요? 아니면 제가 저이기 때문에 이리할 수 있었을까요?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했다면 분명 이용만 당했을 터인데.
“어떤 분이신지 소자 궁금하여 참을 길이 없어 달려왔나이다.”
“…….”
“소자, 효심으로 어마마마를 모시겠습니다.”
돌아가면… 돌아가기만 하면, 무사히 돌아가면 제가 이 아이를 지킬 수 있겠죠.
무사히…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이미 쓰러졌으니까, 어떻게 돌아가야 무사할지 저도 그 방도를 모릅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이렇게나 외로워서, 그걸 견딜 수가 없어서, 서모가 된 저를 보러 왔고, 제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고자 했고, 고작 한 번 보는 것으로 효심을 보여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황궁에서 태어나기엔 너무나 고운 혼.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많은 눈이 저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아는데도 저는 그 아이에게 휘청거리며 다가갔습니다. 제 육체는 저의 것이 아니고 그 아이가 보는 저는 타인입니다.
아는데도 저는 참을 수가 없었어요. 이렇게나 고운 아이를 왜 제 지아비께서는 외면하셨던 걸까요. 제가 죽어 가면서까지 낳은 아이였습니다. 도대체 왜 돌봐 주지 않으셨을까요.
안아 보고 싶은데 안아 볼 수가 없어서 저는 그분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분은 서모인 제가 손을 잡는 걸 의아히 여기면서도 순순히 제게 손을 내주셨어요. 그 손은 보드랍지만 어린아이의 것치고는 굳은살이 많이 박여 있었습니다. 검을 많이 훈련했다는 뜻이겠지요. 이렇게 굳은살이 박이는 동안 몇 번이고 피가 났을 터인데 한 번도 부황께서 돌봐 주지 않으신 걸까요.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분께 아무것도 약속해서는 안 돼요. 아는데도.
“다치시면… 꼭, 서모에게 오겠다고 약조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그 말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어요. 홀로 부상을 치료하시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제 말에 태자 전하는 가만히 계시다 천천히 웃으셨습니다. 모든 걸 다 가진 듯 환한 미소셨습니다.
“꼭 그리하겠습니다.”
그분은 몇 번이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에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돌아가야 하는데. 멀리서 또 새가 웁니다. 먼 곳에 있는 분이 저를 부르시는 것처럼 서러운 소리에 귀를 막고 싶어지는 걸 참고 태자 전하께 차를 권했습니다.
***
황상께옵서는 제게 다대한 총애를 베풀어 주셨으나 한편으로는 저를 완전히 감시하고 계셨습니다. 당연히 우리 사이는 예전과는 다르게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은 아슬아슬함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어요.
그분은 제게 아주 다정하면서도 저에게 결코 아무것도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저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그 어떤 물건도 용납하지 않으시고 저를 혼자 두지도 않으셨습니다. 화장실을 가는 것조차 반드시 궁녀들을 대동케 하셨어요. 당연히 숨이 막혔습니다.
“어여쁘십니다.”
제가 머리에서 비녀를 빼려고 하자 황상은 제 손을 만류하셨어요. 그리고 손수 제 비녀를 빼 주셨습니다. 제가 비녀로 스스로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봐 걱정하시는 듯했고 그렇게 다시 잠들어 사라질까 봐 경계하시는 듯도 했습니다.
“전하, 이전에 저는 누구의 몸에서 눈을 떴었사옵니까?”
저는 과거를 너무 많이 바꾸었습니다. 이쪽의 미래는 제가 모르는 것으로 진행되었지요. 이전에도 제가 이 미래에 도달하였던 것은 맞으나 유음 황녀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만큼 제가 누구의 몸에서 눈을 떴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공녀였습니다.”
“…공녀….”
“냉궁에 있던 공녀가 죽었는데 갑자기 관에서 되살아났지요. 아주 드문 일이라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이 궁녀가 우리 둘 사이에 주고받던 꽃을 수놓아 제게 탄생연 선물로 주더군요. 그리하여 알았습니다.”
당신이라는 것을.
제 지아비가 속삭이는 말에 소름이 돋습니다. 그 사람은 제가 아니니까요. 저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저는 공녀의 몸에서 눈을 떠 본 적이 없어요.
“당신에게 첩지를 내리겠다고 하니 싫다더군요. 곁에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며 첩지를 거절하여 굳이 첩지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생전에 고통스러운 게 많던 사람에게 굳이 힘든 일을 또 시킬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국모가 없던 채로 잘 굴러왔던 나라이니 굳이 당신에게 그런 과중한 격무를 떠안기지 않으려 했습니다.”
목소리가 조금, 안 좋아졌다고 느껴지는 건 저의 착각일까요.
저는 주변을 둘러보았어요. 우리 둘만 있을 때는 늘 시중드는 이들을 내보내는 분이라 오늘도 우리 둘뿐이었습니다. 이게 위협적으로 느껴진 적은 없었어요. 그분은, 어쨌거나 제가 아는 저의 지아비시긴 했으니까요. 저와 심적 거리가 있기는 해도 그분이 근본적으로 이연 태자임은 변함이 없습니다.
…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상하게 오싹합니다. 왜 오싹한지 모르겠어요.
그분의 손이 제 머리의 장신구들을 하나씩 빼냈습니다. 조금씩 흐트러지던 제 머리가 결국 후드득 떨어져 내렸어요. 긴, 검은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제 머리카락을 바라보던 그분이 제 머리채를 가볍게 붙잡으셨습니다.
등골에 냉기가 달렸어요. 그분은 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대신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대셨습니다. 아프지는 않지만 이상했어요.
황상께서 물으셨습니다.
“왜 도망갔어?”
“…폐하.”
“두 번이나. 한 번 도망갔을 때, 다시는 안 간다고 그랬잖아. 서혜야, 그런데 왜 또 도망갔어?”
거울 속에서 그분과 눈이 마주쳤어요. 그분의 눈에서 검은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누구야, 이 사람….
아연한 감정과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의 공포가 갑자기 찾아와 저는 말문을 잃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