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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중연 (64)화 (64/100)

64.

눈을 떴을 때 제가 본 것은 태자 전하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분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어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지만 그분이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어요.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분이 저를 끌어안고 물으셨습니다.

“내가 누구지?”

“…전하?”

제 말에 그분은 하아, 하고 한숨을 쉬셨어요. 그분의 몸에서 은은한 난향이 났습니다. 맡아 보지 못했던 향이라 의아했어요. 아니, 언젠가 맡아 본 것 같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이, 익숙하지 못한 향을. 어디선가에서.

…꿈속에서 맡아 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저는 전하를 확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여기가 어디지? 왜 제 배는 이토록 납작하죠? 이렇게 몸이 가뿐해서는 안 됩니다. 저의 태아는? 제 배 속의 아기씨는 어디에?

제가 거칠게 밀어내자 그분은 순순히 밀려나 주셨어요. 저는 그제야 그분이 제대로 보였습니다. 그분은 제가 아는 분과는 조금 달랐어요. 일단 의복만으로도 그분이 황제임을 알 수 있었고 외모도 더 연륜이 있어 보였으니까요. 이분이 누군지 압니다. 이분은 꿈속의 그분이시지요.

그렇다는 건 제가 지금….

저는 고개를 숙여 제 손을 확인했어요. 아니, 이 손은 제 손은 아니지만 성인의 손은 분명합니다. 유음 황녀의 손은 아니었어요. 그럼 도대체 이 손은 누구의 손인 거죠? 제가 고개를 들어 태자 전하, 아니 이곳에서는 황상이실 분을 바라보자 그분이 제 뺨을 어루만지셨어요.

“돌아오셨군요.”

“…전하.”

“돌아오셨습니다.”

그분이 다시 저를 끌어안으셨지만 이번에는 그분을 밀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이 돌아왔다고 말씀하시는 건 다시 말하자면 저는 지금 꿈속에 있고 현실에서는 자고 있거나 혹은 죽어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마지막, 제가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이 어땠었죠?

…누군가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났어요.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전하셨… 아니, 폐하. 폐하셨군요. 폐하께서 저를 부르셨군요.”

저를 부른 건 고모님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를 망치기 위해서, 제게 복수하기 위해서 주문을 외우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주문을 외우는 목소리는 고모님의 것이 맞았지만 저를 부르는 목소리는 분명 다른 분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요, 그 목소리는 태자 전하, 아니, 꿈속 황상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왜?

어째서 저를 여기로 부르신 거죠? 심지어 이 몸은 유음 황녀의 몸도 아닙니다. 유음 황녀는 어떻게 되었죠? 지금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죠?

“당신을 구하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이제 더는 됐습니다.”

“……?”

“여기에 계세요.”

그것이 황명이라는 이름의 명령임을 저는 조금 늦게 깨달았습니다. 그제야 저는 옆을 바라봤습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궁녀들, 상궁, 내관 그리고 태자, 아니 황상. 알지 못하는 육체. 어디인지 모르는 꿈속에서 황상은 웃고 계셨어요. 그분은 만족스러워 보이셨습니다.

그 웃음은 선선하고 맑고 그리고 아주 광기에 가득 차 있어서 저는 거기에 대고 감히 “돌아가야 합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

꿈속은 많이 변했습니다.

여기에는 유음 황녀도 없고 새로운 황후도 없습니다. 전혀 다른 곳이었어요. 모든 것이 변하여 황궁은 그때보다 더 지엄하고 호화롭고 스산한 곳이 되었습니다.

황상에게는 후궁도, 황후도 없었습니다. 황상의 여인들은 타국에서 온 공녀들뿐으로 그 외에는 일절 비도 후궁도 들이지 않았고 공녀들과도 전혀 잠자리를 하지 않으시는 분이었습니다.

단지 공녀들 사이에서는 계속 피바람이 불었는데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들은 종종 무언가를 잘못했고 냉궁으로 쫓겨 가길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하게도 냉궁에 간 공녀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요.

“마마, 첩지가 내려진다고 하옵니다!”

제가 들어온 몸의 주인 또한 공녀였고 냉궁으로 쫓겨 간 인물이었습니다. 이름은 화연. 성이 없는 것은 그녀가 이국에서 바쳐진 공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따로 있었으나 선나라로 오면서 선나라의 이름을 짓고 제 이름은 버렸다고 합니다.

화연은 그저 공녀였고 공녀들끼리의 다툼에 휘말려 냉궁에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냉궁에서 돌아온 유일한 공녀가 되었고 황상께옵서는 화연에게 첩지를 내린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황상의 시중을 든 적이 없는데도 그분은 그저 저의 존재만으로도 기꺼우신 겁니다. 첩지를 내려 바로 처소나 시중을 받는 데 있어 불편함이 없도록 돌봐 주시겠다는 의미시겠지요.

감사해야 할 일인데 왠지 모르게 가슴이 서늘한 것은 후궁이 너무 썰렁하기 때문일까요. 그 아름답던 후궁에 사람이 너무 없습니다. 꽃처럼 눈부시던 미인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요. 후궁에 사는 사람이 없으니 관리가 잘되어 있어도 이상합니다. 화려한 후궁은 그대로인데 이상하게 귀신이 사는 것만 같아요. 후궁을 거니는 내내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원하시는 처소는 어디든 고르라 하시옵니다.”

제게 주어진 궁녀들은 하나같이 어여쁘고 싹싹했습니다. 그녀들은 저와 같이 후궁을 거닐며 이 궁도 좋고 저 궁도 좋다고 재잘거렸어요. 마치 값비싼 새들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마마, 외투를 걸치셔요.”

상궁이 저에게 외투를 걸쳐 주었습니다. 모르는 상궁이에요. 꿈속은 여름이 아니라 한겨울의 중간이었습니다. 정월이 곧 다가온다는데 정월 연회에 누가 참석할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참석은 고사하고 그 연회를 누가 치르죠? 황후마마도 아니 계시고 후궁마마들도 아니 계신데 그 책임자가 누구란 말입니까?

아니, 그 전에.

“마마라고 하는 건 그만두시게나. 첩지가 내려지지도 않았는데.”

마마와 마마님은 엄연히 다르고, 마마는 존칭입니다. 아무나 들을 수 있는 존칭이 아니죠. 저는 불편해서 미간을 좁혔습니다. 그러나 상궁은 당당했어요.

“마마, 비마마가 되시는 건 확정이옵니다. 단지 어느 비가 되시느냐 차이일 뿐이지요.”

“…….”

“성총이옵니다. 받아들이시옵소서.”

성총을 받아들이라고?

이상한 일입니다. 그분은 저의 지아비이시고 저는 그분을 모실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마치 그분이 모르는 분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는 분이라고? 제가 연모하는 그분이라고?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저와 같은 시간대에서 같은 것을 고민하고 같은 것에 맞닥뜨렸던 그분이 아니신걸요….

제 몸이 다른 사람의 몸이듯이.

그분 또한 같은 분일 수 없어요.

“나는….”

제가 입을 열려는 찰나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내시감이었어요.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습니다. 제 첩지에 관한 이야기겠지만 그 이야기가 왠지 저를 불쾌하게 만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내시감이 다가와 저에게 절을 했고 저 또한 법도로서 그 절을 받았습니다. 이윽고 내시감이 경하드린다며 함박 웃었습니다. 저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침묵했고요. 그러자 내시감이 말했습니다.

“첩지가 내려질 것이옵니다. 서비에 오르시게 되었나이다.”

“서비?”

귀비도, 혜비도, 현비도 아닌 서비?

본래 있는 직첩이 아니니 황상께서 따로 내리신 이름이 될 것입니다. 무슨 뜻이지, 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깨닫고야 말았습니다. ‘서’가 무슨 서일지. 제가 “설마.” 하고 중얼거리자 내시감이 활짝 웃어 보였어요.

“상서로울 서. 유일무이한 황귀비가 되시는 것이옵니다.”

상서로울 서.

그건 살아 있을 때 저의 이름에만 들어갈 수 있는 한자였습니다. 제가 죽은 뒤에도 아마 아무도 쓰지 못하였을 거예요. 그 한자를 내리신다는 건 저를, 그러니까 제가 들어앉아 있는 이 공녀를 저의 위치에 상응하는 수준까지 올리시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지금 현실에서 저는 어쩌고 있을까요? 죽었을까요, 아니면 잠들어 있는 것일까요? 며칠이나 잠들어 있을까요? 해산일이 다가오고 있는데 제가 잠들어 있는 건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요?

일어나야 하는데….

고통을 주어서 억지로 일어날 것도 생각해 봤지만 황명이라며 궁녀들이 한시도 제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위험한 물건들은 모두 제가 만지지도 못하게 해요. 예민한 것일 수도 있지만 왠지 제가 꿈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감시당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서비마마, 감축 드리나이다.”

내시감의 말에 모두가 다 같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자리에 서 있는 건 오로지 저 하나였어요. 존귀한 자리에 오른 것이라는 실감이 났으나 마음은 무거워졌습니다. 이 자리는 제 자리가 아닙니다. 이 육체가 제 육신이 아닌 것처럼.

황상께옵서는 제가 유음 황녀의 몸에 깃들었을 때처럼 제 몸에 일절 손대지 아니하셨어요. 그분은 밤마다 들러 저와 석반을 같이하실 뿐이셨습니다. 우리는 단둘이 상을 받아 마치 어린 날의 여느 때처럼 석반을 들었습니다. 황송하옵게도 황상께서 시중을 들어 주셨지요.

“하저하세요.”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저는 오늘 밤에도 돌아가야 한다든가, 왜 부르셨냐는 말을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했습니다. 쓸쓸한 후궁과 어떤 여인도 곁에 두지 않고 살아가시는 황상의 모습과 그리고 그분이 부르신 저. 제가 여기에 대고 어떻게 왜 부르셨냐고, 돌아가야 한다고 말을 할까요.

“석반을 챙겨 줄 수 있다니.”

황상께서 감격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리셨습니다.

“그저 하늘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것도 아니고 밥을 챙겨 주고 싶으시다는 분께 제가 어떻게 그런 무엄한 말을 할 수 있나요.

저는 깔깔한 입으로 간신히 밥을 넘겼습니다. 밥을 먹다 고개를 들면 꿈속에 계시는 듯한 황홀한 눈으로 황상께서 저를 바라보고 계시는 게 보였습니다. 그 눈을 제대로 마주할 수가 없었어요.

이렇게 또 하루가 흘렀습니다. 멀리서 저녁에 우는 새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 소리는 서글퍼서 누군가가 저를 부르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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