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산실에 들어온다는 것은 사바세계(괴로움이 많은 인간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안전 문제도 그렇지만 제가 그곳에 여러 가지 일들을 벌여 놓았으니까요. 저는 그 일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확인하고 거기에 대해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창구가 필요했습니다.
하여 저와 월아가 고심하여 만든 것이 도시락 통이었습니다. 도시락 통을 바꿔치기하는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똑같아 보이는 도시락 통이지만 사실은 바닥이 하나 더 있어 서신을 넣을 수 있게 되어 있는 구조였습니다.
서신이 왔지만 보는 것 또한 어려웠습니다. 분합문을 아무 이유 없이 닫으라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요. 따라서 서신을 보는 건 늦은 밤, 잠들기 직전에나 가능했습니다. 서신을 겨우 읽게 되었을 때 그 내용은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태자 전하의 심리가 진행되었습니다만 일단 무혐의로 결론이 났습니다. 생각보다 빠른 결론은 태자 전하께옵서 자신의 권력을 유감없이 사용하셨다는 걸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은 아마 일부러 이런 행동을 하신 걸로 추측됩니다. 힘의 권력 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신 거지요.
태자 전하는 빠져나오셨으나 황후마마는 그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네, 이 그물은 애초에 단 한 명, 황후마마를 위한 그물이었어요. 모두가 그분을 몰기 위해 미끼를 자처하고 북을 울리고 있는 겁니다. 황후마마는 이 사냥터에서 유일한 사냥감이며 그분이 도망갈 구석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사냥터에는 본래 사냥감과 사냥꾼 외에는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황후마마의 죄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제국에는 오직 한 사람, 황상밖에 안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한 번도 황후마마의 편이셨던 적이 없으신 분이지요. 이 일이 이렇게 돌아간 데에는 누군가의 섬세한 조작이 느껴집니다. 다들 느끼고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 뜻대로 움직이는 건 각자 계산이 있기 때문이지요. 득이 있다면 짜인 판대로 움직이는 것이 무에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움직이면서도 아마 모두 그 뒤에서 이 일을 진짜로 조율한 이가 누군지 알아보려고 할 겁니다.
누구일까요.
저는 왠지 태자 전하이실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뒤로 섬세하게 판을 짜셨으면서 왜 보란 듯이 권력을 남용하여 자신이 흑막임을 자처하신 걸까요? 이 점이 이해가 안 됩니다. 판을 짜신 게 태자 전하시라면 제가 아는 그분은 권력을 사용하시지 않고 본인의 심리를 그대로 진행하시어 아무도 자신의 일을 알지 못하게 하실 분인데…. 아무래도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왕비 전하로부터의 서신이 있었습니다.
많은 후궁들로부터 빚을 볼모로 많은 이익을 취한 점에 대해 상세하게 적혀 있었어요. 하지만 사왕비 전하께서 후궁들의 처소를 오가는 것을 감찰 상궁이 의아히 여긴다는 소문이 있다는 말에 슬슬 이 일에서 발을 빼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찰 상궁이 궁녀들부터 족치기 시작하면 어딘가에서는 말이 샐 테니까요. 사실 말이 새어도 크게 문제가 될 건 없긴 합니다. 저는 태자비이고 감찰 상궁이 건드릴 수 있는 위치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아래서 부글부글 끓던 문제가 위로 튀는 순간이 생기니 적절한 때에 일을 마무리해야 합니다. 저는 이런 일을 처음 해 봤지만 남들이 하는 건 많이 봤으니까요. 들어가는 순간보다 나오는 순간이 더 중요하지요.
슬슬 마무리 지으시라는 연락을 하려 하는데 날이 밝으려고 합니다. 서신을 쓸 수가 없어요. 또 분합문을 다 열어 버릴 테니까요. 어쩔 수 없이 내일 밤에 서신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서신을 쓸 수 없으니 머릿속으로만 생각을 해 보려는 찰나에 분합문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얀 휘장이 휘날리네요.
그리고 아침 식사가 도착할 때까지 저는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고 있었습니다. 사왕비 전하께 정확히 말씀드려야 할 부분들, 태자 전하께 서신을 써야 할지,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데 또 아침 식사가 도착하고 한 입 먹자마자 눈살을 찌푸렸어요. 쇠 맛이 났거든요. 도대체 정화를 한다는 게 무얼 한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불평을 하면 안 되지만….
“쇠 맛이 나는구나.”
한마디 하자 서 상궁이 기미를 하였던 궁녀를 바라봅니다. 그러자 궁녀가 고개를 저었어요.
“그런 맛은 아니 났사옵니다.”
“젓가락.”
서 상궁이 손을 내밀자 궁녀가 그 손에 새로운 은 젓가락을 조심스럽게 올려놨어요. 서 상궁이 저에게 “송구하옵니다.”라고 양해를 구하며 제 식사를 조금씩 가져가 하나씩 맛보기 시작했어요. 이윽고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이 저를 바라봤어요. 저는 그 얼굴에서 쇠 맛을 저만 느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아니 나느냐?”
이렇게나 이상한 맛이 나는데?
제가 묻자 서 상궁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급히 고개를 숙였습니다.
“아무래도 회임하시어 입이 깔깔하신 듯하오니….”
제 처소였다면 여러 가지를 준비하였겠으나 여기는 산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서 상궁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을 깜빡이다 조심스럽게 물었어요.
“현화차를 준비할까요, 전하?”
현화라는 것은 회임한 여인들이 주로 마시는 꽃차입니다. 회임한 여인에게 좋은 꽃들을 따로 말려 만든 아름다운 차지요. 은은한 단맛이 있어 저도 무척 즐기는 차이고 특히 차갑게 마시면 상쾌합니다. 입이 상쾌하면 식사를 좀 할 수 있을까 싶어 고개를 끄덕였어요.
차를 마시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했어요. 쇠 맛에 대한 생각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회임하여 입맛이 떨어진 거라면 제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처소에서는 괜찮았고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아마 제가 여기서 많이 긴장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날 밤 서신을 두 가지를 썼습니다.
하나는 사왕비 전하께,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태자 전하께. 사왕비 전하께는 이런저런 걸 많이 말씀드렸어요. 후궁에서 돈을 회수하실 것, 그리고 우리가 이전에 계획한 대로 모두에게 ‘이자’를 받아 내실 것. 사왕께 무조건 자중하시길 누차 강조드릴 것.
저희가 움직이는 동안 사왕 전하께옵서는 운왕부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시는 게 중요하니까요. 양쪽에서 접근하면 황상께옵서는 운왕부를 다른 쪽에게 던져 주실 수도 있습니다. 황상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라고 여기셔서 보란 듯이 그러실 수도 있으시니 사왕 전하께옵서는 무조건 폐하께 순종하셔야 합니다.
지금 잘하시고 계시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아직 부족해요. 사왕 전하께옵서 친태자파라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니까요. 동궁에 힘을 실어 주고 싶지 않은 황상에게서 운왕부를 얻어 내려면 아주 순종적이셔야 할 겁니다.
그런 걸 쓰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할 말이 많았으니까요. 할 일도 많았고요. 동궁에 남겨 둔 상궁에게 미리 지시해 둔 바가 있으니 그녀와 잘 상의하여 동궁의 내탕금을 가져다 쓰는 데도 무리가 없을 터이고 사왕부도 재정이 튼튼한 곳이니 사왕비 전하께서는 여러모로 잘해 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일에 사활을 걸고 계시는 건 저보다는 도리어 사왕비 전하 쪽이시니까요.
저는 운왕부가 다른 곳으로 가는 걸 막기 위해서지만 사왕부는 직접적으로 운왕부를 흡수하는 일입니다. 아주, 큰일이지요. 동궁으로 올라오시지 못하시는 이상 아마 생애 가장 큰 기회이실 수도 있습니다. 사왕비 전하는 이번 일에 정말 말 그대로 목숨과 혼을 거셨어요. 귀신을 사서라도 이 일을 반드시 성공하시고자 해요.
그런데 정작 태자 전하께 쓸 서신에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상한 일이에요. 마음은 넘쳐흐르는데 그 마음을 글자로 표현할 수가 없다니요.
연모합니다. 그립습니다.
그런 말만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저는 잘 지냅니다. 염려 거두셔요.
그 한마디 쓰는데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전하께서 무탈하시기를 늘 기원하고 있사옵니다.
이런 건 너무 당연하고 또 티 내는 거 같아서.
고작 한마디 쓰고 오래도록 하얀 종이를 바라봤어요. 밤이 가고 있다는 걸 아는데, 초조한 마음은 계속 흘러넘쳐 제 발밑에 고여 강이 되어 흐르는데, 보이지 않는 강이 님의 창가에 별빛으로 흐르고 있을 것 같은데, 정작 저는 한마디도 할 수가 없는 바보가 되었습니다.
꼭 무사히 전하 곁으로 돌아가겠사옵니다.
그때는 둘이 되어 문안드릴게요, 전하.
그저 그 다짐 한마디 하는 게 다였어요. 서신을 두고 새벽이 오도록 생각해 봐도 할 수 있는 말은, 넘치는 마음속에서 제가 글자로 건져 낼 수 있는 말은 오직 그것뿐이었습니다.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다섯 꽃잎이 출산 끝에 산고로 죽은 예는 없지만 세 꽃잎이 죽은 경우는 꽤 있었습니다.
저는 몸이 약한 편이니 전하께서는 사실 걱정하고 계시는 걸 압니다. 산실에 들어오는 문제를 두고도 태자 전하께옵서 미룰 수 있는 데까지 미뤄 주신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제가 해야 할 말은 이 한마디.
반드시 무사하게 돌아가겠노라고.
종이 위에 그리고 제 마음 위에 새겨 넣으면서 저는 결국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많던 서신을 짧게 마무리했어요. 마음이 넘치면 말은 마음에 눌려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된 밤이었습니다.
***
황후마마의 폐위가 결정된 건 제 해산 예정일이 열흘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였습니다. 황상의 노여움이 가라앉질 않았어요. 황상께서 가장 노여워하셨던 건 황후마마께옵서 적들과 내통하시어 이권을 취하려고 하셨던 것에 대한 게 아닙니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그것이지만 사실은 황후마마께옵서 황상이 주시는 것에만 감사하며 사는 게 아니라 감히 독립적인 방식으로 세력을 구축하시려고 한 것에 대한 괘씸함이 큽니다. 적과의 내통이나 이런 건 다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폐위와 함께 황후마마께옵서는 냉궁행이 결정되셨어요. 그분은 이제 냉궁에서 평생 사시게 될 겁니다. 호사스러운 삶을 사셨던 분이니 오래 견디지 못하실 거예요. 저도 냉궁에 조금 살아 봤지만 황후마마께옵서는 정말 버티기 어려우실 겁니다. 게다가 냉궁에는 음험한 소문이 돌아요. 냉궁에 간 여인들이 정말 다 미치거나 자진하여 죽었을까요? 아무도 없는 그 적막한 공간은, 다시 말하자면 사람을 죽이기에 얼마나 편리한 공간인가요.
심상운 대감은 이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을까요? 했을 텐데, 반대급부가 있었거나 혹은 이보다 더 최악의 상황을 피해야 했거나 둘 중에 하나의 선택지가 그에게 존재했을 겁니다. 누가 그 선택지를 내밀었을까요. 저는 태자 전하실 것 같습니다. 지금 움직이고 있는 분은 태자 전하인 것 같아요.
아, 물론 태자 전하만 움직이고 계시는 건 아니죠. 모두가 움직이고 있는 거지요. 황상, 태후마마는 물론이고 많은 친왕 전하와 왕비 전하들까지. 모두가 다들 은밀하게 자신의 수를 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처럼 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으니까요.
황후마마는 냉궁에 가셨으니 일단 끝났고 태후마마와 황상을 어떻게 하면 등을 돌리게 하고 태후마마에 대한 반감을 통해 운왕부를 사왕부에서 흡수하게 할 수 있을까. 물론 저는 황상의 내관들에게도 약간의 수를 써 두었기 때문에 어떤 결과는 나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좋은 결과일 거예요. 단지 얼마나 좋은 결과이냐, 가 문제가 될 뿐입니다. 황상께옵서는….
머리가 어질했습니다.
“응?”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튀어나왔어요. 이상한 목소리라고 생각한 건 저만이 아니었는지 서 상궁이 저에게 “전하?”라고 부르는 것이 들렸습니다. 서 상궁은 아주 가까이에 있었던 것 같은데 그녀의 목소리는 왜 이렇게 멀리 들릴까요.
“비전하?”
이상하게 머리가 핑핑 돌아요. 갑자기.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도저히 눈앞을 확인할 수가 없어요. 앉고 싶은데 앉지도 못하겠어요. 비린 냄새가 납니다. 이게 무슨 냄새죠?
“비전하?”
누군가가 저를 붙잡는 게 느껴집니다. 왜 붙잡는 거죠? 왜, 라고 한 번 더 생각한 순간 비린 것이 울컥 제 배 속에서부터 올라왔습니다. 저는 무언가를 토해 냈어요. 비린 것. 그게 피라는 걸 아주 조금 뒤에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제 다리 사이에서 뭔가가 흘러내리는 걸 느꼈어요. 그것도 피라면 저는 지금 하혈을 하고 있는…. 왜…?
뭔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주문 소리가. 언제가 들은 적이 있어요, 이 소리를.
누군가가 주문을 외고 있는데.
“소리가, 소리가….”
제 말에 서 상궁이 다급히 물었어요.
“전하, 소리 말이옵니까? 무슨 소리가? 전하?”
태의를 불러와야 한다, 아니 여기는 산실이라 그럴 수 없다, 이런 목소리들이 다 멀어지고 주문을 외는 소리만 크게 들려요. 이 목소리를 제가 어디서 들어봤…. 아, 기억났다.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때. 꿈에서 돌아왔을 때. 그때 분명 이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던 기억이 납니다. 그 목소리가 들리고 있어요.
“주문을, 외지, 못하게 해….”
제 명령에 저를 붙잡고 있는 누군가가 저를 놓고 뛰어나가는 게 느껴졌어요. 아마, 월아겠죠. 주문을 멈춰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는데 주문이 멈춰지지 않아요. 주문 소리가 더 커져 갑니다. 이 목소리는 제 고모님의 목소리인데 이 목소리가 어떻게 제 귀에 들리고 있죠? 누군가가 저를 불러요. 계속 저를 부르고 있어요. 누군가가, 멀리서. 저를.
불러요….
눈앞이 완전히 까매지기 시작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은.
무사히 돌아가겠다는 약조.
그런 약조를 하지 말았어야 했는가, 하는 것.